[유창선의 문화이야기] ‘햄릿 공주’는 왜 고뇌하지 않는 복수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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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17. 오후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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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각색된 국립극단 ‘햄릿’
복수·권력 노리는 이봉련의 ‘햄릿 공주’
인간에 대한 질문·고뇌는 부족
원작의 문학적 감동 덜해
배우 이봉련이 주인공 햄릿을 연기하는 국립극단 연극 '햄릿'. ⓒ국립극단 제공


"햄릿은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누군가에 의해 공연되고 있다." 앤 톰슨과 닐 테일러가 쓴 『햄릿, 아덴 셰익스피어』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1601년에 완성된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400년도 훨씬 지난 오늘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으로 살아있다. 연극뿐만 아니라 뮤지컬, 발레, 영화, 소설, 창극, 판소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주되고 각색돼 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국립극단이 오는 29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햄릿'도 파격적인 각색을 거친 작품이다. 원작과 가장 다르게 눈에 띄는 것은 '햄릿 왕자'가 아닌 '햄릿 공주'가 등장하는 점이다. '여자 햄릿'이 무대에 오른 것은 사실은 연극사에서 오래된 일이다. 이미 1899년에 프랑스 여성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한 '햄릿'이 있었다. 당시 햄릿의 나이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햄릿으로 나오는 데 대해 비평가들의 비판도 많았지만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번 극에서 햄릿역은 무대, 드라마, 영화를 가리지 않고 인상적인 연기로 존재감을 높여왔던 배우 이봉련이 맡았다. 부새롬 연출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캐스팅했다. 정말 그것 하나였다"고 캐스팅 이유를 설명한다. 대신 오필리어(류원준)는 폴로니어스(김용준)의 딸이 아닌 아들로 나온다. 이봉련 이외에도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 역에 김유민, 마셀러스 역에 김별 등 여성 배역들이 여럿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젠더 관점에서 햄릿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기대하면 실망할 수 있다. 연극을 보는 내내 고심했던 것은 햄릿이 여성으로 바뀐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햄릿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굳이 들자면 대사들 가운데 여성혐오적인 표현은 삭제한 정도였다. 이를테면 원작에서 나오던 "약한 자여, 네 이름은 여자로다", "하느님은 여자들에게 한 가지 얼굴을 주셨는데, 여자들은 딴 얼굴을 만들어" 같은 대사들은 사라졌다.

'햄릿'은 패륜적인 막장 복수극이다. 동생 클로디어스가 선왕을 살해하여 왕위를 차지하고는 형수 거트루드와 결혼한다. 그리고 조카 햄릿은 광기의 복수로 숙부를 살해하는 것이 핵심 줄거리다. 그 과정에서 주변에 있던 총리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등도 모두 죽게 된다. 혈육 간에 벌어지는 이런 막장 복수극이 셰익스피어의 최고 인기작이 되어 불멸의 고전으로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극단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제공 ​


그것은 권력에 대한 탐욕, 양심 앞에서의 고뇌와 번민, 선과 악에 대한 질문, 진실과 위선, 사랑과 배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룬 걸작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햄릿'을 읽거나 보면서 자신의 삶을 대입시키며 공감하곤 한다. 햄릿이 직면하고 고뇌하는 많은 문제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이 살면서 부딪히는 본질적 문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햄릿'을 보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햄릿의 편에 서게 된다.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게 흔들리는 존재였지만,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고서는 복수를 위해 결연히 행동하는 용감한 무사가 되는 햄릿은 우리들의 슬픈 영웅이다.

무엇보다 햄릿에게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의 복수가 깊은 실존적 고뇌를 거친 이후에 결행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일찍이 햄릿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훌륭하고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지만, 영웅적인 기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짊어지지도 못하고 던져버리지도 못하는 무거운 짐을 진 채 거꾸러진 인간이다." 그런 햄릿에 우리는 연민하고 공감해 온 것이다.

그런데 국립극단은 햄릿에게서 철학적 사유를 들어내 버렸다. 여자 햄릿 이봉련은 이렇게 말한다. "저에게 '햄릿'은 햄릿은 어때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저의 편견을 발견하고, 그 편견을 깨는 과정이었습니다. '햄릿은 이래야 한다', '주인공은 어때야 한다' 편견을 계속 깨나가는 작업이었죠." ('햄릿' 프로그램북)

극에 나오는 '햄릿 공주'는 원작과는 달리 양심 앞에서 고뇌하기보다는 그 또한 권력욕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 "착한 공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지"라고 말하면서 복수를 망설이지 않는다. 원작의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며 숙부 클로디어스를 향한 복수 앞에서 주저하지만, '악한 공주'에게는 그런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

배우 이봉련이 주인공 햄릿을 연기하는 국립극단 연극 '햄릿'. ⓒ국립극단 제공


그러니 원작에 깔려 있던 선악의 이분법은 해체된다. 햄릿이 여성이라고 해서 '착한 공주'를 예상하는 것은 착각이다. 햄릿 공주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왕권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고 복수심에 불타는, 그래서 남자 햄릿과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 '타르'에서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나온 타르(케이트 블란쳇)를 타락한 권력으로 설정한 데 대한 일부 여성들의 항변을 떠올릴 법도 하다. 여자 햄릿이라는 설정은 젠더의 관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등장인물들엔 선과 악이 혼재돼 있다. 선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고 형수와 결혼까지 한 클로디어스에게도 선왕에 의해 조카 대신 적대국으로 끌려가 죽을 운명을 피해야 했다는 이유가 주장된다. 남편을 죽인 클로디어스와 패륜적 결혼을 한 왕비 거트루드에게도 햄릿을 지켜야 했다는 이유가 있다. 원작에서는 클로디어스를 맹종했던 폴로니어스도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 죽음을 맞는 순간 "더러운 왕가 놈들"이라고 외치며 욕망에 갇힌 권력을 질타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 대부분에게는 저마다의 욕망과 양면의 얼굴이 있으니 어떤 자만이 절대 선이고 절대 악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인간 세계의 현실성을 높여준 극이다. 각색을 맡은 정진새 연출가는 "단지 원작이 대단하다는 이유로 이해가 되지 않는 연극을 수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연극 본연의 매력을 외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동시대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원작 숭배자와 타협 없이 마음껏 각색을 진행했다"라고 밝힌다. ('더프리뷰' 인터뷰)

예를 들면 원작의 2막 2장에는 햄릿이 자기를 찾아온 클로디어스의 스파이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훌륭한 걸작이냐. 숭고한 이성, 무한한 능력, 다양한 모습과 거동, 적절하고 탁월한 행동력, 천사와 같은 이해력. 인간은 과연 하느님을 닮았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이렇듯 지상의 아름다움이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나에게는 티끌로만 보이는구나. 인간은 나의 기쁨일 수 없어."

이 말 속에는 르네상스 이후에 재발견된 '인간'에 대한 관념이 드러나고 있다. 신을 닮으려 했던 인간의 모습은 이성과 능력과 개성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인식된다. 그래서 "햄릿의 대사에는 '인간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과 더불어 한편으로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자괴감 혹은 자의식이 느껴진다."(정진새)

그러나 각색을 거친 햄릿은 이렇게 대사를 바꾼다. "인간은 자기들만이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해 왔어. 인간한테만 영혼이 있고 마음이 있다고 착각했지. 다른 모든 생명체는 마음이 없어서,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고 생각한 거야. 아니, 고통 자체를 모른다고 생각한 거지. 웃기지 않아? 모르긴 뭘 몰라?.... 인간은 얼마나 우스운가. 진실을 감추려고 온갖 애를 쓰지. 인간... 너무 싫어. 인간도 싫고 인간이 만들어낸 이 세상도 싫다."

이런 대사는 당연한 자기 권리를 빼앗겨 정치력을 상실해 버린 햄릿 공주의 인간혐오이기도 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생명을 경시한 인류에 대한 자조적인 성찰이라는 것이다. 1600년대의 원작과 2020년대의 각색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정진새 연출가는 강조한다.

배우 이봉련이 주인공 햄릿을 연기하는 국립극단 연극 '햄릿'. ⓒ국립극단 제공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각색을 통해 강조하려 했던 그런 차이는 원작이 주었던 문학적 감동을 거세하는 대가를 치른다. 각색된 '햄릿'에서 부각된 기성세대의 권력욕으로 희생당하는 젊은 세대의 갈등, 선왕의 죽음-폴로니우스의 죽음-왕족들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왜곡해서 발표하는 조사위원회의 모습 등은 오늘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현실에 가까워진 그런 접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질문과 고뇌가 소거된 햄릿은 마치 '속없는 찐빵'과도 같았다.

러시아 문학가 이반 투르게네프는 햄릿을 이렇게 말했다. "햄릿은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자아 역시 매몰차게 의심의 대상에 올린다. 그는 지나치게 사려가 깊고 공정한 나머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발견한 것에 만족할 수 없다. 자의식이 강하고 자신이 나약한 존재임을 알고 있는 햄릿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깨닫는다. 하지만 햄릿에게는 이런 자의식 자체가 일종의 힘이다." (『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

현대적 각색에서 햄릿의 그런 자의식의 힘이 사라져 버리고 복수 활극으로 가버린 것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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