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남자들] 피아노, 욕망의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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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이하 남함페)'은 남성 연대에 균열을 내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교육, 연구,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그간 가부장제 아래 왜곡된 남성성에 변화를 만들고자 남함페 활동가 5인이 남성 섹슈얼리티, 관계, 돌봄 등 남성의 삶 전반을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톺아보려 한다. [편집자주]

ⓒ정민


"와아! 너무 잘 치셨어요!"

피아노 건반을 조금 눌렀을 뿐인데 레슨 선생님이 칭찬을 건넨다. 효능감이 샘솟는다. '피아노 레슨은 원래 이런 걸까? 아니면 나, 사실 피아노에 재능이 있을지도?' 꼭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삐끗, 애먼 건반을 누르고 만다. 그럼에도 지적과 비판 대신 격려의 말이 다가온다. "괜찮아요. 원래 어려운 구간이었어요." 그러면 다시 도전하게 된다. 사람은 본디 좋은 말에 약한 법이다. 이윽고 같은 구간에서 틀리지 않고 다음 악보로 전진한다.

피아노를 치는 시간은 평온하다. 우선 피아노가 들어선 작은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의자에 앉아, 피아노 앞에서 차 한잔 하며 하루의 가쁜 숨을 돌린다. 내가 치고 싶은 곡을 자유로이 고를 수 있고, 곡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다. 악보라는 최소한의 규칙이 있지만, 혼자 칠 때는 내 마음이다. 갑갑한 직장생활을 생각하며 우당탕 건반을 두드리기도 하고, 괜스레 서정적인 곡을 골라 훌쩍 거리며 건반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나만의 호흡으로, 평가 받지 않으며 내 감정을 연주하는 건 스스로를 다스리는 행위다. 몇십 분을 쉬고, 또 몇십 분을 연주하면 막혀 있던 감정의 수문이 선율을 따라 개방된다. 그렇게 피아노를 치는 시간은 돌봄의 시간이 된다.

멋진 남자가 되고픈 욕망

많고 많은 악기 중 피아노를 고른 이유는, 어렸을 때의 경험 때문이다. 태권도 학원과 피아노 학원쯤은 필수적인 자녀 교육 방법인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피아노 학원을 4년이나 다녔다. 그랬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 이유에는 '피아노 치는 남자'에 대한 판타지도 한몫했다. 피아노는 호불호가 없다. 게다가 특정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악기다. '한 번 쳐봐'라는 말에 어색해하더니, 막상 의자에 앉아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아름답다면? '오오!'하는 탄성을 절로 받을 수 있으리라. 주변에 여성이 있다면? 괜히 혼자 의식하며 힘이 잔뜩 들어가 빳빳하게 건반을 눌러대고 말 것이다.

'언젠가' 결혼을 할지 모른다는 판타지도 있다. 실현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결혼을 한다면 신부를 위해 멋진 피아노 한 곡쯤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다. 피아노처럼 흰색과 검은색이 조화로운 클래식한 정장을 입고, 광낸 구두로 페달을 밟으며 우아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가 되고픈 욕망이기도 했다. 이처럼 내 판타지와 마주할 기회를 주는 것도 돌봄의 선물이다. 잘 쉬어야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만큼 나를 알게 된다.

취미, 나를 돌보는 활동은 사치일까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이상적인 나'를 만들기 위한 활동만 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일주일에 피아노를 치러 갈 수 있는 날은 딱 이틀, 세 시간이 전부다. 내 게으름 탓도 있겠지만, 퇴근 후 귀가하면 이미 저녁 시간이 증발한 경우가 많다. 주말은 주말대로 바쁘다. 나만의 일이 아니다. 실제로 2023년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실제 여가시간과 희망 여가시간의 격차는 평일 48분, 휴일 42분인데, 이 격차는 5년째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피아노와의 달콤한 세레나데를 가로막는 벽은 시간만이 아니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실제 여가비용과 희망 여가비용의 차이는 7만원이었다. 이 격차 역시 2020년 이후로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 사회에서 취미는 곧 돈이다. 1년 내내 레슨을 받으며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월급은 여전히 사회초년생 신분인 내겐 사치다. 처음에 피아노 연습실을 딱 3개월만 끊었던 이유다. 그나마 등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만기 된 적금 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돌봄도 욕망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얼마 전 마지막 피아노 레슨이 끝났다. 당분간 피아노를 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위 많은 동료들이 삶이 바빠 여가시간을 일로 채우고 스스로 돌보는 행위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피아노가 주는 즐거움과 그 자체의 돌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한달에 월세와 적금, 교통비와 생활비를 제하면 월급이 모두 사라지는 경제력을 갖고 있지만, 끝끝내 나를 돌보며 살고야 말겠노라 다짐한다. '돌봄적 사고'를 하려 한다. 취향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돈이 부족해서 피아노를 못 친다면, 여러 명이 함께 쓸 수 있는 피아노 연습실을 구하는 것이다.

이때 나를 위한 돌봄은 곧 서로를 위한 돌봄이 된다. 그렇게 포기와 단절 대신 돌봄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피아노가 주는 돌봄도, 욕망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정민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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