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엄마 아닌 여자들’의 역사가 있다

입력
수정2024.07.02. 오후 8:09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페기 오도널 헤핑턴,『엄마 아닌 여자들』
대한가족계획협회에서 발행한 농촌 가정의 근대화를 위한 잡지 '가정의벗'의 표지. ⓒ인구보건복지협회


국가 비상사태다. '인구 국가 비상사태'. 온 나라가 나서서 여자가 아이를 안 낳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지자체에서 주최하는 소개팅, 케겔 운동의 권장, 여성들을 1년 조기 입학시켜 향후 적령기 남녀가 서로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게 하자는 방안까지 세간에 언급된 기상천외한 저출생 해법들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터다.

여기에 아이 없는 여자에 대한 비난과 편견이 언제나처럼 더해진다.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는 이기적이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모르는 세계가 있다' 등등… 그런 얘기를 하도 듣다 보니까 '없다'라는 말이 갖는 결핍의 뉘앙스로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체감하는 '나'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는다.

책 『엄마 아닌 여자들』은 미국 시카고대 역사학과 교수인 페기 오도널 헤핑턴이 써내려 간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들의 역사다. 그들은 '엄마'라는 단어를 경유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덜 가시화됐지만 꾸준히,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책의 각 장 제목이 바로 이들 존재의 이유다. 지난한 피임 및 임신중지의 역사(01 우리는 언제나 선택해왔기 때문에)와 함께 급격한 핵가족화가 진행되자, 가정에서 출산과 양육으로 고립된 여성(02 우리는 늘 혼자일 것이기에)이 등장했다. 여성들에게 사회적 성취와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몫을 모두 강요해왔던 사회(03 우리는 모든 걸 가질 수 없기에)가 있고, 기후위기로 생겨난 환경에 대한 염려(04 지구 때문에) 또한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원인이 됐다. 한편 아이를 원하면서도 난임을 겪는 여성(05 우리는 할 수 없으므로)이 있고, 반대로 '자발적 무자녀'의 삶(06 우리는 다른 삶을 원하기 때문에)을 선택한 이도 있었다.

ⓒ북다


이렇게 쭉 써놓고 보면 다들 굉장히 평범한 우리 주변의 레퍼런스들이다. '엄마인 여자'를 디폴트로 놓는 사회적 가정만 제거하고 보면 다들 납득 가능한, 혹은 누군가를 납득시킬 필요도 없게 자연스러운 이유들인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자녀 없는 여성'은 역사에 수도 없이 나타났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자녀가 없어 '처녀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세 자매, 에밀리 디킨슨, 버지니아 울프 등 19~20세기 초 영문학 고전 저자들도 모두 아이가 없었다.

여성들의 '선택'에 앞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들의 출산을 어렵게 한 사회 구조적인 변혁이다. 산업혁명이 도래하자 시골에서 가내 수공업을 하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와 공장의 임금노동자로 탈바꿈했다. 그곳에서 전과 달리 가정생활은 근로와 구별될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일터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 남아 전업주부가 되는 모델이 완성된 것이다. 도시화로 인해 핵가족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자 시골에서 누리던 육아 공동체의 개념도 사라졌다. 출산율은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은 이러한 모습들 이전에 물질적 부와 함께 자녀도 나누는 '가족 사회주의'가 존재했다고 증언한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리틀턴에 남아 있던 흑인 공동체에서, 자녀는 가정에서 가정으로 옮겨 다니며 자라났다. 비공식 입양이 흔했고, 모두가 모두를 가족처럼 여겼다.

이처럼 생물학적 출산과 무관한 자녀의 공동체 돌봄을 두고 책에서는 '어머니로서 역할하기'(mothering)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는 "공동체가 스스로와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 조직하는 전체 과정"이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실종되다시피 한 풍경이다.

1980년대 인구정책 포스터 ⓒ에듀넷


『엄마 아닌 여자들』은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기까지 개인의 선택만이 작동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가로막은 요인들을 적극 조명한다. 출산율이 높아지자 한국처럼 국가 차원의 산아 제한책이 실시된 곳이 있었다. 한때는 우생학 정책의 일환으로 특정 인종의 출산은 터부시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역할이 생물학적 어머니에게만 국한돼 여성을 고립시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여성의 '출산할 결심'을 크게 제약한다. 이렇듯 책에는 국가나 사회의 필요에 따라 여성의 몸과 출산이 일관되게 동원되었으되, 아이 돌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오랜 역사가 기술돼 있다.

"우리는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결혼하거나 엄마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삶'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272쪽) 출산 여부를 끊임없이 질문받았던 미국의 배우 제니퍼 애니스턴의 말이다. '온전한 존재'의 필요충분조건이 혼인이나 '엄마 되기'는 될 수 없다는 단호함과 함께, 내 삶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주체성에 방점이 찍혔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우리가 할 일'이란 여성이 아무런 제약 없이 스스로 삶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정말로 자기 본위에 따른 선택이 가능한 환경.

더 나아가서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어른의 '어머니로서 역할하기'가 이뤄지는 공동체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낸시 올리비는 1만 명의 아이를 키웠다."(295쪽) 37년 이상 시카고 공립학교 교사로 일했던 낸시 올리비의 명판 글귀가 주는 여운이 남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여성들에게 출산을 강권하기 전에 우리의 마을부터 돌아봐야 한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