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의 입문용 영어 교재 [프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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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10. 오전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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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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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는 늘 진지하기만 한 〈시사IN〉 기자들, 기사 바깥에서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친한 친구의 수다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읽어주세요.얼마 전 지인과 대화를 하다 “정말? 그 정도라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지인은 지난해 서울 강남의 한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가 다닐 유치원을 구하고 있는데 그 동네에서는 영어 유치원이 기본이라 오히려 일반 유치원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는 유품이 된 A씨의 메모를 읽다가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전남 순천의 특성화고를 졸업한 A씨는, 현장실습을 나갔던 전북 전주시의 제지 공장에 입사한 지 6개월 남짓 된 신입 직원이었다. 일요일이던 6월16일, 7시45분 아침 조회를 마친 그는 홀로 배관 점검 업무에 나섰다. 오전 9시 작업반장이 건 전화를 받지 않자 동료들이 그를 찾아 나섰고, 9시22분쯤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A씨를 발견했다. 곧바로 병원 응급실에 이송되었지만 19세 노동자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6월20일 유족과 노조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달 A씨는 50시간에 이르는 연장근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점검을 나갔을 당시 기계가 5일 정도 가동되지 않은 상태여서, 내부에서 제지가 썩으며 황화수소 등 유독가스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해당 공정에서 ‘빈번하게 황화수소가 발생했다’는 선임 직원의 말이 노조를 통해 전해졌다. 2인1조 근무를 하지 않아, 쓰러진 A씨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지연된 점도 문제가 되었다. 회사는 A씨가 했던 점검 업무는 2인1조로 투입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고, 사고 당일과 이튿날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가스 누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며 안전관리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전남 순천의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전북 전주시 제지공장에 입사했다가 6개월만에 숨진 A씨가 남긴 메모. ©민주노총 전국본부 제공


회사 기숙사에서 A씨의 유품을 정리하다 나온 수첩과 노트에는 하고 싶은 것과 목표, 인생 계획, 다짐 등이 여러 장에 걸쳐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A씨는 인생 계획 1번으로 ‘다른 언어 공부하기’를 잡고, 세부 계획도 꼼꼼하게 세워두었다. 언론에 공개된 수첩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목이 턱 막혔다. ‘공부하기 위해 필요한 것. 언어 공부-영어 단어책, 문법책, 일본어 책’ ‘영어 단어책-1권(입문용)’ ‘영어 문법책-1권(입문용)’ ‘일본어 책-1권(입문용)’. 회화책도, 토익책도 아닌 입문용 영어 교재.

한국 사회의 생활수준은 분명 향상되었다.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영어 유치원이 어느덧 신도시 부부의 생활상을 풍자한 유튜브 영상에 위화감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년들의 죽음이 다른 곳도 아닌 일터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늘어난 부로 각자 뒤처지지 않기 위한 자력구제에 매달리는 사이, 어떤 일터는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한 사회의 부유함이 도달해야 할 필수적인 곳은 정작 방치되고 있는 건 아닐까? 회사는 A씨가 세상을 떠나고 22일이 지난 7월8일 유족에게 위로와 사과의 뜻을 전했다. 뒤늦은 장례식이 청년의 고향인 순천에서 치러진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무력한 말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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