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유가족’이 되어 50년 만에 재회한 동네 언니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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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4.05. 오전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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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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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네 언니, 동생 사이였던 이옥수씨와 최순화씨가 50년 뒤 ‘참사 유가족’이 되어 재회했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두 사람의 4월이 시작됐다.한동안은 멀리 떨어져 지내던 인연이었다. 이옥수씨와 최순화씨는 어릴 적 전북 진안군 한 마을에 사는 두 살 차이의 언니, 동생 사이였다. 열 가구 남짓 사는 마을이어서 가깝게 지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이옥수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가며 둘은 멀어졌다. 후일 이씨의 부모가 고향으로 돌아와 최순화씨 부모 옆집에 살게 되며 서로의 소식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이옥수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들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정작 두 사람은 고향을 오가며 서로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50여 년이 흘러 지난 2월15일 두 사람은 서울에서 만나게 됐다. 서울광장에 위치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철거하라고 서울시가 최후통첩한 날이었다. 이옥수씨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현진씨의 어머니다. 분향소를 지키기 위해 서울광장에 갔다. 희생자 159명의 명복을 비는 159배를 하고 서울시의 대처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최순화씨는 세월호 희생자 이창현씨의 어머니다. 그날 저녁 서울광장 옆 도로에서 열린 고 백기완 선생 2주기 추모제에 참여하기 위해 안산에서 서울로 향했다. 세월호 4·16 합창단 단장인 최씨가 추모제의 시작을 열었다. 다시 만난 두 사람 이름 앞에는 ‘참사 유가족’이라는 동일한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고향 언니, 동생 사이였던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현진씨의 어머니 이옥수씨(왼쪽)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이창현씨의 어머니 최순화씨가 50여 년 만에 서울에서 재회했다. ©김흥구


3월28일, 두 번째로 만난 두 사람 사이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 짧은 만남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함께 고향에서 자랐던 지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이옥수씨가 얼마 전 동창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다. 참석하지 않으려 했는데, 친구들이 자신에게 시간을 맞춰 어쩔 수 없이 다녀왔노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최순화씨가 말했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가봤자 한숨만 나올걸.” “사실 현진이 이야기만 시작하면 눈물이 나와서 조용히 있다가 왔어.” 이옥수씨가 답했다.

9년 전 4월16일, 이옥수씨는 중국에 여행을 가 있었다. 그곳에서 뉴스 속보로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었다. 고향 동생인 최순화씨의 아들이 그 희생자라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나중 일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최씨를 찾아가지도, 전화를 걸지도 못했다. 9년이 지나고서야 이씨는 “사는 게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광화문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한 번은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최씨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올해 초엔 최순화씨가 이옥수씨의 소식을 듣게 됐다. 설날 전 고향에 갔을 때다.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전달받은 최씨는 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으로 한 통화가 어색해 존댓말로 인사를 건넸다. 많은 말을 하지는 못했다. 자신도 겪어본 일이기에, 여전히 경황이 없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소식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곧 만나자는 이야기를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이옥수씨의 딸이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현진씨의 영정을 최순화씨가 닦아주고 있다. ©김흥구


이옥수씨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종종 외로움을 느낀다고 최순화씨에게 털어놓았다. 가족들은 정부와의 싸움에 나서는 이씨를 말렸다. 더 이상 이옥수씨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이씨를 최씨가 위로했다. “확실히 그 누구보다도 엄마가 더 절실한 거 같아.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현진이 엄마로서 가족들에게 당당히 요구해도 돼.”

세월호·이태원 유가족이 함께 걷는 길



두 살 아래 동생이지만, 9년째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최씨는 이옥수씨에게 ‘투쟁 선배’였다. 자연스레 투쟁 방식에 관련된 고민과 질문들이 나왔다. 이씨는 “기자회견 같은 ‘온건한’ 방법으로 정부에 대항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잊혀가고, 실질적으로 바뀌는 것도 없는 게 아닌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이옥수씨의 말을 조용히 듣던 최순화씨가 답했다. “우리가 100만큼 요구하면 결국 이뤄지는 건 10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방해로 남는 건 1이었어. 우리가 사람들 비난이 두려울 게 어디 있어. 조금이라도 주목받고, 목표를 이루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해.” 최씨의 말처럼 지난 9년간 세월호 유가족들은 거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싸웠다. 점거 농성부터 단식, 삭발, 오체투지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최씨 역시 2015년 4월2일 ‘세월호진상규명법’ 시행령이 진상규명을 방해한다며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는 삭발식에 동참한 바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유가족들마다 생각이 달라 많이 다투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 ‘진상규명’이라는 목표는 같았기에 9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고 최순화씨가 말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현실에 고민이 깊은 것은 최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9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이라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바람은 여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지난해 6월 활동을 종료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결국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해온 시민단체들도 지쳐갔다. “마땅한 조사 기구가 사라진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 세월호 유가족들도 고민이 많다”라고 최씨가 말했다.

4월을 앞두고 두 사람은 다시 바빠졌다. 4월5일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59일이 되는 날이고, 4월16일은 세월호 참사 9주기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는 4월5일 시민추모대회를 기획하는 한편, 특별법 제정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3월27일부터 ‘10·29 진실버스’ 일정을 시작했다. 4·16 재단은 4월을 ‘기억과 약속의 달’로 선포하고 시민기억식 등을 개최할 예정이다. 진상규명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고향 언니와 동생의 4월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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