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0년대 태평양에서 스페인 점령지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 원정대는 병력 2000명 가운데 1300명을 병으로 잃었다고 합니다. 특히 잇몸에 피가 나면서 치아가 빠지고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며 뼈가 쉬 부러지는 '괴혈병'은 무서운 병명만큼이나 치명적이었습니다.
쥐를 잡아먹은 선원이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나중에 쥐는 스스로 비타민C를 생성하는 것으로 밝혀졌지요. 영국의 탐험가 리처드 호킨스는 신 과일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기록을 남기며 "누군가 이에 대해 밝혀주길 바란다"고 했는데, 스코틀랜드 출신의 의사 제임스 린드가 그 일을 해냈습니다.
린드는 영국 해군 군의관으로 항해하면서 괴혈병 환자들의 고통과 마주칩니다. 그는 12명을 6쌍으로 나눠서 각각 다른 치료를 했는데, 1주일 뒤 레몬을 먹은 선원들이 기적같이 치료됐습니다.
린드의 진료 연구는 세계 첫 임상시험으로 기록됩니다. 1747년 임상시험을 시작한 오늘(5월 20일)을 ACRP(Association of Clinical Research Professionals. 미국 임상연구전문가협회)에선 '세계 임상시험의 날'로, SOCRA(Society of Clinical Research Associates. 미국임상연구협회), ECRIN(European Clinical Research Infrastructure Network. 유럽 임상연구 인프라 네트워크) 등에선 '국제 임상시험의 날'로 각각 기립니다.
임상시험은 국어사전에 '개발 중인 약이나 진단 및 치료 방법 따위의 효과와 안전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람을 대상으로 행하는 시험'으로 풀이돼 있는데 용어가 어렵지 않나요? 신문 기사에 '임상실험'이라는 틀린 표기를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임상'이 '진료'라는 뜻이므로 '시험'이 아니라 '실험'을 해선 안되겠죠?
임상시험은 적은 사람을 대상으로 안전성을 평가하는 '1상(一相)', 보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기대되는 작용원리에 따라 작용하는지 검토하고 최적 용량과 투약 방법을 연구하는 '2상(二相)', 시판해도 되는지 결정하기 위해 몇백~몇천 명을 대상으로 약물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최종적으로 검증하는 '3상(三相)' 등을 거치며 시판 뒤에도 보다 정확한 안전성, 효과, 부작용 등을 분석하기 위해 시행됩니다.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만 해도 임상시험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어서, 의사가 참여를 권하면 일부 환자나 보호자는 "내가 모르모트가 되라는 말이냐?"고 반발하곤 했습니다. 반면에 약이 없는 난치병 환자는 자신이 적용대상이 아닌데도 임상시험에 포함시켜 달라고 주치의에게 조르곤 했고요.
우리나라는 이 무렵까지 임상연구에서 세계의 변방이었지만, 국내 의학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임상시험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2000년대가 되자 방영주 전 서울대 의대 교수처럼 다국적 임상연구를 주관하는 학자가 나왔고, 을지대 의대 김동욱 교수처럼 글로벌 제약사가 임상시험을 할 때 반드시 찾는 의학자들도 잇따라 등장했습니다. 지금은 선구자들의 노력에 따라 우리 의학자들이 국제 임상시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요. 국제 임상시험 시장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요.
임상시험을 통해서 의학이 발전하면서 예전에는 치료할 수 없었던 숱한 병을 고치게 됐습니다. 여기에는 제임스 린드 같은 선구자뿐 아니라 제약사, 대학, 병원, 연구소, 임상시험수탁기관(CRO) 등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이 기여했지만, 임상시험에 기꺼이 참여한 환자들의 공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많은 환자들이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갖고 임상시험에 참여했지만, 이에 못지않은 환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임상시험에 동참했습니다. 지금도 숱한 환자들이 기꺼이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임상시험의 의미를 새기며, 이 분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는 시간 갖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