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선택은 결국 民生이었다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佛 선거에서 배우는 ‘정당의 길’

● 경제난, 이민 증가로 국민 불만 확대
● ‘마피터’ 마크롱의 일방 소통에 ‘피로감’
● 서민 부담 낮춘 좌파연합 ‘깜짝 승리’
● ‘생활 밀착형’ 공약, 유연한 극우 ‘돌풍’
● ‘극우와 제휴’ 비난받은 초라한 보수 공화당


7월 7일 프랑스 총선이 종료된 뒤 정당별 득표 관측 결과 좌파연합 ‘신민중전선(NFP)’이 1위로 예상되자 파리의 한 광장에서 지지자들이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AP뉴시스]
“우리를 긴장한 채 지켜보게 만들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로 놀라게 했다.”

7월 7일(현지 시간) 프랑스 총선 2차(결선) 투표에서 극우 정당이 승리할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좌파연합이 깜짝 승리를 거두자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의 한 기자는 이런 논평을 내놨다.

1차 투표에서 1위로 유력시됐던 극우 정당은 2차 투표에서 돌연 3위로 내려앉았고, 2위였던 좌파연합이 1위로 올라서는 역전승을 거뒀다. 3위로 예상됐던 중도성향 집권당은 2위로 예상보다 선전했다.

대세를 바꾼 것은 ‘결단’이었다. 중도와 좌파가 선거 막판에 손을 잡았다. 목표는 하나, ‘극우만은 제1당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선거 기간 중도와 좌파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후보단일화에 성공했다. 시민들도 극우를 막기 위해 적극 선거에 참여했다.

극우의 약진은 막았지만 여당이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있다. 독선적 개혁 드라이브로 민심을 잃었기 때문. 극우는 여당이 놓친 민생을 파고들며 인기를 얻었다. 좌파연합도 서민 위주의 공약을 내걸며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

역대 최고 투표율로 극우 막아선 프랑스 국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부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가 6월 30일 프랑스 북부의 르 투게 파리 플라주에서 총선 1차 투표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AP뉴시스]
프랑스 내무부에 따르면, 총선 2차 투표 집계 결과 577석의 하원 의석 중 좌파연합인 ‘신민중전선(NFP)’이 182석을 차지해 제1당을 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집권당 르네상스가 이끄는 중도성향 범여권 ‘앙상블’은 168석으로 2위였다. 마린 르펜이 실질적 리더인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은 143석으로 3위에 그쳤다. 이에 앞서 6월 30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선 RN이 33.2%를 득표해 1위를, NFP는 28.0%로 2위를, 범여권 앙상블은 20.8%로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프랑스는 총선을 1, 2차에 나눠 치른다. 1차 투표에선 지역구별로 등록 유권자의 25% 이상을 득표하고 당일 총투표수의 50% 이상을 얻는 후보자가 당선자로 확정된다. 당선자가 배출되지 못한 지역구에선 일주일 뒤 2차 투표를 진행한다. 2차 투표에는 1차 투표에서 등록 유권자의 12.5% 이상을 득표한 후보자만 진출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는 과반이 아니더라도 가장 많이 득표한 후보가 최종 당선된다.

실제 1차 투표에서는 76개 선거구에서만 당선자가 나왔다. RN의 선전에 좌파와 중도는 손을 잡았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2차 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후보단일화에 성공했다. NFP 후보 130명, 앙상블 후보 82명 등 총 218명이 2차 투표 도전을 포기했다.

후보자들뿐 아니라 유권자들도 ‘반(反)극우’ 연대의 힘을 발휘했다. 너도 나도 극우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투표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2차 선거의 투표율은 59.7%로, 1981년 이후 43년 만에 최고치였다.

독단적 개혁 일변도에 실망한 유권자
원래 프랑스는 이번이 아니라 2027년 총선을 치르게 돼 있었다. 2022년 이미 총선을 치러 5년 임기의 하원 의원들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갑자기 헌법상 보장된 권한에 따라 의회를 해산시키고 조기 총선 결단을 내렸다.

6월 6~9일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에서 RN이 르네상스(14.6%)의 두 배가 넘는 31.5%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유럽의회 선거는 유럽연합의 하원인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다. 여기서 RN이 압승한 것. 마크롱 대통령은 정당별 득표 예측치가 나온 지 약 한 시간 만에 조기 총선 결정을 발표해 충격을 줬다. 내각 안에서조차 대통령이 ‘조기 총선’이라는 도박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내각은 물론이고 국민들을 놀라게 하며 굳이 조기 총선을 강행한 이유는 유럽의회 선거로 확인한 민심 이반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유럽의회 선거가 프랑스 의회 구성에 직접적 영향을 주진 않지만 사실상 정부에 대한 평가로 인식된다. 유럽의회 선거나 프랑스 총선이나 사실상 같은 프랑스 국민들이 표를 던지기 때문이다.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접한 그는 “선거로 (유권자들의) 분노가 표출됐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갈 수 없다”며 국민의 재평가를 받겠다고 했다.

여기에 2027년 대통령선거에서 집권을 노리는 RN의 리더 르펜의 영향력 확대를 사전에 막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다. RN이 유럽의회는 물론 자국에서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을 남발해 인기를 얻으면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민심과 실리를 동시에 챙기는 묘수였다.

마크롱에게 가장 좋은 결과는 여당의 조기 총선 승리였겠으나, 이 꿈이 이뤄지진 않았다. 그의 조기 총선 도박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당초 의도대로 극우 제1당의 출현은 막았지만 예상을 깨고 극좌가 포함된 좌파 연대가 제1당으로 올라섰다.

7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총선이 끝난 뒤 좌파연합을 이끄는 극좌 성향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 뤽 멜랑숑이 연설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마크롱 대통령이 극우 집권을 저지해 부분적인 성과는 거뒀지만, 권력의 중심축이 의회로 이동해 남은 3년의 임기 동안 권력 누수가 이어지는 레임덕에 직면했다”고도 짚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많다. ‘마피터(마크롱 주피터)’라고 불릴 만큼 독단적 태도 탓에 민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첫 집권 뒤 연금개혁, 노동개혁 등 각종 개혁을 속도감 있게 밀어붙여 독일 등 이웃 국가들로부터 ‘성과를 내는 대통령’이란 호평을 받긴 했다. 실제 그의 집권 기간 실업률이 4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외국인 투자도 유럽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경제 지표들이 호전됐다.

하지만 개혁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일방적’ 소통이 많았고, 중요한 사안을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마크롱 대통령은 2022년 재선 성공 뒤 정부가 긴급한 상황에서 의회 동의 없이 입법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제49조 3항의 권한을 23차례나 행사해 지난 30년간 다른 정부들에 비해 가장 많이 행사했다”며 “총선은 마크롱주의(독단적 리더십)에 대한 국민 투표가 됐다”고 평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마크롱 대통령은 항상 홀로 맞서 싸우려 했고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으로 고립돼 우월해지고,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고 지적했다.

극우, 좌파는 민생에 집중하며 성장
좌파연합인 NFP는 사실 두 달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정당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히자 급히 결성됐다. 이 안에는 스펙트럼이 다양한 여러 정당이 참여해 있다. 극좌파인 프랑스 자유당, 온건한 편인 사회당, 녹색 생태주의당, 프랑스 공산당, 중도 좌파인 플라스 퓌블리크와 다른 소규모 정당들이다.

집권당이 개혁을 외친다면, NFP는 서민의 가려운 부분을 긁는 일에 주목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에 따르면 NFP의 주요 공약은 가계의 구매력 증대와 노동복지 정책이다. 대표적으로 가계 구매력 증대 정책은 식품, 에너지, 연료 등 필수품의 가격을 동결해 서민의 부담을 낮추겠다는 취지다.
NFP의 또 다른 대표 정책은 최저임금 인상이다. 최저임금을 현재 월 1398.69유로(약 200만 원)에서 1600유로(약 240만 원)로 올리겠다는 대책이다. 고물가와 고금리에 지친 서민들이 환영할 만한 공약이다.

NFP는 마크롱 대통령이 야심만만하게 추진한 연금개혁도 폐지하겠다는 방침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춰 연금 재원인 국가 재정의 지출을 늦추려 했다. 워낙 재정적자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NFP는 오히려 이 연령을 60세로 앞당길 계획이다.

극우 제1당의 출현은 좌절됐지만 극우 돌풍은 당분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RN의 실질적 지도자인 르펜 의원은 총선 결선에서 “우리의 승리는 늦춰졌을 뿐”이라며 집권 의지를 드러냈다. RN은 유럽의회 내에서도 세력을 키우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헝가리 총리실 대변인은 7월 8일 RN이 유럽의회의 극우 그룹인 ‘유럽을 위한 애국자’에 합류했다고 밝혔다.

이 단체에 합류한 이탈리아의 연립정부 파트너이자 극우 정당 ‘동맹(Lega)’의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는 ‘X(옛 트위터)’에 “오늘 오랜 노력 끝에 대규모 애국자 그룹이 탄생했다”며 “이는 유럽의 미래를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유럽의회에서 세 번째로 큰 단체가 될 것이라고 FT는 전했다.

극우가 이렇게까지 성장한 이유는 경제난과 이민 증가로 인한 혼란으로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진 영향이 크다. 반면 르펜 의원은 생필품 가격 및 에너지 부가가치세 인하, 저소득층과 30대 이하에 대한 세금 감면 등 ‘생활 밀착형’ 공약을 내세워 표심을 자극했다.

프랑스 총선 1차 투표가 열리기 전인 6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 행사에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의원(왼쪽)이 같은 당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와 함께 참석했다. [AP뉴시스]
‌여기에 기존 정통적 극우의 공식을 벗어나 유연함을 발휘했다는 평가도 있다. 과격하고 이념적인 정책과 수사(修辭)를 벗어나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RN의 ‘흥행 카드’인 조르당 바르델라(29) 대표가 부드러운 극우의 얼굴이 됐다. 그는 세련된 외모와 적극적인 소셜미디어 소통으로 RN의 호감도를 높였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성공 비결에 대해 “미소를 띤 편안한 인상을 배웠고, 합의와 겸손의 태도를 유지했다”고 분석했다.

극우에 비해 오히려 정통 보수인 공화당은 분열되고 초라해지고 있다. 공화당은 나치에 맞선 레지스탕스 지도자 출신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사회당과 함께 프랑스 정치를 이끌어온 정당이다.

RN이 6월 9일 유럽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 공화당의 에리크 시오티 대표는 조기 총선에서 RN과 제휴할 뜻을 밝혀 당 안팎에서 강한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는 당내에서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채 RN과의 제휴 방침을 공식화하는 바람에 한때 당에서 제명될 위기에 처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 국민의 선택은 민생이었다. 이민자 증가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가계 부담을 낮추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극우와 좌파연합이 국민 선택지에 오른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고 해도 독선과 일방 독주로는 민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세계, 정치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