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보수는 있지만 ‘보수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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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학자가 본 보수의 위기 5題

● 이회창, 윤석열, 한동훈…외부 인사 수혈
● 변화와 혁신 외면…‘무능한 수구 세력’ 낙인
● 강성 보수 집착해 확장 실패…320만 이탈
● 청년 보수 조직 구축 실패
● 보수 정신 밝히고 ‘국민 이익형’ 정책 개발해야


[Gettyimage]
제22대 총선이 야권 압승으로 끝났다. 범야권은 192석을 차지한 반면 집권당 국민의힘은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집권 2년도 안 된 중간평가 성격의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 붕괴’라는 최악의 결과는 면했지만 이렇게 굴욕적 참패를 당한 적은 없다.

대한민국 보수정당은 2016년 20대 새누리당, 2020년 21대 미래통합당, 2024년 22대 국민의힘 등 3연속 총선에서 패했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 기본 지형은 ‘보수정당(주류) 대 반(反)보수정당(비주류)’ 구도였다. 그런데 최근 세 번의 총선을 통해 보수정당은 비주류로 전락했고, ‘진보정당 대 반(反)진보정당’ 시대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美 보수주의 부활 원동력 된 ‘보수의 정신’
대한민국 보수가 겪는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보수 정신’의 부재다. 참패를 거듭하면서 “바보들의 무리”라고 조롱받던 미국 보수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것은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이란 책이다. 그는 ‘불변하는 도덕적 질서가 있다는 신념’ ‘획일성과 평등주의 배격’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질서와 위계의 필요’ ‘위대한 문명은 사유재산권을 토대로 수립’ 등을 보수의 핵심 기둥으로 삼았다. 이런 보수 정신은 청년 보수 운동의 기반이 됐고, 궁극적으로 위대한 보수주의자 레이건 대통령의 탄생을 견인했다.

한국에는 보수는 있지만 보수 정신은 없다. 정신이 흔들리면서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됐다. 일각에선 ‘보수 정체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요즘 어떤 사람들은 ‘보수정당 정체성’ 운운하며 더욱 더 보수적으로 보이기 위해 안달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보수주의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 한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을 해소하기 위해선 한국 보수의 정신을 분명히 하고, 이를 토대로 보수주의 원칙과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면서 국민에게 현실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좋은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한국 보수는 위기 때 마다 인지도는 높지만 정치 경험이 부족한 외부 인사들을 수혈해 문제를 해결했다. 1997년 대선 때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 2022년 대선에선 윤석열 전 검찰총장, 2024년 총선에선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을 영입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 경륜과 경험 많은 중진 보수 인사들은 반개혁 이미지의 ‘올드보이’라는 이유로 종종 소외됐다. 당의 뿌리와 전통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보수주의 정신이 빛을 발하고, 보수의 정체성이 유지되며 국민의 지지를 받겠는가?

둘째, 보수는 변화와 혁신을 외면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로 상징되는 새로운 보수로 거듭날 기회를 놓친 채 이념적 경직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앨버트 허시먼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책에서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이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제시하는 전형적 ‘수사적 무기’로 세 가지 명제를 제시했다. 첫째, “너희들이 뭘 해봤자 역효과만 난다”는 말로 요약되는 ‘역효과 명제’. 둘째,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무용 명제’. 셋째,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에 얻어낸 소중한 성취들마저 오히려 위험에 빠트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정적 순간 보수는 “관둬라, 소용없다”고 개혁을 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 보수에도 이런 비슷한 잘못된 명제들이 지배하면서 변화와 개혁의 창조적 파괴를 하지 못했다. 왜곡된 현실 인식 속에 갇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 사회 주류라는 허황된 생각 속에 과거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지 않았다. 젊은 세대에서 보수는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와 동의어처럼 취급당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이끄는 세력이 아니라 ‘무능한 수구 세력’으로 낙인찍혀 있다. 이 모든 것은 보수의 개혁이 실종된 데 따른 부산물이다.

셋째, 외연 확장과 선거연합에 실패했다. 방송 3사가 실시한 2020년 총선 출구 조사 결과, 진보 27.9%, 중도 37.2%, 보수 25.8%였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당시 중도와 진보의 선거연합이 민주당 압승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2022년 대선에서는 진보 21.6%, 중도 39.5%, 보수 31.4%였다. 당시 진보는 축소되고 보수가 상승하는 가운데 중도를 대표하는 안철수 의원과 선거 막판에 이룩한 연대가 윤석열 후보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결국 모든 선거의 열쇠는 누가 중도층을 잡느냐다.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 참패의 핵심 요인도 지난 대선 때 형성된 중도·보수 선거연합이 해체되면서 지지기반이 축소됐기 때문이다.

윤석열 찍은 2030세대와 중도층 이탈
윤석열 정부 2년 동안 대선 승리의 동반자였던 이준석·안철수를 ‘국정 운영의 적’으로 밀어내면서 윤석열을 찍은 2030세대와 중도층의 이탈을 가져왔다. 결국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지난 총선에서 약 320만 명이 이탈했다.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에 정권을 뺏긴 영국 노동당은 1994년 당권을 장악한 토니 블레어가 ‘새 노동당(New Labor)’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을 완전히 개조했다. 노동당의 핵심 가치이며 상징이던 당헌 4조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를 폐지하면서 앤서니 기든스 교수가 주창한 ‘제3의 길(The Third Way)’을 받아들였다. 노동당이 핵심 지지 세력인 노조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중도로 ‘우클릭’하면서 승리했다.

한국 보수가 중도를 향한 제3의길을 포기하고 과거 뉴라이트 세력과 강성 보수층에만 집착하면서 중도·보수 연합은 깨지고 중도·진보 연합과 2030 세대와 4050세대가 결합하는 세대 연합이 부활하고 있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 이어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은 중도·진보 연합과 2030과 4050 세대 연합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중도 외연 확장을 위한 보수의 창조적 파괴는 보수 가치의 포기가 아니라 진보의 핵심 가치를 보수의 시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보수의 재구성’이라는 책에서 “보수의 입장에서 진보의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고 보수가 더 타당한 이념임을 보여주려면 자신의 정치철학과 가치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야 중도·보수 연합을 만들 수 있다.

넷째, 청년 보수 조직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미국 보수 재건의 핵심 역할을 담당한 것은 1960년 9월 코네티컷주 샤론에서 결성된 ‘자유를 위한 미국 청년들(YAF)’이라는 정치행동 조직이다. YAF는 보수주의 사상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샤론 선언문’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개인의 자유를 신성시하는 보수주의와 자생적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대외정책 기조를 담고 있다.

독일 보수당인 독일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에는 청년 조직 ‘영 유니온’이 있다. 2016년 당시 기민당 청년 조직(14∼35세)에만 12만 명이 가입해 있었다. 전체 당원 44만2000명 중 27%에 이른다. 이런 청년 조직에서 청년들은 10대부터 토론을 통해 집단적 의견을 도출하고, 때로는 소속 정당과 싸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헬무트 콜 같은 거물 정치인이 배출됐다. 한국 보수는 청년 운동가 양성 및 조직화에 둔감하다. 결국 세대교체를 통해 청년 민심을 얻는 데 실패했다.

다섯째, 보수의 구조적 취약성이다. 한국 보수는 ‘영남 자민련’으로 전락했다. 정치의 중심이 되는 수도권 총선에서 보수정당은 궤멸적 패배를 연속으로 당했다. 2012년 총선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끈 새누리당은 152석으로 승리했지만 수도권에서는 43석(38.4%)을 얻는 데 그쳤다. 2016년 총선 35석(28.7%), 2020년 총선에선 고작 16석(13.2%)을 얻었다. 총선에서 10년 이상 민주당이 수도권을 장악하면서 보수 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결과적으로 2024년 총선에서도 국민의힘은 수도권에서 겨우 19석(15.6%)을 얻는 데 그쳤다. 여기에 보수세력은 안정되고 풍부한 재원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민주노총, 민예총, 전교조를 포함하는 ‘좌파 카르텔’에 속수무책이다.

향후 한국 보수가 나아갈 길은 명확하다. 보수의 정신을 명확하게 하고 이를 토대로 보수주의 원칙과 보수의 가치를 천명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국민 이익형’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보수 제3의길을 통해 중도·보수 선거연합을 복원해 ‘보수주의 빅 텐트’를 만들고, ‘보수 청년 정치 행동 조직’을 만들어 청년 민심을 얻어야 한다. 수도권에 풀뿌리 네트워크와 지구당 조직을 강화해 보수의 구조적 취약성을 극복해야 한다. 더불어 뼈를 깎는 혁신을 하고, 국민의 눈높이에서 민심에 신속하게 반응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무한 책임을 지며, 헌신하는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신동아 8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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