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관계 악화 땐 한반도 충돌 가능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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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진단 | 북·러 밀착, 격랑의 한반도]

●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진영 대립 더욱 심화
● 북·러 조약 체결로 ‘사실상 동맹’ 수준 격상
● 중국 활용하려면 중국과 소통부터 정상화해야
● 비핵·평화·공영 위해 한·러 손잡아야 ‘윈윈’
● 사려 깊은 외교 전략과 유연한 대응 절실


2023년 8월 18일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부터) 등 한미일 3국 정상이 만났다. [뉴시스]
격변의 시간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한반도 주변 역학 구도에 두 번의 큰 변곡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2023년 8월 18일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다. 한미, 미일 동맹으로 나뉘어 있던 한미일이 3자 안보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는 2024년 6월 19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러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통해 사실상의 ‘동맹’을 맺은 것이다. 캠프 데이비드로 가는 흐름에 대한 북·러의 반작용이다. 이로써 한반도와 그 주변에는 새로운 냉전 같은 냉기가 가득하다. 급속도로 심화하는 지정학적 대립 구도의 영향으로 한·러 관계도 험로에 들어서서 표류하고 있다.

심화하는 국제 지정학적 대립 구도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국제 정세의 변화가 있다. 냉전이 끝나고 30년 넘게 이어져 온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도전받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기존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주역이다. 중국은 신장된 경제력을 활용해 중국식 규칙과 기준에 입각한 연대를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는 유라시아주의를 바탕으로 다극적 국제질서 창출을 꾀한다. 이에 맞서 미국은 동맹을 강화하고,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like-minded country)과 소다자 협력을 격자형으로 촘촘하게 만들고 있다. 오커스(AUKUS·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안보동맹), 쿼드(QUAD·미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인도가 참여하는 협력체), 아이페프(IPEF·인도, 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가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런 진영 대립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한미 공조가 더욱 강화되고,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를 통해 한미일 안보협력이 본격 가동됐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특히 러시아의 대응이 신속했다. 러시아는 동북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 안보연대의 겨냥점 중 하나가 자국이라고 인식한 것이 분명했다. 푸틴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 합의 직후인 2023년 9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초청했다. 이미 이때 러시아와 북한은 양국 관계의 법적 기초를 격상시키는 문제를 합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이번 북·러 조약 체결로 탈냉전 이후 선린·우호 관계로 격하됐던 양국 관계는 ‘사실상 동맹’ 수준으로 다시 격상됐다. 9개월 만에 도달한 신속하고도 명시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북·러 조약을 통해 양국은 유사시 지체 없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로 지원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서 진영 대립 구도가 더욱 첨예해졌고, 한국의 안보 환경도 더 나빠졌다고 볼 수 있다. 한·러 관계가 나아지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도 극적으로 줄었다.

이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규탄’ ‘궤변’ ‘어불성설’ 같은 언어를 동원해 강경 대응을 예고했고, 한미일 안보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러가 치고받는 과정으로 들어간 셈이다. 대응과 맞대응이란 악순환의 수렁으로 들어가면 한러 관계는 표류하다가 결국 좌초할 우려가 크다. 위태롭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2024년 6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을 김정은 위원장이 영접하고 있다. [뉴스1]
한·러, 북·러 관계의 역사적 浮沈
돌이켜 보면 1990년 북방외교가 성과를 낸 후 34년이 지나는 동안 한·러 관계와 북·러 관계는 극과 극의 대칭을 보였다. 한·러 관계는 부상(浮上)했다가 퇴조(退潮)했고, 북·러 관계는 퇴조했다가 부상했다. 1990년 한·러 수교 순간이 북방외교의 ‘부상(浮上)’이라면, 서로 레드라인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지금 한·러 관계는 최저점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북방외교의 ‘퇴락(頹落)’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30여 년 전 한국의 북방외교로 러시아와 중국을 잃었던 북한은 ‘몰락(沒落)’의 위기를 핵 개발로 돌파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제 북한은 핵을 가지고도 러·북 안보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반전을 이뤘다. 말하자면 북·러 관계의 화려한 ‘부상(浮上)’을 일군 셈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0년에는 북핵과 미사일 개발을 만류하러 처음 평양에 갔지만, 2024년 두 번째 방북 때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한·러·북 관계의 상대적 부침(浮沈)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극적 대비가 보여주는 함의는 명확하다. 우선 한국과 러시아 간 이른바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지속적으로 형해화 과정을 걸어온 반면,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는 의미 있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를 동맹조약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이번 북·러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한·러 전략적 동반자 관계와 용어는 비슷하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안보협력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러 전략적 동반자 관계 속에는 애당초부터 침략받을 시 상호 지원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이제 러시아는 한국보다 북한과 진정한 의미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이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로 국제 비확산 규범을 정면 도전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심각하다.

러시아와 한국이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이대로라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온 북한은 고무돼 더욱 도발적이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다.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군비 경쟁과 핵 도미노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게 되고, 이는 한국은 물론 러시아 극동 지역의 안정과 안전을 저해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과 러시아는 긴장과 대결에 대비하는 데 자원을 사용해야 할 터인데, 이는 지극히 비생산적일뿐더러 한국과 러시아 모두에 해가 되는 일이다. 한국과 러시아는 상호보완적으로 실질적 협력 여지를 많이 가진 파트너인데, 긴장과 대결로 가면 양국 모두 기회를 잃게 돼 서로 손해다.

이와 반대로 양국이 관계를 개선해 동아시아에서 비핵, 평화, 공영을 위한 협력을 한다면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 중대한 교차로(cross road)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러 관계 개선을 위해 러시아와 한국이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리해 보고, 상호 공감대를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다.

7월 8일, 러시아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어린이 병원을 강타한 후 구조대원들이 희생자를 수색하고 있다.[ AP/뉴시스]
‌한국과 러시아 관계가 악화된 가장 큰 계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이 전쟁이 계속되는 한 한·러 관계에 끝없이 악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에 무엇보다 전쟁 상태가 빨리 종결돼야 할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유의해야 할 첫 번째 사안이다. 둘째로 러시아는 국제법을 어기는 일, 다시 말해 북핵 미사일 관련 안보리 결의를 위배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은 우리에게 사활적인 이해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결과적으로 북한 핵과 미사일 능력 발전을 지원하고 조장하는 일을 하면 한·러 관계 개선은 어렵다. 셋째로 러시아는 러시아 내 한국 기업과 민간인에 대한 위해 행위를 삼가야 할 것이다. 사드 사태를 통해 잘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행위는 한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잠식하기 때문에 한·러 관계 개선 동력을 약화시킨다.

한국은 첫째로 러시아와 대증적으로 치고받으려는 관성을 통제해야 한다. 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윤석열 정부가 날카롭고 대증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는 기질을 갖고 있어서다. 북·러 밀착은 사실상 한국 외교의 실패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덮겠다고 강경하게 대처하면 악순환에 빠져 더욱더 외교적 옵션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한국이 미·러, 미·중 대립이라는 시대적 균열에 잘 대처하려면 먼저 미·러·중에 대해 통합되고 조율된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 전략 속에는 미국과의 공조 수위는 어느 정도이고, 러시아와의 외교 공간은 어느 정도인지에 관한 ‘한국형 좌표와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전략을 갖고 미·러, 미·중 사이에서 운신해 나가야 하고, 가치 외교의 수위도 정해야 한다.

셋째로 북·러 접근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한데, 이는 우리가 직접 주도할 수 있는 사안이라기보다는 미국의 협력을 얻어야만 하는 사안일 것이다. 미국이 미·중 대립 구도 속에서도 중국과 특정 이슈에 대해서는 협의하고 협조하려는 자세를 더욱 적극화해야만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문제다. 다시 말해, 미국이 기후변화나 팬데믹 사안처럼 한반도 비핵화나 평화 정착에 대해서도 이를 미·중 대립과 별개 이슈로 삼아 소통과 협력을 추진하는 발상의 전환이 요망된다. 이를 위해 한국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지금 한중 간 소통 상황도 썩 좋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윤석열 정부는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에 발끈해 접촉 제한을 걸었고, 상호주의로 중국도 베이징의 우리 대사에게 접촉 제한을 걸었다. 중국을 활용하려면 중국과 소통부터 정상화해야 할 것이다.

위기의 외교, 어떻게 진일보할 것인가
우리는 4강에 둘러싸인 분단국가다.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대외적 이유로 분단됐고, 분단된 반쪽은 핵무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평화 유지, 한반도 통일은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 가진 중요한 외교안보 과제다. 중국, 러시아와 척을 지면 이 세 가지 과제를 포기해야 한다. 냉전 때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한국이 냉전 시절처럼 진영 대결의 최전선에 서서 세 가지 과제를 포기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선택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일 공조를 하면서 북·중·러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일은 딜레마적 난제이지만 우리의 세 가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당위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의 순간에 정부가 한층 사려 깊은 전략과 유연한 대응으로 난국을 타개하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본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단순하고 거칠다. 때로는 충돌을 불사하려는 듯하다. 심지어 미국도 염려하고 만류할 정도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서 있는 한반도에서 진일보(進一步)할 길을 찾으려면, 지금까지 해온 접근 방식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신동아 8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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