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안면몰수, 윤석열의 지리멸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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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회색지대] 정치 팬덤이 정당 먹어버린 민주당 비극④

● “중국공산당과 다를 바 없는 민주당”
● 이재명과 윤석열의 막상막하 안면몰수 화법
● 이재명의 방탄 제1조 = “모든 건 검찰 탓”
● 비명의 가죽으로 만든 찐명의 가죽잠바
● 영수회담 직후 나온 코미디 같은 이야기
● 어쩌다 지도자 복이 지지리 없는 나라가 됐


[Gettyimage]
2024년 1월 10일 오전 11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은 흉기 피습 8일 만에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며 “모두가 놀란 이번 사건이 증오의 정치, 대결의 정치를 끝내고 서로 존중하고 제대로 된 정치를 복원하는 이정표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며 “상대를 죽여서 없애야 하는 전쟁 같은 이 정치를 이제는 종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이재명 언어의 특징은 좋은 말일수록 그 수명이 매우 짧다는 데에 있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어떤 좋은 말을 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좋은 말과 정반대되는 내용의 말을 천연덕스럽게 해댄다는 것이다.

1월 2일 부산 일정 중 흉기 피습을 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0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며 입장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민주당은 ‘방탄 정당, 패권 정당, 팬덤 정당’
이날 비명계 의원 모임인 ‘원칙과 상식’에 속한 이원욱, 김종민, 조응천이 탈당을 선언했다. ‘원칙과 상식’은 그동안 이재명의 대표직 사퇴와 통합 비상대책위 설치를 요구해 왔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한 것이지만 이들은 “이재명 정치와 싸우는 것도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며 “(탈당의) 가장 근본적 이유는 양심 때문”이라고 했다. “이 비정상 정치에 숨죽이며 그냥 끌려가는 건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방탄 정당, 패권 정당, 팬덤 정당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했지만 거부당했다”고 했다.

친명계 의원들은 탈당을 한 의원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맹비난했다. 탈당 의원들이 개딸들의 공격 등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외면하면서 구경만 했거나 뒤에서 거들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최소한의 동료애도 없는 공격성만 보인 것이다. 최고위원 정청래는 “안 되겠거든 탈당 말고 은퇴하는 것도 정답”이라며 “폭주보다는 멈춤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것이 아름다운 뒷모습”이라고 비난했다. 양이원영도 “이들은 당내에서 기득권을 누릴 만큼 누린 정치인”이라고 깎아내렸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탈당 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다음 날인 1월 11일 전 민주당 대표 이낙연이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신이 사라지고 1인 방탄 정당으로 변질됐다”며 탈당을 선언하자 민주당 의원들은 일제히 SNS를 통해 공격에 나섰다. 늘 이런 공격에 앞장서는 정청래는 “이낙연은 2021년 1월 박근혜 사면론으로 정치적 폭망의 길로 들어섰고, 2024년 1월 탈당으로 정치적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비난했다. 그 밖에도 여러 의원이 비난에 가세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이들은 일련의 탈당 원인이 된 ‘이재명 사당화’에 대해선 굳게 입을 다물면서 사당화에 대한 반발에 대해서만 폭격을 퍼부었으니 말이다.

1월 12일 오전 이낙연은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전날 민주당 내 의원 130여 명이 공동성명을 통해 자신의 탈당을 비난한 데 대해 “(과거) 열린우리당 창당하던 날 저는 ‘잘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논평을 했다”며 “그런데 지금 민주당 사람들이 저한테 하는 것은 오만 저주와 협박이다. 바닥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 동지들께서 그렇게 안 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충고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정말로 절박했다면 지난 수개월 동안 몇 달 동안 저에게 ‘한번 만납시다’라든가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든가 하는 얘기를 했음 직한데 그렇게 하신 분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제가 탈당 기자회견을 하기로 예정된 날 바로 눈앞에 두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내부용이지 저한테 들으라고 한 얘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재명은 증오의 정치를 끝내자고 아름다운 말을 했던 날로부터 1주일 후인 1월 1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법으로도 죽여보고, 펜으로도 죽여보고, 그래도 안 되니 칼로 죽이려고 하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1주일 전 증오의 정치를 개탄하던 사람이 불과 1주일 만에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법’과 ‘펜’을 ‘칼’과 동일선상에 두고 비난하면서 증오의 정치를 부추긴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탈당 의원들은 무엇보다도 이런 이중성에 환멸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날 조응천은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과의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민주당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 “최고위원회에서 안건이 올라오면 일단은 갑론을박이 벌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이재명 대표를 쳐다본다. 그러면 대표는 ‘좋은 말씀들 주셨다. 저한테 위임하시죠’라면서 자신이 생각한 방안을 그냥 발표한다. 결국은 대표 생각 따라가는 거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니 출입기자들이 최고위원들 중 그나마 자기 목소리 내는 비명계 송갑석 위원 발언만 컴퓨터에 받아치고, 다른 위원들 발언은 치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개딸들이 지역구마다 누구는 친명, 누구는 반명이라고 사진까지 들어간 표를 만들고 ‘친명 후보 밀라’고 외치고 있다. 이어 ‘새날’ 같은 친명 유튜브가 친명 후보들을 초청해 ‘이 사람을 찍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리당원들은 전통 언론은 안 보고 이런 유튜브만 보면서 확증편향을 다진다.”

이어 조응천은 “나는 그가 2022년 6월 인천 계양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할 때 극력 반대했다. (…) 이어 8월 말 치러진 전당대회에도 이 대표는 ‘이중 방탄막 치느냐. 나가지 말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꼿꼿하게 출마하더라. 당시 당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가 막혀 ‘다 해먹어라’고 혀를 찼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국 훌리건(개딸)만 결집해 이 대표를 뽑아준 것이다. 이 대표 입장에선 팬덤 정치의 효용을 십분 맛본 셈이다. 이후 이 대표가 검찰의 수사를 받아 궁지에 몰릴 때마다 개딸들이 결집해 딴 목소리 내는 이들을 맹공했다. 그 결과 이 대표에 붙어 주류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의원이 급증했다. 시진핑 옆에 앉은 후진타오가 만인이 보는 앞에 끌려 나가는 중국공산당과 다를 바 없다.”

이재명과 윤석열의 ‘안면몰수 화법’
1월 하순 4·10 총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공천 심사가 시작되면서 민주당은 ‘친이재명 단일대오’로 재구조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월 30일 한 수도권 비주류 의원은 “최근 유튜브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영향력 있는 스피커들이 비주류 의원들을 비명이나 (체포동의안) 가결파로 낙인찍고, 당내 도전자는 이를 지역에서 확대 재생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주류 의원들이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친명 원외 후보들은 유튜브 등에 출연해 비명 후보를 향해 “나이도 어린놈의 자식” “앞에서 알랑방귀를 뀌고 뒤에서 칼을 꽂는 사람” 등과 같은 막말을 쏟아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의원들은 SNS에 이재명과 가까운 모습을 연출한 사진을 올리는 등 ‘울며 겨자 먹기’로 계파색 지우기에 나서고 있었다.(한겨레 1월 31일자)

이런 풍경에 대해 전 청와대 정무수석 최재성은 1월 31일 KBS라디오 ‘전종철의 전격시사’에 나와 “이재명 대표 비서실 출신의 젊은 친구가 소위 반명 지역구에 도전을 하고 있다”며 “누가 봐도 이 대표한테 보고 내지는 상의 없이 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그다음에 김우영이라든지 양문석 이런 사람들은 자기 지역위원장직을 무책임하게 버리고 반명한테 도전하겠다고 해서 옮겼다”며 “지역위원장을 무책임하게 그냥 본인이 지역 옮겨버리면 당에서 ‘OK, 그러면 그렇게 해’라고 할 수는 없다”며 “이런 것들이 (자객 출마) 의심을 더하게 되고 그 프레임에 빨려든다. 빨리 정무적 기능들을 작동해서 정리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임혁백 더불어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가운데)과 조정식 부위원장(맨 오른쪽), 안규백 전략공관위원장이 3월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공관위원회 활동 브리핑’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그러나 ‘친이재명 단일대오’는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밀어붙여야 할 이재명의 확고한 신념이었으며, 공정을 생명으로 알아야 할 공천관리위원장 임혁백마저 그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월 6일 임혁백은 4·10 총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지역 1차 결과를 발표하면서 “(1차 심사 결과에 포함되지 않은) 선배 정치인들은 후배들을 위해 길을 터줄 수 있도록 책임 있는 결정을 해주길 부탁한다. 본의 아니게 ‘윤석열 검찰정권’의 탄생 원인을 제공한 분들 역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공천에서 비명 정치인들을 배제하겠다는 것으로 여겨져 큰 논란을 빚었다.

그러자 이재명은 설을 하루 앞둔 2월 9일 밤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사이의 빈틈을 파고드는 이간계를 경계한다”며 “친명, 비명 나누는 것은 소명을 외면하는 죄악”이라며 당내 단합과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친명이냐 친문이냐 하며 우리를 구분 짓는 행위 자체가 저들의 전략”이라며 “계파를 가르고 출신을 따질 여유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스템을 통해 능력, 자질이 국민의 기대치와 눈높이에 부합하느냐가 유일한 판단 기준”이라고 했으니, 이걸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이런 화법을 가리켜 ‘안면몰수(顔面沒收) 화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정과 상식을 팔아 대통령이 된 윤석열이 공적과 상식을 유린하는 언행을 하는 게 바로 전형적인 안면몰수 화법인데, 이 화법에선 이재명과 윤석열은 막상막하였다. 이재명이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도, 그는 어느 순간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나타나 딴말을 해대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이재명과 윤석열의 차이가 있다면, 이재명은 자신이 무슨 언행을 저지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반면, 윤석열은 그걸 모르기에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자해(自害)를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악마의 재능’과 ‘윤석열 악마화’
이재명 지지자들은 ‘안면몰수 화법’이라는 말에 펄펄 뛰면서 화를 내는 경향이 있지만, 그게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재명을 완벽한 인간이나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니라면 그의 한계와 문제를 직시하면서도 지지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함에도 왜 모든 걸 미화하면서 자신을 속이려든단 말인가. 아니 그 한계와 문제라는 게 현실적으론 오히려 장점이 된다면 어쩌겠는가.

하긴 이재명 지지자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재명에겐 이른바 ‘악마의 재능’이 있다며 이에 열광하는 지지자와, ‘악마의 재능’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재명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기는 지지자다. 같은 건 아니지만, 여기선 ‘악마의 재능’을 마키아벨리아니즘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진중권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아니즘의 전형적 특성은 ‘대인 조종의 기술, 도덕에 대한 무관심, 희생자에 대한 공감 부족, 제 이익에 대한 전략적 초점’ 등이다.

어느 유형에 속하건 이재명의 강성 지지자들 중엔 자신의 진보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동시에 그걸 도덕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우월적 지위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이들이 많다. 특히 지식인들은 수단의 적법성도 어느 정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법 리스크를 비롯한 이재명의 여러 의혹으로 인한 심적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이들에겐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한 가지 비법이 있다. 그건 바로, 마주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두려운 진실을 회피하는 ‘의도적 눈감기(willful blindness)’ 수법이다.

이재명의 10개 범죄 혐의와 관련된 7개 사건으로 인해 구속 기소된 사람이 최소 24명이다. 그래도 지지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모두 다 ‘검찰독재의 조작’이라고 우기면 간단히 해결된다. 지난해 3월 이재명의 경기지사 시절 비서실장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 전 국민의힘 의원 유승민은 “다섯명째 소중한 생명이 죽었다”며 “정치고 뭐고 다 떠나서 인간으로서 더 이상의 희생은 막아야 할 책임이 이재명 대표 당신에게 있다”고 했다. 진중권은 “이재명 안 만났으면 살아 있을 사람들”이라며 “그러면 사람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걸 느끼지 않겠나. 그런 것 없이 계속 검찰 탓만 한다”고 개탄했다.

그랬다. 이재명의 방탄 제1조는 “모든 건 다 검찰 탓”이었다. 유족 측이 이재명 조문에 난색을 표하면서 6시간 넘게 장례식장 근처에서 대기해야 했던 이재명은 조문 후 “검찰의 이 미친 칼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지지자들은 이재명의 이런 ‘당당함’에 안도하면서 ‘검찰독재’와 더불어 ‘검찰의 미친 칼질’을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의 심적 갈등을 해소한다. 더 나아가 문재인 정권이 주도했던 ‘윤석열 악마화’를 시도함으로써 마음의 평안까지 찾는다. ‘윤석열 악마화’란 그의 모든 언행을 악의적으로만 해석해 반드시 처단해야 할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걸 말한다. 이런 수법은 중도파 유권자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과 민주당이 패배한 것이다.

‘의도적 눈감기’엔 자신의 지능을 일부러 낮추는 기법이 포함된다. ‘윤석열 악마화’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건만, 강성 지지자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면서 윤석열은 진짜 악마이며, 따라서 ‘윤석열 악마화’라는 용어 자체가 윤석열을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주장이라고 우긴다. 윤석열은 그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자신에게 해가 될 일만 골라서 해대는 경향을 보여왔는데, 세상에 그렇게 어수룩하고 미련한 악마도 있단 말인가.

‘안면몰수 화법’의 힘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이던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가 2021년 10월 20일 경기도청에서 열린 ‘2021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내가 처음 이재명의 ‘안면몰수 화법’을 지적한 것은 2021년 10월 20일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국토위 국정감사의 TV 중계방송을 지켜보다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를 목격하면서였다. 이재명은 국민의힘 의원 김은혜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유동규가) 압수수색 당시에 극단적 선택을 한다고 약을 먹었다고 해요. 그래서 뭐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라고 말했다. 김은혜가 “본인밖에 알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누가 그렇게 보고를 해주셨어요?”라고 묻자, 이재명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라고 답했다. 일순간에 표정을 싹 바꾸면서 얄미울 정도로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표정과 어투를 글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기억이 안 나는 게 가능할까. 유동규 압수수색일은 9월 29일로, 불과 21일 전 일이었다. 그리고 유동규 문제는 당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보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극히 제한돼 있었다. 그런데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니, 어찌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사실 ‘극단적 선택’ 발언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나온 것이었으니, 그로선 수습을 해야만 했다. 그가 택한 수습책이 바로 ‘안면몰수’ 화법이었던 셈이다.

자신이 스스로 ‘친명’임을 적극 내세우는 친명 인사라면 “친명, 비명 나누는 것은 소명을 외면하는 죄악”이라는 이재명의 말을 지킬 만도 했건만, 어찌 된 게 강성 친명일수록 말을 더 안 듣고 친명·비명을 나누면서 비명에 대한 공격을 살벌하게 해댔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친명 인사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이재명이 공개적인 경고 한 번만 해도 달라지겠건만 그런 법은 없었다. 왜? 자신이 했던 말은 안면몰수 화법이자 표리부동 화법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고도 놀라운 건 언론의 반응이었다. 진보는 물론 보수 언론마저 “이재명이 친명 비명 나누는 것은 소명을 외면하는 죄악이라면서 당내 갈등 진화에 애쓰고 있지만 쉽게 수습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거나 논평하곤 했다. 이재명의 의도가 언론에 먹혀든 셈이니, 이게 참 묘한 일 아닌가. 이게 바로 안면몰수·표리부동 화법의 힘이었으며, 이 수법은 사실상 공천 여부를 결정하는 공천 적합도 조사에까지 파고들었다.

1월 하순에 실시된 적합도 조사에 대해 “친명 일색의 공천을 공고히 하는데 적합도 조사가 악용되고 있다”거나 “지역에서 난다 긴다 하는 현역도 적합도 조사에서 삐끗하면 곧바로 공천배제(컷오프)다. 특히 비명계가 떨고 있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이 조사는 자동응답전화(ARS) 방식으로 어떤 예비 후보가 더 적합한지 묻는 방식인데, ARS 조사 응답률은 통상 5% 미만이었다. 한 수도권 지역 의원은 “여론조사 전화가 많이 걸려오는 선거철에는 국민 상당수가 모르는 전화를 차단하거나 거부한다”며 “반면 강성 친명 지지층에서는 ‘카톡방’ 등에 여론조사 대응 매뉴얼까지 공유하며 조직적으로 참여한다”고 말했다.

실제 친명 지지층 카톡방에서는 여론조사 업체의 전화번호나 응답률이 낮아 전화가 걸려 올 가능성이 큰 연령대 등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 때문에 통상 여론조사보다 적합도 조사에서 친명 후보의 지지율이 눈에 띄게 오르곤 했다. 한 예비 후보는 “자체 조사 때는 친명 후보와 1~2%포인트 격차로 박빙이었는데, 적합도 조사에서는 두 자릿수로 벌어졌다”고 했다.(중앙일보 2월 15일자)

2월 20일 민주당 의원 박용진은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저는 어제 민주당 국회의원 의정활동 평가에서 하위 10%에 포함되었음을 통보받았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고 오늘 민주당이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재심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박용진뿐만이 아니었다. ‘비명횡사·친명횡재 공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공천의 기준은 오직 이재명에 대한 충성도가 아니냐는 의문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 이재명은 “혁신 공천은 피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가죽을 벗기는 아픈 과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최병천은 “문제는 하필 ‘비명의 가죽’만 집중적으로 벗기고 있다는 점”이라며 “그 가죽으로, 찐명의 가죽잠바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비판했다.

‘안면몰수’의 자격을 잃은 윤석열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월 27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선 홍영표가 “당대표가 남의 가죽만 벗기면서 손에 피칠갑을 하고 있다”며 이재명을 맹공했지만, 그렇다고 눈 하나 깜짝할 이재명이 아니었다. 연단 앞에 앉아 있던 이재명의 반응을 본 한 의원은 ‘극강 멘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재명, 눈 하나 깜짝 안 하대. ‘너는 떠들어. 난 내 길 간다’는 표정이더라. 그 사람 스타일은 듣기 싫은 소리 나오면 눈 감고 의자 깊숙이 파묻혀 있다 나가버리는 거다.”(중앙일보 2월 29일자) 이 또한 ‘안면몰수’의 힘이었다.

2월 29일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이철희는 MBN 유튜브 ‘지하세계-나는 정치인이다’에서 “이재명 대표나 민주당이 하고 있는 공천은 경쟁력 위주의 승리 공천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할 사람들 위주의 방탄 공천”이라면서 “스스로 지려고 기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문 정당이 아니라 하바리 정당”이라고 말했다. 맞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재명보다 더 지려고 기를 쓴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윤석열이었다.

4·10 총선 결과가 나온 뒤, 이재명은 윤석열이 분명히 대형 사고를 연이어 쳐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큰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사당화를 밀어붙였다는 분석들이 나왔다. 정말 그랬을까. 그 진실은 알 길이 없었지만, 윤석열이 중도 유권자들의 분노를 유발할 일들만 골라 집중적으로 저지름으로써 이재명의 성공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건 분명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개연성이 없다고 크게 욕 먹을 일이었지만, 윤석열은 뚝심 있게 그런 일을 밀어붙였으니 이걸 직접 겪지 않은 후세인들이 이 시절의 역사적 기록을 믿을지 모르겠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4·29 윤석열·이재명 영수회담과 관련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재명은 자신이 그간 간절히 원한다며 노래를 불렀던 영수회담이었건만 막상 회담을 하게 되자 상식을 초월하는 안면몰수 행태를 보였다. 비공개 회담 시작에 맞춰 퇴장하려던 기자단을 불러세우더니 “제가 대통령님께 드릴 말씀을 써 가지고 왔다”며 독재, 지배, 통치, 탄압, 편가르기 등과 같은 거친 단어를 사용하며 원고를 15분간 읽어 내려갔다. 무례하고 오만한 원맨쇼였다. 그는 총선 결과로 인해 더욱 막강해진 자신의 권력 위상을 과시하는 점령군 행세를 하려는 듯 보였다.

이재명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누구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혹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사법부는 아니었을까. 사법부가 여론이나 사회적 분위기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걸 겨냥한 계산된 행위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 해도 그에겐 윤석열과 소통할 뜻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데엔 부족함이 없었다.

영수회담의 내막을 다룬 한국일보 5월 7일자 기사 내용은 충격이었다. 이 기사는 ‘비선 메신저’ 역할을 했다는 두 정치학자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게재했는데,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비선 메신저 스스로 채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서서 ‘날 좀 봐달라’며 모든 걸 다 까발리는 것도 코미디였지만, 이들이 윤석열의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내놓은 다음 이야기들은 코미디의 압권이었다. “강성 지지층과 참모들이 반대해 그간 이재명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 “이 대표에게 총리 추천을 요청했다” “이 대표에게 불편한 인사는 비서실장 인선에서 빼겠다.” “골프 회동, 부부 동반 모임도 하자.”

두 정치학자는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이 기사가 나온 뒤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서는 “보수궤멸자 윤석열 탈당하라” 등과 같은 거센 분노의 반발이 쏟아졌다. 이런 반응을 원했던 걸까. 윤석열 탄핵을 촉진하기 위해 보수의 지지기반을 흔들어 20%대의 지지율마저 무너뜨리겠다는 계략이었느냐는 것이다.

정말 그런 건지 알 길은 없지만 일단 안전하게 말하자면, 기사 제목에 그 답이 있는 것 같았다. ‘尹 “총리 추천해 달라, 부부 동반 만나자”… 유화 제스처에도 李 “위기모면용은 안돼”’ 아, 이재명의 저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라! 다음과 같은 댓글이 만인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윤석열은 감옥 갈 준비나 해라. 이재명은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다. 타협할 것 같았으면 정치하기 20년 전에 기득권하고 타협하고 잘 먹고 잘 살았겠지. 존경합니다, 이재명 대표님.”

이 기사 내용은 윤석열에 대한 치명적인 명예훼손임에도 윤석열이나 대통령실은 비선 논란을 간단히 부인만 했을 뿐 그 어떤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계속 안면몰수라도 했더라면 좋았겠건만, 이 기사에 나타난 그는 총선 결과에 겁 먹은 모습을 보이면서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안면몰수를 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이제 자격을 잃은 윤석열의 안면몰수 타이틀은 회수하고 지리멸렬로 대체하는 게 좋겠다.

태도와 기질의 문제 때문에 스스로 정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 어리석은 대통령,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없애거나 원한을 갚는 복수혈전을 위해 대통령 탄핵에 목숨을 건 야당 지도자들. 정치를 엔터테인먼트로 즐기는 구경거리로는 썩 괜찮을지 몰라도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노라면, 한국이 어쩌다 이렇게 지도자 복이 지지리 없는 나라가 됐는지 양쪽의 작태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 (다음 호에 계속)

강준만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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