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증, 비, 복통…혹독한 '킬리만자로 면접' [마차메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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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세계여행]
트레킹 4일차 운무에 싸인 우후루 피크를 바라보며 바랑코 월로 향하고 있다.
스와힐리어로 '번쩍이는 산'을 뜻하는 킬리만자로산Mount Kilimanjaro(해발 5,895m)은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으로 피켈, 로프, 하네스 등이 없어도 정상을 트레킹으로 오를 수 있어서 일반인들에게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에 없지만 킬리만자로에 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6대륙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쉽게 발을 디디지 못하고 눈 맞춤만 하던 차에 '인생에 한 번쯤 킬리만자로'라는 TV방송이 내 가슴에 불을 댕겼다.

킬리만자로산의 등산루트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많이 가는 코스는 마랑구Marangu와 마차메Machame이다. 마랑구 루트는 가장 쉽고 짧은 코스로 길가의 찻집에서 콜라를 팔곤 했기 때문에 '코카콜라' 루트라는 별명이 붙었다. 쉽다는 이유 때문에 초보자들이 많이 선택한다. 산장을 이용하는 편리함은 있지만 다른 코스에 비해 고소적응은 쉽지 않다.

'위스키 루트'라고도 알려진 마차메 루트는 킬리만자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루트이다. 고도를 빨리 치고 올라가는 가파른 코스이지만 1일 트레킹거리가 비교적 짧고 경치가 좋다. 마랑구 코스에 비해 고소적응이 용이하고 전 일정이 캠핑이다.

킬리만자로 산행은 12월부터 3월, 6월부터 10월까지 건기가 가장 좋은 시기이다.

많은 고산들을 다녀왔지만 아프리카 고산은 처음. 게다가 산행 중에는 매일 1,000m 가까이 고도가 올라가므로 고산증으로 고생하는 산이다. 특히 마지막 날, 캠프지에서 정상인 우후루Uhuru 피크까지는 표고차가 1,200m에 가까워서 아프리카로 출발하기 전부터 긴장됐다.

트레킹 2일차 쉬라 캠프로 이동하는 중에는 거대한 세네시오 군락지를 지난다.
1일차_ 마차메 게이트(1,640m)~마차메 캠프(2,835m)

인천에서 13시간 비행기 타고 아디스아바바 도착 후 2시간 환승시간을 보내고 2시간 30분 정도 다시 비행기 타고 킬리만자로공항에 도착했다. 예약한 차량으로 킬리만자로 등정을 위한 전진기지인 모시로 이동해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차량으로 거의 2시간 걸려서 산행 출발 지점인 마차메 게이트에 도착했다. 시작부터 참으로 숨 가쁜 일정이다.

마차메 게이트에서 6일 동안 산행을 도와줄 가이드와 포터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가이드 대장은 하지. 우연하게도 '인생에 한 번쯤 킬리만자로'에 나왔던 그 하지였다. 킬리만자로산만 100번 넘게 다녀온 베테랑 가이드와 함께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네트워크가 불통이라서 입산수속을 기다리는데 소나기가 쏟아진다. 가는 날이 장날? 열대우림이라 비가 자주 온다고는 했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비는 산행 내내 우리를 쫓아 다녔다. 게이트에서 조금 올라가니 짐 검사와 배낭무게 체크를 한다. 페트병은 반입 금지. 배낭무게는 등산객 1인당 15kg를 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넘실거리는 운해 속에 메루산이 숨어 있고 숨 막힐 듯 장대한 풍경이 펼쳐진다.
드디어 산행 시작이다. 열대우림답게 비도 많이 오고 숲도 우거지고 길은 오솔길처럼 좁다. 시작이라 모두들 컨디션이 좋아서 생각보다 잘 올라간다. 구름이 너무 많이 끼어 조망은 없다.

빼곡히 하늘을 가린 나무들이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고 자라는 모습이 멋진 예술작품이다. 이는 수관기피樹冠忌避라고 하는데 나무들의 윗줄기가 뚜렷한 영역과 경계선 내에서만 성장하기 때문에 일정한 공간을 남겨두어야 나무 아래까지 충분히 햇볕을 받아 함께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발고도를 1,000m 이상 올라가야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가뿐하게 첫날 캠프사이트인 마차메 캠프Machame Camp에 도착했다. 텐트는 이미 쳐 있었고 짐정리 할 동안 저녁식사도 준비되었다. 산행 후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2일차_ 마차메 캠프(2,835m)~쉬라 캠프(3,850m)

오전 6시 아침식사. 먹어야 걸을 수 있으니 밥맛은 없어도 열심히 먹는다. 오후에 비올 가능성이 있어서 가능한 일찍 출발. 출발을 응원해 주려는 듯 하늘이 열리며 우후루 피크가 보였다. 이제 3일만 있으면 저곳을 밟게 되겠지. 그나저나 비만 안 왔으면 좋겠다.

오늘은 황무지와 초원이 특징인 낮은 고산지대. 거리는 짧아도 고도가 많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코스이다. 여유 있게 천천히 진행한다. 이 험난한 길을 포터들은 머리에 배낭을 이고 간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질 정도이다.

매일 우중 트레킹을 했지만 감사하게도 바랑코 캠프에서는 새벽에 아주 잠시 파란하늘과 우후루 피크의 민낯을 보았다.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조망 터. 넘실거리는 운해 속에 메루산mount meru이 숨어 있다. 숨 막힐 듯 장대한 풍경을 마주하니 끝없이 감탄사가 이어지고 너도나도 메루산 운해를 배경삼아 수없이 사진을 찍는다.

고도가 높아지니 서식하는 나무도 달라진다. 킬리만자로산, 케냐산, 엘곤산 등 아프리카 고산에서 자라는 자이언트 그라운드셀giant groundsel과 로벨리아Lobelia Deckenii가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킬리만자로에 자생하는 유일한 고산 로벨리아 종은 해발 3,800~4,300m 사이에서 자라는데 성장이 무척 느려서 번식 가능한 크기에 도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린다. 길은 점점 험해진다.

쉬라 캠프Shira Camp에 도착해서 짐만 풀고 고소적응을 위해서 쉬라 케이브까지 다녀왔다. 쉬라 케이브는 성인 수십 명이 들어설 만큼 정말 넓다. 비상시엔 이곳에서 자도 될 것 같다.

킬리만자로산 마차메 루트의 주요 캠프 간 거리와 소요시간이 쓰여 있다.
3일차_ 쉬라 캠프(3,850m)~라바타워 캠프(4,600m)~바랑코 캠프(3,900m)

해발고도를 1,000m 가까이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는 길고 힘든 날이다. 쉬라 캠프의 아침은 몽환적이다. 출발은 참 좋다. 파란 하늘도 살짝 보여 준다. 길은 너덜길이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오늘도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비도 쏟아지기 시작한다. 판초 입고 걷는 시간이 너무 길다. 계속된 오르막에 비와 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모두들 지쳐간다. 등산화 속까지 축축해진다.

레모쇼 루트Lemosho Route와 마차메 루트가 만나는 라바타워 캠프Lava Tower Camp에 도착하니 갑자기 등산객이 많아졌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포터와 가이드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식당텐트를 치고 우리를 기다렸다. 얼큰하고 따뜻한 라면이 점심메뉴이다. 추울 땐 라면이 최고인데 입맛이 없어서 국물만 조금 먹었다.

돌길에 바람은 왜 이렇게 세차게 부는지. 한참동안 바람과 사투를 하고 나니 조금 바람이 잦아든다. 경사가 심해지더니 드디어 세네시오 군락지가 나타났다. 이렇게 거대한 세네시오는 킬리만자로에만 자란다고 한다. 남미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나무를 보았던지라 신비롭지는 않았지만 군락지가 꽤 넓고 나무가 무척 커서 조금 놀라웠다.

킬리만자로산 트레킹 마지막날, 밀레니엄 캠프의 밤하늘은 별과 은하수가 가득하다.
4일차_ 바랑코 캠프(3,900m)~바라푸 캠프(4,680m)

새벽의 바랑코 캠프Barranco Camp. 파란 하늘을 잠시 보여 주어서 잠시나마 우후루 피크와 인사도 나누었다.

오늘 코스가 힘들다고 하지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주의를 준다. 경사도가 가파른 바랑코 월Barranco Wall을 올라갔다가 카랑가 밸리Karanga Valley를 지나서 카랑가 캠프(3,960m)까지 급경사의 길을 내려가야 한단다. 시작부터 쉽지 않은 날이다.

바랑코 월 뒤로는 우후루 피크가 보인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조금씩 추워진다. 가이드도 포터도 힘들어한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이런 절벽을 오르는 그들이 참으로 위대해 보인다. 바랑코 월은 바위를 잡고 올라야 하는 구간이 많아서 스틱은 모두 접었다. 길도 미끄럽고 등로 아래엔 절벽인 구간도 있어서 무척 위험하다. 정체까지 심해서 비바람과 싸우며 기다려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다. 긴장감이 감돈다. 바랑코 월은 정말 쉽지 않은 길이다. 바랑코 월 정상에서는 우후루 피크를 조망하며 즐겨야 하는데 우후루 피크는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카랑가 캠프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중에 장대비가 쏟아진다. 킬리만자로 산행은 매일 비다. 경사도는 그리 심하지 않은 언덕이 계속 이어진다. 잠시 평원이 나타나는가 싶었는데 다시 급경사. 비바람과 싸워가며 걷는 길은 피곤하다. 등로까지 험악한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배가 계속 아파서 식사도 할 수 없다. 비가 오락가락, 컨디션도 오락가락. 바라푸 캠프Barafu Camp에 무사히 안착! 내일 정상 도전을 위한 산행은 밤 12시에 출발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설렘과 걱정이 교차하며 쉽게 잠을 잘 수 없다.

트레킹 4일차 바라푸 캠프에 가까워지니 거대한 세네시오 군락지가 펼쳐진다.
5일차_ 바라푸 캠프(4,680m)~우후루 피크(5,895m)~하이음웨카 캠프

자정쯤에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오늘 가장 중요한 곳인 스텔라 포인트Stella Point(5,756m)를 향해 출발. 저 멀리 모시 시내의 야경이 보인다. 모시 시내로 펼쳐진 능선이 참 멋진데 느낄 여유가 없다.

오늘은 1:1 가이드.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옆에서 격려를 해준다. 심지어 배낭조차 가이드가 메고 나는 크로스백만 메고 오른다. 정상까지 거리는 짧아도 고도가 워낙 높아서 한 걸음 떼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어제부터 시작된 복통이 멈추질 않는다. 아픈 배를 움켜주고 일행들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속도를 맞춘다. 5,000m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거의 좀비 수준이다. 꿈결에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기분이랄까? 스텔라 포인트에서 봐야 할 일출은 아쉽게도 길에서 만났다. 오렌지빛 햇살이 몸을 감싸준다. 컨디션도 조금 좋아진다.

드디어 스텔라 포인트. 많은 고산을 다녀봤지만 고산증으로 고생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복통 때문인지 고산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무 힘들게 스텔라 포인트까지 올라왔다. 영혼이 털린 느낌. 긴장의 끈이 조금 풀리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다가 아래쪽을 바라보니 좀비처럼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금 전 내 모습이다. 여기서 고산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하산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우리 팀은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고산병으로 고통을 느꼈지만 다행히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스텔라 포인트에 도착했다.

좀비처럼 걸어서 도착한 스텔라 포인트.마치 정상에 도착한 것처럼 감동의 순간이다.
이제 정상인 우후루 피크로 향한다. 정상까지는 고도를 139m 더 올려야 한다. 스텔라 포인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걸을 만하다. 분화구를 따라 걷는다. 오래전 킬리만자로의 눈이 2020년에는 모두 녹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지만 아직 정상에는 눈이 가득하다. 물론 오래전보다는 눈이 많이 적어진 것은 확실하다.

드디어 오랜 꿈이었던 우후루 피크에 도착했다. 포기하지 않아서 얻을 수 있었던 내 인생 최고의 성취감이다. 축하해 주는 눈이 내린다. 눈을 맞으며 인증사진을 남겼다. 스텔라 포인트에서의 진한 감흥만큼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산 길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등로에는 제법 눈이 쌓여 있고, 바람이 세차다. 길을 가다 보니 나랑 가이드만 같이 가고 다른 일행은 보이지 않는다. 가도 가도 끝없는 눈 세상이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하산 길 모습에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고산에서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다시 느낀다. 판초를 입었어도 옷이 축축해지니 추위가 엄습한다. 오늘 중으로 바라푸 캠프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드디어 바라푸 캠프 도착! 그런데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긴장감이 풀리면서 눈꺼풀이 내려온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텐트에 들어가서 그대로 쓰러져 잤다. 한참 신나게 자고 있는데 다시 하산을 해야 한다고 깨운다. '아~~ 일어나기 싫다.'

2000년에 개장해서 밀레니엄 캠프라고도 부르는 하이음웨카 캠프까지 3.5km. 낮잠도 자고 고도가 낮아져서 컨디션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등산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좋지 않았는데 그리 힘들지 않게 캠프에 도착했다.

6일차_ 하이음웨카 캠프(3,900m)~음웨카 게이트(1,640m)

마차메 루트 트레킹의 마지막 날. 정상을 다녀왔으니 이젠 여유만만이다. 지난밤에는 은하수 사진도 찍고 모처럼 여유롭고 편한 밤을 보냈다. 참으로 쾌청한 날씨다. 아침식사 후에 완주축하 파티. 우후루 피크에 다녀왔으니 신바람이 가득하다.

하산 길은 너덜길. 비 온 후라 돌길은 더 미끄럽다. 질퍽한 길에는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가득해서 발을 디딜 곳이 적당하지 않다. 로우음웨카 캠프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어진다. 이제 끝이 보인다. 열대 우림으로 들어서니 이끼가 가득하다. 6일 동안 함께한 가이드와 모처럼 편안하게 산책하듯 내려오며 두런두런 이야기까지 나누며 즐기는데 갑자기 비가 내린다. 오늘은 조금 쉬어가나 했는데 역시나이다. 음웨카 게이트에 도착하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하산 후 시원한 맥주 한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보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에 온 첫 번째 이유인 킬리만자로 정상 도전은 성공이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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