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안현댁'-김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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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김춘기


돌고 돌아 고향으로 회귀다. 육신은 허물고 백골로 남아 몇 겹 한지에 싸인 채 돌아왔다. 살아생전 길쌈을 위해 목화를 심던 산밭에 합장으로 봉긋하게 집을 짓는다. 떠도는 일은 끝나고 긴 안식에 드실 테다.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옹기종기한 마을을 마주하고 젊은 날의 애환을 추억하시리라. 객지에 잠드셨던 부모님의 혼백을 이장하는 중이다. 엄마, 엄마 집 마련을 위해 우리가 모였어요. 가만히 속삭이는데 아스라이 그날이 떠오른다.

오빠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다. 정신이 맑았다 흐렸다 되풀이되던 엄마는 손수 지어 건사해 둔 수의를 꺼내 입으시고 눈을 꼭 감고 누우셨다. 발에는 누런 버선을, 손은 악수(幄手)로 싸매고 이제 입관하여 장례를 치르라는 의미 같다. 기다리던 죽음이 쉬 찾아오지 않자 참다못해 마중이라도 나온 듯 기묘한 행색이다. 저승 차림의 섬뜩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까지. 명치 끝이 아렸다.

단지 병증만으로 저러실까? 체면 많은 분이니 저 모습이 진심일 수 있겠구나. 자유롭지 못한 몸이 되어 이제 짐짝처럼 변해버린 당신의 신세를 용납하기 힘드셨을 테다. 그 심정이 오롯이 전해오면서 전후 사정 따질 겨를이 없었다.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수없이 되뇌지 않았던가. '어떻게 키운 자식들인데 한 분 엄마를 ….'

엄마는 대퇴골을 다친 후 생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육신이 되어버렸는데 살가운 보살핌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는가. 오빠 집에서 온종일 누웠다 일어났다가를 되풀이하는 동안 또 얼마나 각다분한 시간을 보내셨을까. 언니는 출가하여 먼 곳에 살았고, 가까이 있는 나도 직장 다니며 세 아이를 키우느라 살펴드리지 못했던 절박한 시기였다.

"저 길을 걸어 마을로 들어왔제." 엄마 목소리가 어제인 듯 생생하다. "멀미가 하도 심해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사립문을 들어섰는데 그것이 고생문이었던 게지. 안주인이 없는 살림살이라 주접스럽고 부엌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눈치 빠른 시누이가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지. 그간의 이러저러한 집안 사정을 알려 주고 식구들의 성질을 귀띔해 주니 때로는 네 아버지보다 더 생광스럽더라."

엄마는 1912년에 태어났다. 열아홉에 청송군 안덕과 현동 지경에서 고개 넘어 부동면 부일리로 시집을 왔다. 친정에서는 서당 훈장 아버지 밑 일곱 남매 중 둘째였다. 순한 부모님과 글재주 뛰어난 오라버니 아래에서 동생들을 잘 거느린 부덕 갖춘 맏딸로 별 풍파 없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우고 명심보감까지 귀동냥했으니 그 당시로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춘 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엄마를 안현댁이라 불렀다.

복례라는 이름을 두고 안현댁이라 불리면서 여인으로서 삶이 시작된 셈이다. 청송심씨네가 터를 잡은 동네에 타성바지 안동 김의 집으로 시집온 새댁이니 처음부터 행동이 조심스러웠을 테다. 혹여 책이라도 잡히면 두고두고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니까. 다행히 글줄이나 읽은 새댁이라는 소문이 난 덕분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마을에 혼사가 있을 때면 사돈지를 써 주거나 편지를 대필해 주었으니 높게 쳐다보기도 했으리라. 엄마는 살아생전에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네 살 아래 신랑의 얼굴에는 아직 장난기가 묻어 있더라. 범 같은 시아버님에 미성의 시누이 시동생까지 어깨가 묵직했제. 알고 왔으니 어느 정도 작정은 되어 있었건만 그래도 새댁이 삼일은 밥상을 받는다던데 삼일이 뭐꼬. 신행 온 다음 날부터 녹의홍상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던 기라.

네 할아버지 성정은 급하기로 꼭 가랑잎에 번지는 불같았다. 혹여 홀 시어른 서운할세라 언행을 늘 조심하고 손아래 시누이와 시동생에게는 엄마 맞잡이가 되려고 마음을 너그럽게 쓴다고 쓰면서 살았다. 나이가 차서 온 새댁이고 키가 컸으니 남들 눈에는 몰골사납게 보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만 내 딴은 힘이 들었제.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첫 번째로 치른 대사는 시누이 혼사였다. 네 작은고모 이야기다. 친정 동네 김녕 김씨 일가 중에 인물이 희멀건 총각이 있었다. 부모 사는 것도 낙낙하니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되어 중신어미를 넣었제. 혹여나 엄마 없이 자라서 본데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혼수를 섭섭잖게 챙겼다.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그네에게 입단속을 시키면서 신부 도리도 익혀 보냈지. 다행히 그 집으로 들어가서 아들딸 섞어 낳으면서 대를 잇고 살림도 일구어 갔으니 얼마나 기특하던지.

수족 같던 네 고모가 출가하고는 난감한 일이 많았제. 홀로 남은 시동생이 말썽부릴 때는 달랠 길이 막막했다. 네 삼촌 말인데 어릴 때 엄마 잃고 홀아버지 밑에 막둥이로 자라서 제멋대로이고 고집 세기가 이미 소문이 난 터다.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릴 재간이 없다. 애를 먹이겠다고 작심한 듯 침을 발라 거짓 눈물까지 만들어 울음을 부풀린다. 보란 듯이 울어 젖힐 때면 시어른께 민망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 보기에도 여간 절박한 게 아니었다. 그게 바로 시집살이라는 거제.

나는 위로 세 아들을 줄줄이 잃어버렸다. 그때마다 애간장이 타들어 갔제. 그걸 세 번이나 겪은 후에 너희 삼 남매를 얻었으니 얼마나 소중하겠노. 특히 네 오래비는 위로 세 아이를 잃은 직후에 얻은 아들이니 혹시나 또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래 키워서 그런지 겁이 많고 강단이 없다. 학교 다닐 때도 아이들이 놀리면 맞서 싸우지 않고 피하기 일쑤였다. 오히려 억바리가 센 언니가 돌멩이를 들고 다니며 오래비 괴롭히는 아이 뒤를 쫓곤 했제.

첫아이를 낳았을 때다. 혼인하고 단번에 한 출산은 온 집안의 경사인 기라. 아이는 행복을 주지만 때로는 슬픔을 안기기도 하더라. 걸음마를 배운 후로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다니며 재롱을 부렸다. 아장아장 귀여웠지만 밖으로 드러내놓고 어르지는 못했다. 요즘과는 달리 어른 앞에서 제 자식을 마음껏 예뻐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아이는 주로 네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놀았제.

아이가 복학을 앓았을 때다. 복학은 초학이라고도 일컫는 그 시절 아이들이 앓던 열이 나고 배가 아픈 병이었다. 아버님은 당신이 만들어 둔 아편을 조금씩 떼어 먹였다. 그때는 민가에서 양귀비를 재배해서 몰래 아편으로 제조하여 비상약으로 쓰곤 했지. 아이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데도 병증이라 생각하고 먹이니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약이 과하다고 만류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곳은 시아버님 왕국이었으니 군림하던 왕은 끝내 며느리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고 말았으니 내게는 하늘이 내려앉는 날이 되고 말았제.

그 아이를 품고 젖을 물리다가 살포시 잠이 들었을 때다. 시뻘건 아궁이에 불이 타오르고 그 속에서 새파란 저승 파리 한 마리가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나를 못살게 구는 이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 소스라쳐 깨어나니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서 살피니 아이가 사지를 뻗으며 숨이 멎고 있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아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첫아이를 묻던 날 가슴에 불이 일었으나 어른을 원망하지는 못했다. 그냥 말문을 닫고 아이의 운명이려니 내 팔자 탓이려니 가슴을 칠 뿐이었다. 그때까지 네 할아버지는 당신의 약 오용을 깨닫지 못했으니 또 다른 슬픔을 만들었던 거제.

둘째는 인물이 참으로 좋았다. 달덩어리 같은 아이에게 서기가 나면서 주변이 온통 환하고 밝았다. 내게 과분한 아이 같고 꿈이 생각나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제. 그때도 네 할아버지는 아편의 효력을 만병통치약으로 믿고 있었을 때니 아이가 보챌 때마다 내 눈을 피해 조금씩 먹였던 모양이다. 그 어린 것이 마약 성분을 어찌 견디겠나. 생때같은 아이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넘어가니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무지했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내게는 또 한 번 천지가 멈추어 버린 날이었다.

그 무렵은 내 마음만 흉흉한 게 아니라 세상도 흉흉했다. 나라 밖에서는 전쟁이 치열하다고 하고 마을에는 젊은 남자들을 보국 대원으로 뽑는다는 소식이 돌았다. 모두가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여 지내고 있을 때 기어이 윗마을에서부터 동원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줄지어 잡혀갔다. 헛간에 숨어 있던 네 아버지도 붙잡히고 말았다. 나는 얼른 미역귀를 아버지 주머니에 넣어주고는 가면서 씹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미역처럼 미끄러져 돌아오기를 빌었다. 그게 양법禳法이라는 거다. 천지에 어디 기댈 때가 없으니 민간 속설을 믿고 의지한 거제.

참말로 저녁 무렵에 네 아버지가 돌아왔다. 뽑아간 사람들을 한곳에 모은 후에 차를 태워 보낸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차가 떠난 후였단다. 그게 무슨 조화인지 희안하제. 사람들은 네 아버지의 운수가 대통해서 빠진 거라 했지만 나는 양법의 효력이라 생각되더라. 행정력이 어수룩하고 복불복으로 살던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아이 잃은 가엾은 여인에게 천지신명이 내려준 위로라 믿고 싶었다.

셋째가 인물은 으뜸이었다. "내 복에 웬걸," 머리가 내둘렸다. 저렇듯 잘생긴 아이는 내 곁을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불안불안하더라. 자꾸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정말로 홍역으로 잃고 말았다. 어찌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나. 산에 아이를 묻고 온 네 아버지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만주로 가버렸다. 당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만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되놈 가방 들고 일본 가는데 조선 사람 지게 지고 만주 못 가나." 이런 노래까지 유행하던 시절이다. 사람들은 먹을걸 찾아 나선 길이지만 네 아버지는 '홧김'에 떠난 유랑길 이었제.

그때 여자로 태어난 것이 한스럽더라. '화'는 내 가슴에서 활활 타는데 정작 그 불씨를 잡아줄 신랑이 훌쩍 떠나 버리니 여자 신세가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그래도 살아야 했다. 일제의 강탈은 심해지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를 소문들이 떠다녔다. 군수품을 만든다고 먹던 놋그릇마저 공출당해야 했던 힘든 날들이었다.

네 아버지가 떠난 후 할아버지 성화가 대단했다. 삼촌더러 "가서 형 찾아오라." 소리를 지르며 채근했으니 삼촌인들 편하게 지낼 수 있었겠나.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래채에 신혼 방을 차리고 재미나게 살 때였으니 얼마나 가기가 싫었겠나. 꽃 같은 색시를 두고 떠나야 했으니.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형과 아베를 많이 원망했을 거다. 네 삼촌은 약빠르지 못하고 덩둘은 편이어서 걱정이 많이 되었제.

삼촌이 아버지를 찾아 떠난 후에 숙모가 딸을 낳았다. 끝내 삼촌이 돌아오지 못했으니 네 큰언니는 유복녀가 되어버린 게다. 한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바뀌더라. 그 아이는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다. 아버지가 참말로 보고 싶었을 게다. 삼촌은 딸이 생긴 줄도 모르고 떠났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네 할아버지 심정은 오죽했겠나. 늘 기다리는 마음이라 문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았다.

숙모 산바라지를 하면서 내 뱃속에도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제. 덜컹 겁부터 나더라. 산달이 되어갈수록 이번에는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커졌다. 배가 사르르 아플 때 나는 얼른 외양간으로 갔다. 천한 짐승의 삼신을 닮은 아이를 낳아야 명이 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 곁을 떠나지 않을 명줄 긴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간곡한 소망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말 구유에서 성인이 태어났다는 걸 알지도 못했지만 하도 답답하니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한 거제.

나는 아이를 낳아서 바구니에 담아 소 여물통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피부가 가무스레한 것이 영 인물이 없더라. '아, 이 아이는 날 떠나지 않겠구나.'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게 지금 네 오래비다. 천신만고 끝에 아들 하나 붙잡고는 열이 나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나도 먹지 못했다. 소 삼신을 닮아서 그런지 잘 자라나서 평생을 의지하고 살지 않았나.

오래비가 걸음마를 배울 즘 네 아버지가 왔제. 홧김에 집을 나가 만주 천지를 떠돌다가 돌아와 보니 생겼는지도 몰랐던 아들이 아장아장 걷고 있으니 뛸 듯이 기뻤을 게다. 한데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것이 삼촌의 부재 때문이다. 형을 찾아 만주로 떠난 동생이 돌아오지 못했으니 미안함과 죄책감이 컸다. 우리는 하마나 하마나 하면서 돌아오기를 기다렸지 영영 못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삼촌이 돌아오지 않으니 네 숙모 방에서 문제가 생겼다. 얼굴이 반반했으니 동네 남정네들이 눈독을 들인 게다. 밤이 이슥하면 집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이내 숙모 방을 들락거리는 남정네를 봤다는 말이 퍼졌다. 어디 동네 아낙들이 가만히 있었겠나. 처음에는 우물가에서 쑤군대더니 끝내 집으로 몰려왔다. 숙모는 하는 수 없어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했지. 그러고 얼마 있다가 재가한다는 소식이 온 거다.

아버지는 나를 시켜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우리 집 씨는 우리가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요즘과 달리 재혼하는 여자가 아이를 데려가는 경우도 드물었고 제 핏줄을 딸려 보내는 집안도 없던 시절이다. 네 큰언니가 제 엄마와 헤어지면서 내 등에 업혀 돌아올 때가 두 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날부터 한 살 아래인 네 오래비와 같이 내 젖을 물려가며 키웠제. 그 후로는 여태껏 어미를 만나지 못하니 그 아이 가슴에 원망과 그리움이 얼마나 컸을까.

일본이 물러가고 나라가 해방되었다. 세상은 요동을 쳤으나 혹시나 하면서 기다리던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는 삼촌이 돌아오는 것은 보았다고 하고 또 누구는 숙모 소식을 들은 삼촌이 되돌아갔다고 했지만 믿을 수 있는 말들은 아니었다. 우리도 큰언니를 돌본다고는 했으나 할아버지께서 많이 살펴 주셨다. 큰 탈 없이 자라나 어느덧 취학 연령에 이르렀다. 학교에 보내야 하는 데 할아버지 반대에 부딪혔다. 아니 부딪혔다고도 할 수 없는 일방적 결정이었제. 나는 완고한 어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 시절에 교육은 아들이 우선이고 딸은 뒷전이다. 딸은 집안일 돕고 동생들 뒷바라지하다가 출가하는 것이 운명이라 생각할 때다. 아예 학교 문에 들어서지도 못한 여자애들이 많았을 때다. 우리 동네도 그랬다. 또래 친구들이 학교 다니지 않았고 큰언니도 별 불만이 없더라. 하는 수없이 틈틈이 애를 앉혀두고 글자를 가르쳤다. 이름자를 쓰고 몇 자 깨치는 듯하더니 이내 싫증을 내면서 팽개쳐 버렸다. 끝내 까막눈이 되고 말았으니 어른들 잘못이지.

시집살이는 갈수록 고단하다는 말이 참말이더라. 네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쓸어져서 반신불수가 되셨다. 얼마나 막막하던지.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 의복을 갈아입히는 일, 일으켜 앉혀 식사 수발을 드는 일, 무엇 하나 쉬운 게 있겠나. 너는 아직 나지도 않았고 언니는 어렸으니 도와줄 사람이 큰언니밖에 없었다. 조용히 앉아서 밥을 먹지 못한 세월이 장장 9년이다. 9년 동안 병석에 누워 며느리에게 대소변을 맡겨야 했던 아버님의 신세도 처량했을 테다.

그래도 손녀가 만만하지 않았겠나. 잔심부름은 대부분 큰언니가 맡아서 했다. 성질 급한 아버님은 당신의 요구를 얼른 들어주지 않는 손녀를 향해 소리를 내지를 때가 허다했다. 부엌에서 일하다가 밖이 시끄러워서 나가보면 할아버지가 손을 휘저으며 "저놈의 딸 아가 말을 안 듣는다." 소리치시고 그 옆에서 큰언니가 "그렇게 답답하면 할배가 일어나 해 보이소" 성질을 돋우고 있었제.

한번은 할아버지 똥 주를 빨아오라고 시켰더니 방망이에 걸쳐 들고는 강으로 가는 내내 큰 소리로 앙앙 울었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기에 애가 저리 우느냐면서 혀를 찰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잘하다가도 지 아버지처럼 한 번씩 어깃장을 부려 사람 애를 태울 때가 있었다. 저도 힘들어 그랬겠지만 내가 저만 미워서 시킨 일도 아니고 동네 아이들이 그만한 일은 하면서 살던 시 절이었다.

디딜방아를 찧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 누가 하나 호박 옆에 앉아 곡식을 쓸어 넣어주고 두 사람이 방아다리를 밟아야 제대로 되는 일이다. 어느 날 큰 언니가 보리를 쓸어 넣고 내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큰언니는 습관처럼 한 손을 호박 옆을 짚는다. 다친다고 손을 치우라 일렀다. 말할 때뿐 또다시 손을 얹기에 그렇게 하면 손 병신이 된다니까 병신이 돼도 맡어매가 상관할 일 아니라 대꾸하며 듣지 않았다. 혼자 디뎌서인지 방아는 균형이 맞지 않고 비뚤거렸다. 왼손 세 번째 손가락이 방아 고에 내려 찢기고 말았다.

깜짝 놀라 피 흐르는 손을 치켜들고 광목천을 찾고 있을 때다. 큰언니는 나를 밀치고 동네로 달아났다. 재바르게 달아나는 아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붙여 꽁꽁 동여매어 따뜻하게 관리하면 제대로 아문다는 걸 저도 알 테다. 피 흐르는 손가락을 쳐들고 동네 가운데로 내달리면 어쩌겠다는가. 제가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전 겨울 그때를 생각하면 몸이 오그라진다. 두 아이가 소여물을 썰었다. 오래비가 여물을 잡고 작두 안으로 밀어 넣으면 큰언니가 작두를 내려 써는 일을 맡았다.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미쳐 손을 빼내지기도 전에 작두날이 내려와 오래비 손등을 내리치고 말았다. 허연 뼈가 내보일 만큼 크게 다쳤다. 우선 상처를 단단히 싸매 주었다. 그러고는 화롯불을 쬐라고 일렀더니 애가 온종일 화롯불 곁에 붙어 있더라. 신통하게도 상처는 덧나지 않고 아물어 붙었다. 이번에도 그 방법을 쓰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큰언니가 손가락에 허연 천을 감은 채 나타났다. 나는 상처의 상태를 살피고 다시 꽁꽁 싸매어 주려고 다가갔다. 질겁을 하면서 손을 떨치고 도망을 다녔다. 별별 말로 어르고 달랬지만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가끔 큰언니는 동네 사람들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한다. 사람들의 하기 쉬운 말들을 의지 삼아, 때로는 할배를 앞세우며 내 간을 볼 때도 있다. 내가 저를 잡도리하지 않으니 나를 만만하게 봐서 그런가 하면서도 그걸 가루어 뭐하겠나 싶어 넘기고 말제.

큰언니는 한 번도 상처를 보여 주거나 화롯불을 쬐지 않았다. 어느 날 쑤시고 아프다면서 동생에게 보여 준 손가락에는 쉬가 쓸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붙잡고 한바탕 소동이 인 후에야 약을 바르고 싸맬 수 있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다. 그렇게 손가락 끝을 망가뜨려 왼쪽 장지 끝이 꼬부라진 게다. 그것을 볼 때마다 지는 얼마나 서러울까마는 나 역시 마음이 언짢았다. 맡어매가 되어서 아이 손가락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내 마음인들 어찌 편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대차게 나가지 못한 탓이제.

그 시절 경북 청송지역 농가에서 돈을 만질 수 있는 작물은 뭐니 뭐니 해도 담배 농사였다. 끈끈한 진이 나오는 담뱃잎을 꺾고 엮고 말리는 과정이 힘이 들긴 해도 돈이 되는 재미로 집집이 다 재배했다. 농한기로 접어들면 황토 굴에서 잘 말려둔 잎담배 조리로 들어간다. 담뱃잎을 펼쳐놓고 품질별로, 색깔별로 분류하고 가지런히 간추려 꼭지를 감는다. 그것을 차곡차곡 포개어 포장해서 수매하면 일이 끝난다. 수매일에 맞추려면 온 가족이 달라붙어도 일손이 모자라 읍내 사람을 놉으로 쓸 때도 있다.

수매일이 정해지면 포장해 둔 담배 단을 싣고 감정을 받기 위해 연초 조합으로 향한다. 다행히 등급을 잘 받아 수중으로 떨어지는 돈다발이 커지면 가장들의 어깨가 으쓱해진다.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치고 거나해지면 두둑한 주머니를 어루만지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담배 수매 날은 마을 전체가 흥청거린다.

혹여 못된 버릇이 도져서 노름방으로 향하는 가장들이 있었다. 주머니에 돈이 생기니 한밑천 더 잡아보겠다고 일확천금을 탐하는 욕심이 동하는 게지. 운수가 대통해야 본전이지만 노름방이란 본래 따는 사람은 없고 잃는 사람 판 이제. 가족들이 한 해 쏟아부은 땀방울을 하룻밤에 날려버리니 얼마나 어리석은 군상들인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빈 주머니를 차고 핏발선 눈으로 들어오니 아낙네들의 가슴이 무너지지 않고 어이 견디랴. 한바탕 난리가 나던 그 시절에나 볼 수 있던 풍경이제.

어느 해 우리 집에도 난리가 난 걸 너도 어렴풋이 기억할 거다.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봄날 산나물을 하러 간다고 나간 큰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지는 데도 소식이 없었다. 제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을은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어른들은 등불을 들고 산으로 찾아 나섰다. 온 산이 그 아이 부르는 소리로 메아리쳤다. 버려진 나물 다래끼조차 발견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도망을 갔으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산짐승의 밥이 된 것은 아닐까. 독사에게 물려 온몸에 독이 퍼진 채로 쓰러진 것은 아닌가.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정말 환장을 할 노릇이었지. 앉았다 섰다 왔다 갔다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고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니코틴을 깊숙이 빨아들여도 진정되지 않았다. 줄담배를 피우며 밤을 하얗게 새웠다.

이튿날도 사람들은 산속을 이 잡듯이 수색했건만 종적이 묘연했다. 그제야 마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갔다는 게다. 윗동네에 사랑을 나누던 총각과 함께 마을을 떴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나는 설마 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둔하기로 어떻게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질녀가 바람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아버지도 애 하나 단속하지 못했다고 나를 많이 나무랐다.

네 아버지가 경찰에 수배를 의뢰했다. 며칠 후 경찰에 이끌려 온 큰언니는 머리에 비녀를 꽂은 채였다. 윗마을 총각과 찬물을 떠 놓고 식을 올린 후 신랑 각시로 살림을 차렸다는 게다. 그만 그대로 살게 놔두고 살림살이나 장만해 주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신랑이 어느 집 종살이하던 사람의 후손이라면서 사윗감으로 인정하지 못한다고 했다. 체면을 구겼으니 동네 부끄럽다며 아이를 큰댁으로 보낸다는 거다.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아 말리지도 못했다. 그날 밤 나는 닭 한 마리를 잡아서 고았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제 떠나면 언제 또 오겠냐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으로 먹여 보내고 싶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내 정신이 반쯤 나간 거제. 밥을 하다가도 무슨 반찬을 해야 할지 멍해지고 눈앞에 닥친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서 허둥대기 일쑤였다. 집안에 대사가 생기면 전과 다르게 감당하지 못했다. 전후 순서가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서는 해내지 못해 앞집 신호댁을 부르거나 작은고모한테 연락해서 도움을 받았다.

얼마 후 큰댁에 가 있던 큰언니가 시집을 갔다. 신랑은 인근 동네 홀어미를 모시고 사는 총각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떼어 놓은 일이 마음에 켕겼다. 체면과 신분이 아이의 행복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텐데. 완고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네 아버지가 안타까웠지만 별도리가 없더라. 이 문제만큼은 잘한 결정이 아니라서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제."

엄마와 큰언니는 거꾸로 된 것처럼 보였다. 구박을 주는 어른이 아니라 만만하게 보인 맡엄마였다. 엄마가 큰언니의 결핍된 마음을 더 세심하게 살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워낙 일에 쫓겨 살았으니 언제 사람 속을 세심히 들여다볼 시간이나 있었겠느냐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힘들게 살아온 엄마에게 더 이상의 요구는 무리다. 하지만 부모가 없는 아이에게는 특별한 관심법이 필요했을 테다. 상처를 지닌 큰언니를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양육한 건 심리학을 접하지 못한 엄마의 한계이기도 하리라.

안현댁은 이웃들에게 여중 군자라는 칭찬을 받을 만큼 마음이 넓고 어질었다. 수더분하고 사람이 좋아 그런 평을 받은 것이리라. 사람 관계에서는 누구를 탓하는 법이 없고 따져 들거나 다툴 줄을 몰랐다. 촉 바르고 까탈스러운 작은고모까지 엄마를 따르는 것만 봐도 알만한 일이다. 사람을 편하게 대했기에 친정 동생들을 비롯하여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많이 왔다. 내 눈에는 엄마가 바보스럽게 보여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

엄마는 솜씨꾼이었다. 무명, 삼베, 명주까지 손수 짜서 옷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입혔다. 목화를 심어 쐐기에서 씨를 가려내고, 활로 타 솜을 만들고, 물레를 저어 실을 감고, 베틀에 앉아 무명을 짜내기까지 지켜본 것만으로도 과히 초인의 경지다. 그뿐인가 대마를 심어 삼베를 짜고,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짰다. 땅에 왕겨를 펴고 불을 지펴 그 위에서 베를 매던 일, 베틀을 차려놓고 북을 밀어 넣고 당겨 받으며 피륙을 짜내던 일, 그 피륙을 펼쳐 마름질하여 옷을 만들던 일,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니 언제 잠 한번 실컷 잔 일이 있었겠는가.

엄마는 돈을 모르고 살았다. 우리 집에 지출되는 돈은 모두 아버지 주머니를 통해 나왔다. 비용뿐 아니라 장을 보는 일도 아버지가 직접 챙겼다. 농자금이며 제사상 차릴 돈이며 집안 대소사에 쓸 돈을 미리 준비해 두니 사람들이 안현양반 주머니는 돈 마를 날 없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급한 볼일이 생길 때면 아버지께 와서 돈을 융통해 갔으니 규모 있게 사신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엄마는 돈을 들고 장 나들이 간 적이 없다.

안현댁이 외아들을 장가들일 때다. 신랑이 처가댁에서 초례를 치른 석 달 후에 새댁이 신행을 오는 날이 우리 집 잔칫날이다. 엄마가 들어서던 그 사립문으로 며느리가 들어서던 순간이다. 엄마, 언니, 나는 모두 굴뚝 뒤에 몸을 숨긴 채 새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댁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고부간에 갈등이 생기고 시누이와 올케 사이에 부딪는 일이 많다는 속설 때문이다. 굴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미리 액땜을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근거야 있든 없든 가족 간에 불화를 막아보고 싶은 바람이 만들어 낸 민간요법일 테니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며느리를 맞은 지 얼마 후다. 집에 새사람이 들어오면 그 운이 3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친척 집에 먹이도록 맡겼던 배냇소가 백주에 뻗어버린 사건이 터졌다. 아버지는 이웃에 소를 맡겨 새끼를 치면 이문을 나눠 가지면서 재산을 늘리곤 했다. 소가 얼마나 큰 자산이던가. 그런 소가 죽어 나갔으니 그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셨다. '아, 이제 이 터에는 운이 다했나 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읍내에 다녀오신 아버지는 이사를 결정하셨다. 일가붙이들이 살고 있는 진보 읍내로 이미 갈 곳이 정하신 후다. 마침 큰언니 문제로 체면이 한껏 구겨진 상태였으니 마음먹기가 한결 쉬웠던 듯하다. 워낙 급한 성정이라 마음이 정해지면 일사천리로 추진하신다. 농지를 헐값으로 처분했다. 급하게 서두르면 제값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건만 무엇에 좇기 듯 해치웠으니 우리 집 운을 아버지가 절단한 셈이다.

이사를 온 진보의 집은 형편없이 좁았다. 아들 부부와 딸 둘, 곧 태어날 손자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던가. 식구를 건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방 둘에 부엌 하나 그야말로 삼간 누옥이었다. 무슨 안목이 그리도 좁은지 어린 우리가 봐도 뭔가 잘못되었음이 보였다. 언니와 나는 놀거나 쉴 곳이 마땅찮아 방이 아닌 뒤주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언니는 이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급하게 결혼을 결심하는 것 같았다.

이사를 하면서 집뿐만 아니라 토지도 많이 줄어들었다. 여기저기 상당했던 논밭이 산골과 읍내와 시세 차이로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돈 가뭄 모르고 살던 아버지나 젊잖은 체면을 차리며 살던 엄마도 그 위상이 떨어졌다.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토지가 줄어드니 일거리가 적어진 게다. 엄마는 이전에 비해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몸이 좀 편해졌다. 우선 굶지는 않으니 뼈가 녹아내리도록 노동하는 모습보다는 여유로운 모습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위로를 삼았다.

안현댁에게 손자가 태어났다. 엄마는 손자를 업고 다니며 모처럼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온갖 집안일과 농사일에서 벗어나서 며느리의 밥상을 받던 그때가 육체적으로는 느긋한 삶이었을 테다. 안현댁의 빛나던 모습은 빛이 좀 바랜 듯했으나 노동의 감옥에서 벗어났으니 그만하면 살만하다고 해야지 어쩌겠나. 손자를 등에 업고 시장가 골목길을 오가던 엄마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신 지는 모르겠으나 쪼그라든 살림살이가 마음에 차지는 않았으리라.

시장 가에 자리 잡은 집에서는 닷새마다 잔치가 벌어졌다. 2일과 7일 진보 장날이면 근방의 친척들이 모여들었다. 점심을 대접하기 위해 겨울이면 볶음밥, 여름이면 잔치국수를 삶아냈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그들을 위한 상이 차려진다. 친척들은 오전에 시장을 한 바퀴 돌고는 점심때가 되면 어김없이 와서 식사했다. 지금은 보기 드문 모습이지만 그때는 당연한 인정의 나눔이었다. 당연한 것이 세월에 밀려 사라지는 것처럼 엄마가 사셨던 과거가 내가 살아가는 현재에 떠밀려 잊히고 있다. 또다시 아이들 세대에게 덮이고 묻혀버릴 날들을 붙잡아 두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현댁의 자식들이 제 삶을 찾아 떠났다. 언니는 결혼하여 시댁으로 들어갔고 오빠는 직장을 잡아 서울로 갔다. 집에는 단 세 식구가 남았다. 그 무렵 엄마의 생각에 변화가 일었다. 그동안 돈이라면 모두 아버지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돈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돈의 필요성을 느꼈던 모양이다. 시대변화의 흐름을 읽은 것인지. 장터 가까이서 시장 논리를 보았는지, 아니 막내딸 공부 뒷바라지가 가장 큰 이유였을 터다. 엄마가 마음을 단단히 굳힌 듯했다.

안현댁이 난전에 앉았다. 집에서 길러낸 콩나물시루를 옆에 놓았다. 손수 농사지은 호박, 깻잎, 풋고추, 파, 등을 난전에 깔았다. 엄마가 콩나물 장수, 채소 장수가 된 게다. 쪽진 머리모양을 하고 시장 모서리에 앉은 모습은 왠지 시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고담 책을 읽던 모습, 베틀에 앉아 베를 짜던 모습, 붓에 먹물을 찍어 사돈지를 쓰던 모습이 어른거리면서 알 수 없는 슬픔을 자아냈다.

처음 난전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얼마나 쭈뼛거렸을까.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았을지도 모르겠다. 막내딸을 공부시키겠다는 일념 아니었으면 할 수 없었으리라. 횟수가 거듭되면서 쑥스러움이 줄어들면서 학비를 내어줄 수 있다는 보람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래 도둑질 빼고는 무엇이 부끄러운가. 안현댁은 차츰 돈의 힘을 알아 갔으리라. 용기를 내어준 엄마 덕분에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참을 수 없는 통증을 호소했다. 담석증이란 진단이 나왔다. 큰 병원으로 가 수술을 받으라고 의원이 일러주었다. 나는 대구 큰 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수술 일정이 잡히고 수술을 위한 최종 검사를 받을 때다. 폐결핵이란 또 다른 진단이 나왔다. 그동안 앓고 계셨지만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다. 마취가 어려워 수술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통증은 멈추었으나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니 불안하고 아슬아슬했다.

아버지는 충격을 크게 받으셨다. 마음이 약해지면서 또다시 심경에 변화가 일었다. 그 무렵에는 두 분만 남은 환경에서 마음이 적적하셨던 모양이다. 서울 오빠네와 합치겠다는 결심이 섰다. 또다시 농지를 처분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서울이 어디 촌사람이 갈 곳이냐고, 아직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아들에게 얹혀사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정해져 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 농지는 두고 가서 여차하면 다시 내려오자 하셨건만 그 말이 아버지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서울로 옮긴 것은 패착이었다. 그나마 있던 집마저 날아가 버렸다. 소읍의 토지가가 얼마나 된다고 그걸 서울 어느 구석에 붙일 수 있으랴. 셋집살이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 전통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밀려드는 서울 거리에 쪽을 진 엄마의 모습은 어색했다. 옷차림이며 말씨는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시골에서 큰 아쉬움 없이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던 살림이 재단을 잘못하여 도회지 하류층으로 밀려버린 기막힌 상황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다. 안현댁이 아닌 00의 할머니가 되었다.

서울이란 도시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아무나 발 붙일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울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산업화 바람으로 덮친 혼탁한 공기는 폐가 나쁜 아버지께는 치명적이었다. 회색빛 도시의 각박함이 숨통을 조여왔다. 기침이 심해지고 가래가 끓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 가래가 기도를 막으면서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 고향이 아닌 서울 인근 공원묘원에 유해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따라간 서울 땅에서 안현댁은 남편을 잃어버리고 짝 잃은 외기러기가 되었다.

우리는 서울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아버지 일을 겪으면서 오빠도 서울의 공기가 무서웠던 모양이다. 내가 먼저 직장을 찾아 영천으로 내려왔다. 자리를 잡을 때쯤 오빠도 내려왔다. 서울보다 지방이 우리 몸에 맞는 옷처럼 느껴져 마음이 편했다. 자주 거처를 옮기면서 가졌던 재산이 공중분해 되고 말았으니 여기서도 집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제 집 하나 없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산다는 것이 엄마의 걱정이고 한이었다. 늘 중얼거리셨다. "세상에 저리 많은 집 중에 우리 집이 없으니 이게 무슨 일인고."

그 무렵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꿈은 교사였다. 교단에 선 선생님의 모습이 좋아 보여 고교 시절부터 품어온 소망이었다. 그때를 대비하면서 분필을 잡고 칠판 글씨 연습을 하기도 했다. 한데 가당찮은 꿈이다. 엄마가 채소 장사를 해서 고등학교까지는 마쳤으나 대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고심하며 찾아보니 길은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그때는 있었던 중등 준교사 자격 검정고시다. 나처럼 절실한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한 제도였던 모양이다. 그래 우선 교단에 서자. 그다음에 대학도 가고 대학원까지 마치자. 나는 국어 과목으로 도전했다.

의지는 강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사범대학 4년의 과정을 독학으로 다져야 했으니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자신감이 없었다.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을 때 엄마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용꿈을 꿨다. 틀림없이 될 게다. 우리 산밭으로 용이 날아오르고 그 뒤를 수많은 새끼 용들이 따라 오르더라. 그 용이 너고 새끼 용은 제자들 아니겠나." 용꿈에다 그럴듯한 해석까지 붙여주셨다. 힘들게 공부하는 딸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만들어 낸 꿈일 테다.

엄마의 꿈 꾸기는 계속되었다. 교사 발령을 받기 위한 순위 고사를 치를 때도 꿈을 꾸어 힘을 실어 주셨다. 어젯밤 "우리 집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꿈을 꿨다. 좋은 기운이 솟을 징조이니 틀림없이 좋은 순위를 받을 거다." 마음이 간절하니 꿈도 꾸는 것 아니겠는가. 꿈이 아닌 엄마의 사랑을 힘입은 걸 어찌 모르랴. 나는 엄마 덕분에 중학교 국어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설 수 있었다. 이어서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영천에 정착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중 엄마가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 일을 겪었기에 두려움이 컸다. 치료에 대한 마음은 아예 접어 버린 듯 낙담하여 누운 엄마의 모습이 마른걸레를 펼쳐놓은 듯이 바스러져 보였다. 다행히 약에 대한 상식이 많았던 남편이 엄마를 설득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제 폐결핵은 약으로 잡을 수 있는 병이라고 거듭 말씀드렸다. 맞추어 약을 사드리고 기운을 도우려고 링거 처지도 했다. 그제야 눈을 뜨고 생기를 찾았다. 고칠 길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꾸준히 약을 드셨고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남편이 경영하는 농원에서 함께 살았다. 평화로운 전원생활이었다. 두 딸이 있어서 행복했고 그들을 돌봐주는 친정엄마와 작은고모가 계셔서 더욱 푸근했다. 낮 동안 엄마와 고모는 아이 하나씩을 맡아서 보살폈다. 엄마와 고모는 시누이올케 사이지만 마음이 잘 맞아 친구처럼 지냈다. 소주 한 대병을 사드리면 양계장에서 나오는 닭 다리를 떼어 붙임 옷 입혀 튀겨 안주 삼아 드셨다. 아이들도 닭 다리 하나씩 물고 놀다가 심심해지면 토끼장으로 가서 토끼를 쫓곤 했다. 그곳은 평화로운 동산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온 식구의 반김 속에서 단란함이 피어난다. 직장 일과 집안일이 힘들 법도 하련만 기운이 솟았다. 가끔은 친정 조카들이 엄마를 뵈러 오거나, 고종사촌들이 고모께 인사드리러 오면 집안이 시끌벅적하다. 어묵탕으로 잔치를 벌이고 닭고기 튀김을 포식하면서 웃고 즐기는 생활이 사람 사는 세상 같았다. 돌아보니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푸근하게 지냈던 그 농원이 온전했다면 엄마도 고모도 나도 꿈처럼 달콤하게 살았으리라고. 인생에 가정법이 없다고 하지만 그 추억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다. 엄마의 미소가 흐르고, 작은고모의 익살이 숨 쉬는 그곳은 아무리 추억해도 질리지 않는다. 내 삶 전체 중에서 되돌아가고 싶은 그때 그곳이다.

드디어 오빠네가 집을 샀다. 참한 한옥이다. 보기에도 품격이 묻어나는 청기와 집은 엄마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고향을 떠나면서 남의 집에 세를 얻어 산 세월이 얼마였던가. 해결하지 못했던 숙제가 풀리고 늘 찜찜하게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던 묵직한 덩어리가 쑥 빠져나간 날이다. 참으로 곡진했던 꿈 아니었던가.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에 엄마는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엄마의 집 사랑법은 매일 만지고 쓸고 닦고 광을 내는 일이었다. 마치 한번 수중으로 들어온 보물을 놓칠세라 보고 만지고 확인하는 아이 같았다. 그날도 엄마는 집을 청소하고 계셨다. 손이 닿지 않는 위쪽 창틀에 앉은 먼지를 닦아내려고 의자를 가져다가 올라섰다. 한창 걸레질에 열중하다가 삐끗하고 의자가 미끄러지면서 엉덩이뼈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대퇴부 골절상이다. 이것이 엄마 인생의 치명타가 되었다. 집에 대한 사랑이 채 식기도 전에.

연세가 높아 수술이 어려웠다. 요즘 같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때만 해도 기술적 한계였다. 그길로 일어서지 못했으니 바깥 활동을 접어야 했다. 앉아서 한 손을 땅에 짚고 겨우 집 안에서 움직일 뿐이었다. 갑갑함을 보다 못해 휠체어로 외출이라도 시켜드리려면 "내 꼴 세상에 보일 것 없고 자식들 번거롭게 할 일 없다." 손사래를 치셨다.

그 후로 엄마의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모두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자유를 잃은 몸은 적적하기만 했다. 적막에 갇혀 혼자 보내는 시간 동안 당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온갖 생각으로 시달렸으리라. 그때 우리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어 꿈처럼 생활했던 농원이 은행으로 넘어가 버린 시기였다. 나는 직장과 아이 셋을 건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니 마음뿐이지 곁에서 살뜰히 살펴드리지 못했다.

몸이 갇히니 마음도 피폐해졌다. 생각이 그냥 뇌 속에 갇혀버린 듯했다. 처음에는 우울증 증세를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망상과 환각에 시달렸다. 멍하고 뿌연 눈빛은 초점을 잃은 채 적막감에 젖어 있었다. 더 이상 엄마의 모습이 아닌, 초라하고 가엾은 노인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분이 정녕 우리 엄마인가. 안현댁의 우아하던 이마 선이며 단아했던 입술, 고왔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퇴근길에 엄마를 뵈러 갔다. 사방이 괴괴한 가운데 홑이불처럼 가벼워진 엄마가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계셨다. 인기척을 들은 반가움에 의식의 한 가닥을 붙잡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참 곱기도 하지 이걸로 너 아버지 적삼을 지어야겠다. 잿물에 한나절 넘게 담갔더니 색깔이 노릿하게 참하게 났다." 엄마는 고향의 어느 날을 살고 계셨다.

당신이 짠 삼베가 고와서 흡족하신 모양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옷을 지어드리겠다는 생각으로 모처럼 생기를 띠었다. 현실을 잊고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고 계신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행복했던 날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허깨비처럼 보였다. 안현댁으로 살았던 그날들이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모양이다.

얼마 후 엄마는 가셨다. 나는 한동안 보내드리지 못하고 엄마 주변을 서성거렸다. 온갖 핑계를 동원한다고 해도 불효의 흔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서양 명언이 있다. 신의 대리자인 엄마가 말년에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유약한 어린아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기막힌 상황에 이르러서야 자식의 한계를 알아차렸다. 엄마는 신이 되어 우리를 지키셨는데 우리는 신의 노후를 편하게 모시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돌이 되었다.

엄마, 이제 엄마의 집이 마무리되었네요. 높다란 봉분이 어느 왕후의 집 못잖아 보입니다. 그렇게도 쓸고 닦으시던 청기와집처럼 아주 멋집니다. 여기서 옛날 사셨던 동네를 굽어보시며 편히 계세요. 객지에 잠드셨던 부모님을 이제라도 고향으로 모실 수 있어 우리 삼 남매의 마음도 참 좋습니다.

저는 엄마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은 막내딸입니다. 간간이 "널 낳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 시면서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셨지요. 겨울밤 구수한 목소리로 읽어주신 이야기책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요. 아마 그것이 살면서 선악을 구별하고 시비를 가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행실이 올바른 사람을 볼 때면 너도 저런 면을 본으로 삼아라. 잘못하는 사람을 볼 때면 너는 저렇게 하지 말고 반면교사로 삼으라 말씀하셨지요. 덕분에 타인의 잘못을 비방하기보다 거기에서 배움을 얻습니다.

'역지사지'란 말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 없으니 그렇게 살라고 하셨지요. 말씀처럼 정말로 상대편에 서서 생각하니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고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요즘은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났기에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네요.

살면서 엄마 생각을 참 많이 해요. "내가 한발 물러서면 주변이 편하다." 그때는 바보스럽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말씀을 어느덧 흉내 내는 걸 보면 저도 이제 철이 드나 봅니다. 나이 들수록 제 모습에서 엄마가 보여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지요. 엄마, 이제 우리는 가요. 봄, 가을에 한 번씩 오빠 언니와 함께 와서 뵐게요.

뒤돌아보니 동그란 봉분으로 만들어진 안현댁 지붕 위로 서녘 빛이 비스듬히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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