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아픔을 딛고 핀 꽃은 아름다워라'-정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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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자 정동식.


1. 낯선 거리 낯선 밤

묵직한 돌이 날아왔다. 내 핏줄이 부스러진다. 푸른 견장이 주저앉고 주변인들은 다급하다. 깊은 밤 단단한 돌은 불보다 무섭다. 어둠이 지배하는 카오스 현장에서 불화살의 머리는 보여도 돌이 날아오는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없다. 감지할 수 없으니 피하기도 어렵다. 이마에 선혈이 낭자하다.

황급히 도착한 구급차가 나를 싣는다. 사이렌을 울리며 현장을 빠져나간 구급차는 어느 병원으로 내닫는다. 가물가물 졸음이 온다. 같이 탄 선생님이 눈을 감지 말라고 소리친다. 저절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는데 의사의 간곡한 외침에 실처럼 눈을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오월의 아카시아는 춤을 추는데 나는 이대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덜컹 들었다. 아내와 두 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제 갓 돌 지난 둘째와 네 살 큰 애는 어쩌지, 아내는?

희미한 의식 저편에서 눈물 두어 방울이 양쪽 뺨을 타고 또르르 구른다. 잠인 듯 꿈인 듯 갈대숲 사이로 낙동강 하구의 오두막집이 보이더니 악머구리 끓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니 응급실이었다.

의식을 잃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막 수술실에 들어가려는데 소대장이 묻는다. 가족과 통화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소대장이 건네준 수화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꿈나라 언저리에서 잠투정을 부리는 두 아들 목소리가 함께 새어 나왔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겨우 한마디 했다. "조금 다쳐 병원에 왔어. 내일 연락할 게 잘 자."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났다. 구구단을 외워 보고 가족 이름을 불러 본다. 모두 생각이 났다. 회진을 오신 의사가 말했다. 수술이 잘 됐으니, 안정을 취하면 두어 달 후에 퇴원할 수 있다고. 순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삶에 대한 서광이 비쳤다.

통증이 조금 덜 해지자 긴박했던 그 순간을 돌이켜봤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여기저기에서 매일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나는 다른 부대와 함께 서울 시내 모 대학 근처에 배치되었다.

그날 오후부터 간헐적으로 소요사건이 이어지다가 어둠이 찾아왔다. 시위하는 사람이나 막는 우리나 모두 땀에 절어 있었다. 시위가 잦아들었다. 이제 모두 마무리를 할 시점이었다. 나는 보고를 하기 위해 건물로 들어갔다.

볼일을 끝내고 출입문을 막 나서는데 누군가 불빛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 돌은 내 오른쪽 이마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예기치 않은 일격이었다.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내 안전모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조그만 호의가 오히려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돌을 던진 학생을 탓하랴, 안전모를 보관하던 대원을 원망하랴. 다만 그 대원이 내 주변에 있었다면 좋을 뻔했다. 왜냐면 이상 조짐을 느낀 내가 안전모를 달라고 여러 차례 재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나의 불찰이다. 생명이나 다름없는 개인 안전 장구는 위험한 상황에서 항상 내 곁에 두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났다. 관계 부처에서 많은 사람이 병문안을 왔다. 부모님은 오시지 못했지만, 남동생과 외삼촌, 이모부가 다녀갔다. 다치기는 했어도 지인들의 위로 덕분에 예상보다 회복이 빨랐다. 두어 달 만에 집으로 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동네 골목에서 가슴이 뭉클했다.

현관문을 여니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온 듯 마음이 야릇했다. 비록 반지하지만 소독 냄새가 진동하는 병원보다는 안퐁하다. 수척해진 아내와 아이들을 안아 보았다. 아픔 속에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아들은 아버지가 낯선지 둘 다 아내의 품에 쏙 안겼다.

2. 귀가 보고와 밥상머리 교육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올렸다. 아버지는 공직의 대를 이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왔으니, 궁금하지 않도록 이상 없다는 보고를 드린 것이다. 걱정하실까 봐 과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짧은 안부에 여운이 남았을까. 전화를 끊고 나니 아버지와 보낸 유년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늘의 나를 만든 스승이자 멘토였다. 어린 시절 밥상머리 교육이 내가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가르침은 오로지 성실이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하니 부지런해야 식솔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성실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면서 일상에서 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는 총명하고 부지런한 집배원. 윗사람이 믿고 맡겨서였을까. 책임 구역은 항상 시내 중심이었다.

코흘리개로 살던 시골 동네에 시내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하루 세 번 다녔는데 아버지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버스 범퍼를 잡고 출근했다고 한다. 막걸리 한 잔 드시면 간혹 말씀하시곤 했다. 위험할 뿐 아니라 비포장 길 먼지를 얼마나 마셨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아버지에겐 없는 것이 많았다. 평생 양복 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 멀리 여행 가셨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없다. 자식 때문에 그런 생각은 아예 사치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아버지는 조실부모하여 가까운 친척이 없었다. 가끔 초겨울에 발그스름한 사과를 들고 경산에서 고모부가 오신 기억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일일 교육은 남달랐다. 특히 나에게 그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는 날이 없었다. 시작했다 하면 두 시간은 기본이었다. 어떤 날은 꾀를 내어 친구에게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내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조금 일찍 끝내주었다. 그래도 바른길을 가라는 아버지의 훈육은 옳았고 내 심신의 자양분이 되었다. .

아버지와의 추억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린이 문학상 수상이다. 시내 백일장에서 우리 가족의 성묘 분위기를 산문으로 썼는데 생각지도 않게 상을 받았다. 우수상이었다. 시상식에 누나와 이모가 함께 참석했다. 상장과 메달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더니 아주 기뻐하셨다.

두 번째는 판자로 지어진 우리 집 개량작업이다. 우리는 일곱 살까지 시골에 살다가 도시로 이사를 나왔다. 말이 도시지 달동네 단칸방이었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님과 여섯 남매가 두어 평도 안 되는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다.

우리는 거기서 이년을 버티다 그 집을 사서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작은 방이지만 그래도 방이 세 개나 되어 부자가 된 듯 기뻤다. 그런데 우리 집은 비탈 집이었다. 산 중턱에 있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적어도 대여섯 단계쯤 올라가야 안방이 나왔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주말마다 집안 보수공사를 하셨다. 거의 한 해 동안 우리는 주말 대부분을 새로 장만한 집의 평탄 작업에 동원되었다. 우리는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 싫었다. 한참, 뛰며 놀 시기에 일을 해야 했기에 주말이 기다려지기는커녕 차라리 없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이웃 동네나 공터로 가서 연탄재와 자갈, 벽돌 등을 구해 날랐다. 어느 날은 판자에 박힌 못을 빼다 찔려 피도 흘리고, 모래를 실어 나르느라 등짐을 지기도 했다. 한 해 꼬박, 수리한 덕분에 엉성한 비탈 집이 몰라보게 근사해졌다. 애당초 여섯 계층이었던 구조가 삼 단계가 되긴 했지만, 우리가 방까지 도달하려면 여전히 턱을 오르내려야 했다.

3. 사춘기의 슬픔과 운명의 갈림길

중학교 이학년, 세밑을 며칠 앞두고 하루가 저물었다. 잠결에 들은 아버지의 교통사고 소식! 어머니는 이부자리를 챙기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도 오시지 않았다.

수심에 잠겨 우리끼리 지샌 방은 캄캄하고 무서웠다. 먼동이 트자, 어둠은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점심을 챙겨 먹으려고 라디오를 켜니 정오 뉴스에 아버지의 사연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시내버스에 받혀 크게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뉴스에 이어 '세노야'라는 노래가 까까머리 가슴을 휘젓고 들어왔다. 간밤에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마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가슴으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어느 병원 신경외과에 입원하셨다. 새해 첫날까지 혼수상태였다가 외할머니의 지극정성 덕분에 닷새 만에야 가까스로 깨어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병원에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행히 병원 가까운 곳에 '부산진역'이 있었다. 간이역보다 조금 큰 그 역은 나의 놀이터이자 희망이었다. 그때 처음 기차를 보았다. 용산으로 출발하는 증기기관차의 우렁찬 기적소리를 들으면 병원 생활의 답답함도 풀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내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아버지의 근육과 뼈가 아물면서 머리에 싸맨 붕대도 풀었다. 조금씩 차도가 있자, 집 가까운 쪽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 무렵 나는 담임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한 금오공고에 특차로 합격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 결정한 일이었다. 진학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여 부모님을 설득하려 했으나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담임선생님은 그런 학교에 나를 보내기엔 너무 아까우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내가 그 학교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가난 때문이었다.

초‧중학교 수학여행도 못 간 나는 그 학교야말로 도시 빈민의 장남인 내가 꼭 가야 할 학교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게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요,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다소 근시안적 선택을 했다고 본다. 가까운 친척이나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선배의 진학지도를 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아마 그랬다면 나의 진로는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었다. 그길로 갔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적성에 잘 맞아 성공 확률이 높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선택이었고 국민에게 무한 봉사를 할 수 있는 보람찬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판사가 되었으니 절반의 성공은 했다고 생각한다.

3. 내 인생의 빨간 불

돌이켜 보면 내 인생 여정에 위기 상황을 알리는 경고등이 여러 번 켜졌다. 감당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의 빨간 불은 앞에서 언급한 90년대 초, '머리뼈 분쇄 복잡 골절상'을 입은 일이다. 혜화동에서 임무 수행 중 다쳤다. 그해 가을, 수술을 한 번 더 하고 한 달가량 회복 기간을 거쳐 드디어 병원 침상을 빠져나왔다.

모처럼 활기가 넘치는 곳에 나온 나는 쾌재를 불렀다. 어떤 분야든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발령을 받은 곳은 강북에 있는 어느 관서였다. 새로 만난 동료들은 이 보직에 어떻게 왔냐며 관심을 가졌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인사발령장에 기록된 내용대로 왔을 뿐이다.

두 번의 수술과 재활로 겨우 정신을 차릴 즈음, 이번에는 앉은 벼락을 맞았다. 예기치 못한 직위해제! 새로운 보직을 맡은 지 불과 일주일만이었다. 관내에 무장탈영병이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나에게 씌워진 멍에는 '무장탈영병 출현에 따른 긴급상황 조치 미흡'이었다.. 멀리 '강원도에서 일어난 무장탈영병 발생 전문'이 관련 부서로 보고‧통보‧하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징계의 폭풍우가 몰아치며 상처투성이가 된 나는, 깃털 같은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들었다. 직장에 첫발을 디딘 지 불과 몇 년 만에 남들이 겪지 않는 굵직한 소용돌이에 두 번이나 휘말리게 되었다.

직위해제 기간 중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된수와 맞닥뜨리긴 했으나 일선 현장의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순간에 관련 매뉴얼의 조치사항을 잘 이행했더라면 이렇게 수위 높은 책임 추궁은 당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건이 있던 그해는 민생정부가 처음 들어선 시기였다.

누가 감히 서울 한복판에 탈영한 무장 군인이 나타나리라 생각했겠는가? 더군다나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벌어져서 더 마음이 아팠다.

불의의 사건은 이렇게 교묘하게 우리의 빈틈을 찾아내어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늘의 다듬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두 새천년을 맞이할 준비로 들떠 있었다. 서너 달 비상 근무가 이어졌다. 무리한 탓인지 눈동자에 이상이 생겼다. 안과 치료를 받으며 외눈 부처로 근근이 견디고 있을 무렵, 희대의 탈옥수가 관내에 나타났다.

나는 현장으로 가지 않고 그를 추격했다. 예상 도주로를 차단해서 잡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미 멀리 도주하여 관내에 그가 없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즉시 현장으로 가서 후속 조치를 하는 것이 옳았다.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매몰찬 징계와 발령으로 내 인사카드는 검붉은 누더기로 변했다.

세상을 향해 버티고 섰던 두 발마저 이번 급류에 떠밀려 급기야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이러다간 그냥 주저앉고 말 것 같았다. 징계 시효는 끝나가고 한 직급에 오래 머무니, 조급증이 올라왔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말라비틀어지지 않으려고 다시 기동 부대로 지원했다.

옛 선배와 상담을 하고, 다음날 발령사항을 확인했는데 예상했던 부서와 전혀 다른 곳에 배치되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최고 선봉 부대 지휘관'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5. 우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선봉

의외의 발령에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힘든 곳이라니? 생각했던 계획이 틀어졌다. 그런 들 어쩌랴. 묻고 따지고, 하소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시들기엔 너무 아까웠다.

'앉은자리가 꽃자리'라는 어느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얼른 마음을 다잡고 부대를 진단했다. 부대는 최악의 상황에 대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부대원들의 평균 키였다. 대열에 함께 서면 내 눈높이가 가장 낮았다. 177cm도 보통 키는 넘는데, 대원들은 무려 185cm쯤 되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농구선수 키였다.

1:1 심층 면담을 해보니 선임들은 자신감이 넘쳤지만 준 선임 이하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긴장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특히 신임대원들은 선봉 부대의 명칭이 주는 중압감에 시달렸고, 이 부대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존재했다. 그리고 두세 명은 자신감과 체력이 떨어지는 대원도 있었다.

불안감 조성에는 선임들의 무용담이 한몫했다. 한 번도 현장경험이 없는 대원들에겐 그럴 만도 했다. 우리의 임무와 불확실한 미래 얘기를 일방적으로 한 탓에 듣기만 하던 신임들이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 현상이었다. 앞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대개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도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대낮이라도 갈 길이 투명하지 못한 가시밭길이면 공포의 그림자가 엄습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선임에겐 무용담 자제령을 내렸고, 신임대원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주기로 했다. 나는 정신교육과 훈련을 통해 이 부대를 강한 부대로 만들고 싶었다. 정신교육을 위해서는 리더의 철학이 담긴 슬로건이 필요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곳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 문구는 내가 존경하던 지인이 부대 지휘를 할 때 사용한 구절이다. 적어도 이 슬로건이라면, 부대원이 각자 역할을 인식하고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임무 수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판 제작의 임무는 우리 식구 중에 H 대원이 하기로 했다. H는 D대 재학 중이며 용모가 반듯하고 심성이 고왔다. 장차 공직으로 입문할 뜻을 가진 대원이기에 나름, 의미가 있었다.

H는 모교의 서예 동아리 선배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받아왔다. 현판에 새기는 작업은 H가 직접 공을 들였다. 드디어 현판이 탄생했다. 현판이 완성된 이후 우리는 슬로건의 취지를 받들어 땀을 흘리고 또 흘렸다.

선봉부대 대원 중에 키는 크지만 의외로 운동장 스무 바퀴를 돌지 못하는 대원이 몇 명 있었다. 우리는 체력이 약한 그들에게 맞춤훈련을 했다. 나는 부대원과 함께 뛰었다. 스무 바퀴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강도를 높여 나갔다. 뛸 때마다 한 바퀴씩 올리는 체계적 훈련을 거듭했다.

훈련 시작한 지 두 달이 되던 날, 부대 전체가 낙오자 없이 쉰 바퀴를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아버지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기뻐서 부대 위문을 왔다. 그날 우리는 기분 좋은 회식을 하며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오늘 생일인 친구' 여러 명 중에 H의 프로필 얼굴이 보였다. 너무 반가워서 예쁜 이모티콘과 함께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이번에 사무관으로 승진을 했단다. 축하를 해주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판에 관해 얘기했다.

H가 말한 마지막 얘기는 지난번 선봉 부대 지휘관으로 갔을 때, 그 현판은 없었고,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현판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상급부대 지휘관 사무실 앞에 늠름하게 게시되어 있단다.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부대는 사라지고 없지만, 강산이 세 번 바뀐 지금도 우리의 혼이 담긴 부대 슬로건은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곳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세월이 저만치 훌쩍 흘러간 지금도, 이 문구를 보면, 저절로 어깨가 올라간다. 임무 수행은 꼭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솟구쳐 오른다. 아, 보고 싶다. 당시 고생했던 부대원들의 모습.

이젠 그 얼굴조차도 가물가물 잊혀 가지만, 험한 세파를 잘 견뎌내며 아프지 않고 잘 사는지 궁금하다. 감히 이 글을 그날의 청춘 선봉대원들에게 올리며, 모쪼록 모두 무탈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6. 오랜만의 개화, 그리고 아버지는 떠나고

선봉 중대 지휘관 임무를 끝내고 무궁화 한 송이를 더 피웠다. 무궁화가 여섯 송이로 늘어나니 감회가 남달랐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무게감이었다.

우리의 무궁화에는 영광에 앞서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송이, 송이마다 나라와 국민을 향해 끝없이 봉사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승진 인사발령을 앞두고 고향에서 한 번 근무해 보고 싶었다. 우리의 소임이 그렇다 보니 명절이나 공휴일에 가족과 같이 지내는 건, 그야말로 꿈이었다. 비상 근무를 밥 먹듯이 하기 때문이다.

'고향 앞으로'의 염원을 담아 예전과 마찬가지로 고향 관서를 희망하는 내신을 올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소망과 달리 대구로 발령이 났다. 그래도 경부선이 지나는 도시에 근무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아내는 대구에서 가족이 함께 살기를 원했다. 고종 여동생이 사는 인근으로 이사해서 그런지 크게 낯설지 않았다. 바쁘게 지냈던 서울보다 여유가 있어 좋았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숲길을 거닐 수 있어 전원생활처럼 마음이 편했다.

연말이 되자 자연스럽게 복귀 문제가 거론되었다. 지방 순환 근무 중인 내가 아무리 이곳이 좋다 해도, 두 해가 지나면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그랬다. 그런데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복귀 시점을 한 해 더 연장했다. 연장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삼 년이다. 원복할 시기가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아버지의 병환은 차도가 없었다.

서울의 동료들과 만나 상의도 하고 형제들과 의논도 했다. 하지만 최종 판단은 내가 해야 했다. 동생들은 강요하지 않았으나 대구에 남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고심 끝에 나는 대구에 잔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입원한 아버지를 두고 서울로 복귀한다면 불효를 범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다소 병환이 호전된 아버지께서 갑자기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셨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고향과 우리 집이었다. 유년 시절이 생각났는지 기차를 타고 싶다고 했다. 경산에서 부산으로 갈 때 난간을 잡고 기차에 오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는 것이다.

수구초심이란 말처럼 타향에 사는 사람에게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리라. 아마 할머니 손 잡고 큰아버지와 함께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남쪽으로 오신 듯하다. 나는 '퇴원하시면 꼭 기차 타고 고향에 모시고 갈게요.'라고 약속했다.

아버지는 대여섯 살에 객지로 나와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셨다. 타향살이 초기에는 먹고 사느라 바빴고, 아이들 키워놓고 보니 객지 생활 십 년 넘어 고향에 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속설을 믿어서였다.

고향뿐 아니라 젊은 시절, 6·25 참전을 제외하고는 아직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조실부모하여 피붙이라곤 우리 일곱 자식과 조카 셋뿐이었다.

평생을 외롭게 자란 아버지, 마지막 소원일지도 모를 '아버지의 고향 열차 프로젝트'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아버지의 버킷리스트 1번이자 나의 꿈이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꿈을 당장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먼저 전세를 정리하고 함께 살 집을 보러 다녔다. 대출을 받고도 모자라 내 암보험을 해약했다. 덕분에 방 하나가 더 있는 아파트를 가까스로 장만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었다. 찬 바람이 세차게 불고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새벽녘에는 간간이 눈발이 날릴 거라는 자정 일기예보가 나올 무렵, 갑자기 아버지의 운명 소식이 날아들었다.

며칠 전, 아버지를 뵙고 올 때만 해도 감기 같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비보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나의 꿈이자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가까운 영천 호국원에 아버지를 모셔서, 아버지가 그리우면 언제든 쉽게 참배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7. 국민의 꽃으로 피어나다.

대구에서 첫 보직을 맡은 지 무학산 초목이 몇 번이나 물들고 낙엽 되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결재판을 들고 7층을 오르내린 보람이 있었다. 꼬박 아홉 해 만에 피워낸 무궁화 한 송이였다. 마침내 양쪽 어깨에 무궁화 여덟 송이가 얹히면서 경찰의 꽃이 되었다.

무궁화 여덟 송이는 관청의 역할을 한다. 관청은 국가 사무에 관하여 국가 의사를 결정하고 이것을 집행하는 권한을 가진 국가 기관이다. 하지만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소임을 다하며 무한한 책임을 지는 자리다. 흔히들 총경 직급을 '경찰의 꽃'이라고 하는데, 관청의 권한이 있는 경찰서장은 '국민의 꽃'이라 부르면 어떨까.

승진 후 홍보담당관 임무를 마친 나는 경북 의성 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며 명실상부한 국민의 꽃이 되었다. 서장은 관할구역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 실정에 맞는 치안을 독자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경찰에 입문하여 이십오 년만이다.

그동안 국민의 꽃을 피우기 위해 수많은 가시덤불과 늪이 있었다. 그런 순간들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제 나름의 치안 행정을 소신대로 펼칠 기회를 주는 듯하다.

예와 의의 고장 의성! 누구에게나 그렇듯 초임지는 남다른 감회를 불러온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곳이 자신의 처가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석별의 정이 묻기도 한다.

하지만 도심에서 자란 나에게 초임지는 마치 고향처럼 포근한 곳이었다. 봄이면 복숭아꽃, 살구꽃이 앞다투어 피고 여름이 시작되면 마늘이 풍성하고, 가을이면 안계평야의 누런 들판에 풍년 바람이 지나가는 싱그러운 고장이다.

취임사에서 '백친천공 만객감동'을 강조했다. 인심 좋은 시골 군 단위의 경찰서인 만큼 치안부담은 크게 없으리라 생각했다. 정이 오가는 곳이니 경찰의 친절은 최고 덕목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금 천천히 사건을 해결하더라도 친절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공손하면 안 될 일이 없다. 백 사람에게 친절하고 천 사람에게 공손하면 만인이 우리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부임하는 날만 비가 오지 않았지. 거의 매일 비가 온 것으로 기억한다. 장마가 있던 칠월 말경에 지방도에 큰 바위가 떨어져 복구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현장에서 파출소장과 면 직원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무너져내린 토사를 제거하고 곧 떨어질 듯한 바위를 덜어내고 있었다.

유관기관이 협력하여 일하는 모습을 보니 믿음이 갔다. 이대로만 한다면 앞으로 군민의 치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의성에서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은 '행복 의성'이라는 책을 발간한 일이다. 이백 명 남짓 되는 모든 직원이 일구어낸 결과물이었다. 책자 안에는 우리 경찰서의 치안 시책 홍보, 주민과 겪은 미담, 본인의 좌우명, 장기자랑 등, 우리의 사연을 담았다. 그 책은 표창의 부상으로 주거나 경찰서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추석 명절 비상 근무 중에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소회의실에서 편집과 교정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두 사람의 사연이 아니라 모두 동참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편집했기에 의미가 있었다.

당시 천 부 정도를 인쇄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지금도 서재에 보관 중인 '행복 의성' 한 권이 십여 년 전의 과거를 조명하고 있다.

부임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째가 되던 해, 정든 의성을 떠나 나는 경북경찰청 참모 부서로 복귀했다.

8. 독도에 눈물짓고, 무궁화는 내려놓고

새로 맡은 참모 보직은 독도와 고속도로 순찰대를 비롯해 신경 써야 할 부서가 많았다. 별을 헤아리며 출근해도 아침 식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아침은 냉동 떡을 녹여 먹었다. 출근하자마자 냉동실의 떡을 끄집어내어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두면 관내 현황파악이 끝날 무렵 적당히 녹는다. 먹음직스럽게 녹은 떡은 나의 훌륭한 아침 식사였다.

담당업무의 범위가 워낙 넓어 일찍부터 보고를 받는 데도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생소한 업무여서 그랬던 것 같다. 독도는 국토의 막내라 그런지 늘 애가 쓰였다. 가끔 풍랑이나 예기치 않은 기계 고장으로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할 때면 피가 바짝바짝 마를 정도로 애간장을 녹였다.

고속도로에 눈이 내리면 얼어붙을까 걱정, 비가 많이 와도 근심, 전경으로 복무하는 대원이 아파도 마음을 뺏기고, 성인봉에 등산객이 조난되면 생사여부에 노심초사했다. 임금 체불로 붉은 머리띠를 두르면 눈물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중요 행사에 헬기가 못 떠도 안절부절, 비가 내려야 할 시기에 가물어도 농민만큼 가슴을 졸였다. 지금은 여러 명으로 업무가 분담되었지만, 그때는 나와 함께 일하던 대장만 무려 일곱이었다.

휴가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하지만 민중 지팡이의 휴가는 일반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중요부서나 치안 수요가 많은 곳에 있을수록 떠나기가 쉽지 않다. 설령 떠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는 항상 부산과 포항이었다. 부모님과 처가 부모를 뵈려고 휴가계획을 그렇게 세운 것이다. 아내는 다른 사람도 으레 휴가를 그렇게 보내는 줄 알았단다.

언젠가 아프시다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서 가방을 챙기고 계셨다. '아프시다더니 어딜 가려고 짐을 챙기세요'라고 여쭈었더니 사촌들과 놀러 가는데 여행 갈 때는 아픈 병도 낫는다고 하셨다. 여행은 병상의 환자도 춤추게 하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인지 여름 휴가차 집에 온 나는 갑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관서장을 할 때 보다 참모 보직일 때가 심적 부담이 적어서였다. 집사람도 흔쾌히 동의했다. N비라에 우수 가이드 큰아들을 앞 좌석에 앉히고, 어머니와 아내, 둘째가 뒤에 앉았다. 공간이 넓지 않아 다소 불편했으리라. 더군다나 어머니는 팔순 고령이 아닌가?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자체가 즐거웠다. 고흥은 생각보다 멀었다. 예고 없이 떠난 여행이라 숙박지를 정하지 못했다. 차의 주유 게이지도 하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은근히 걱정이 밀려왔다. 어렵게 주유소를 발견했는데 정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름을 가득 채우려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벌교 부근에서 헬기 사고로 인해 고흥과 순천 일대에 모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일 났구나 싶었다. 오늘 밤 어디 묵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내는 항상, 기름은 넉넉하게 채우고 다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터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외나로도로 들어갈 때 내나로도 끝자락에 있던 언덕 위 하얀 펜션을 기억해 두었다. 펜션에 도착하니 촛불과 희미한 랜턴 불빛만 스며 나왔다. 주인을 만나 하룻밤 쉬어 갈 방이 있는지 물었다. 평소 비수기에 십오만 원 이상 받는데 오늘은 정전이라 팔만 원에 줄 수 있다고 했다.

저녁도 못 먹었고 가족들이 지친 상태라 서둘러 숙박비를 지불했다. 촛불 한 자루를 들고 안내하는 방으로 갔다. 창문을 열고 풍광을 보니 활처럼 휘어진 시골 항구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달빛에 비치는 어촌마을의 빨간 지붕이 인상 깊었다. 동화 같은 풍경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전개되었다.

저녁은 여의찮아 라면으로 해결했다. 시장했던 터라 꿀맛이었다. 조금 모자라는 양은 시골 가게에서 사 온 맛동산으로 충당했다. 물이 나오지 않아 씻기가 불편했고 식수도 배급을 받았다.

오는 날이 장날이었다. 우리는 준비 없이 떠난 탓에 새삼 전기의 소중함과 문명 밖의 생활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아들은 다락방, 어머니, 아내와 나는 아랫방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내나로도의 품속에 안겨 잠들었다.

고흥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마 목요일쯤 되었지 싶다. 여름휴가 나흘째였다. 그날따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정이 지날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우리 직원의 사고 소식이었다. 꿈이라면 좋으련만 확연한 현실이었다.

비몽사몽 속에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휴가를 반납했다. 새벽에 경찰서로 복귀하여 조용히 사고를 수습했다. 민중 지팡이의 휴가, 참 쉽지 않다. 그래도 어머니와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내 마지막 보직은 대구 성서경찰서장이다. 이곳 분위기는 예상과 달리 구성원들이 여기서 근무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자기의 직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인의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루라도 빨리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Pride 성서 Bravo 성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제시했다.

떨어진 사기를 올려 성서경찰서의 직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우리 직장에서 신나게 일하는 풍토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직무만족도 최하위 그룹에 처져 있던 분위기가 최상위 그룹으로 올라갔다. 우리 노력으로 되지 않는 부분은 실태 파악을 해서 상급부서에 건의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배우자를 동참시켜 축하를 해주었다. 차츰차츰 우리 일터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신명 나게 일하다 보니 어느새 퇴직이 눈앞에 왔다. 경무관 서장제도가 생기면서 다른 서장보다 한두 달쯤 앞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년퇴임식을 몇 시간 앞두고 서장실 밖에서 고함이 크게 들렸다. 나가보니 민원인 한 분이 서장 면담을 요구하며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분을 서장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악수하며 가만히 얼굴을 살펴보니 구면이었다. 종전에 사고 당시 영상까지 보며 담당자, 팀장 등과 여러 번 터치한 사건의 당사자였다.

증거자료가 존재하고 그 이상 논란의 소지가 없는데도 그분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건 경위를 경청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충분한 얘기를 들었는데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며 그칠 줄 몰랐다. 퇴임식이 임박해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들어왔다. '우리 서장님 오늘 퇴임하는 날입니다.'라고 알려주자, 그때 서야 머리를 긁적거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바쁘신데 힘없는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주어 고맙다'라며 인사를 했다.

퇴임식을 마치고 현관으로 나오니 바람이 찼다. 직원들이 추운 날씨에 두 줄로 서서 환송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에서 악수를 다 했는데 정이 들어 이러는 것일까. 예를 다하려고 작별 인사를 하러 나온 것 같다.

무언가 인사말을 하면 길어질 것 같아 거두절미하고 두 번 큰절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먼저 청사와 와룡산자락을 보고 큰절을 올렸다. 재임 기간 중 대과 없이 떠나게 해 준 고마움의 표시다.

이번에는 양쪽으로 늘어선 직원을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한 해 동안 묵묵히 따라준 호의에 대한 감사의 답례였다.

이렇게 나는 삼 십여 년, 정들었던 무궁화를 내려놓았다.

9.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어머니께서는 내가 현직으로 있던 갑오년 동짓달 초사흘에 우리 집으로 오셨다.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자 선친 기제 일이어서 우리 자식들에게는 특별한 날이다. 물론 갑자기 오신 건 아니다. 그해 추석, 가족회의에서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하면서 성사된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추석 비상 근무를 하느라 고령 관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사전에 어떤 논의도 하지 않았다. 다만 타향살이로 선친을 모시지 못한 데 대한 일말의 서운함이 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기는 했다. 연유야 어쨌든 아내가 고마웠다.

시어머니를 자청해서 모시겠다니 이 어찌 고맙지 아니한가? 아내에게 그 말을 처음 듣고, 비로소 나도 장남 구실을 하게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매제가 쉬는 날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의 소지품 중에 은행 통장 하나가 들어 있었다. 잔액은 단돈 만 원이 넘지 않았다.

대구에서의 첫날밤은 모두 선잠이었다. 치매 때문인지, 낯선 환경에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지, 방과 화장실을 제대로 찾지 못하셨다. 다음날 A4용지에 '이달수 방', '화장실'이라고 매직으로 크게 적어 붙여 드렸다.

성탄절 무렵,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누적 관객 삼백만 돌파를 눈앞에 두었다. 이런 영화를 어머님과 보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인터넷으로 예약했다. 그런데 주말의 교통상황을 잘 예측하지 못해 한 시간이나 늦게 극장에 도착하고 말았다.

관계자에게 읍소한 끝에 간신히 두 개의 좌석을 확보하고 나는 자리가 없어 통로에 서서 보았다. 영화에서 할머니가 유품을 태우며 '할아버지 먼저 가서 나중에 나 데리러 와요. 열네 살에 시집와서 열두 명을 낳았는데 여섯 잃고 여섯 남았소. 죽은 여섯 자식은 내의도 못 사 입혔는데 저승 가서 애들 만나면 어미가 사주더라고 입혀 주소….'

할머니의 이 대사에 극장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어머니도 가끔 '부모님 생각하면 가슴이 저린다. 따뜻한 양말 한 켤레 못 사 드리고….' 라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는 영화의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노래 중에 '방귀 송'이 있다. 처녀 시절, 옆집에 사는 '이순이' 언니 집에 놀러 갔더니 험상궂은 형부가 이 노래를 부르더란다. 노래와 함께 어머니의 넋두리가 있어 언제 들어도 웃음이 난다.

'방귀, 방귀 뀝시다. 방귀, 방귀 뀝시다. 방귀 잘 뀌는 사람, 신체 건강하고, 방귀 못 뀌는 사람 신체 약하다.'

형부는 시커멓게 생긴 만주 사람이었는데 부를 노래가 없었는지 하필 그 노래를 부르니 너무 우스워서, 참고, 참다가 사립문을 나오고 나서야 실컷 웃었다는 넋두리다. 아마 그 형부가 못생겨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기 같으면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방귀 얘기만 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어머니의 넋두리는 한결같았다. 우리 식구는 방귀라는 두 음절에 관대하고 환호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방귀라는 말만 나오면 자지러지게 웃음보를 터트리곤 했다. 엄마는 치매가 많이 진행되었을 때도 이 노래만큼은 잊지 않고 부르시며 웃음을 유지했다.

어머니는 치매가 있었지만, 순발력이 대단하셔서 대화 중에 가끔 감동을 주는 일이 많았다. 일전에 야심한 시간에 귀가했는데 거실에 나와 계신 어머니께 아직 안 주무시네, 배가 출출해서 그런가요, 하며 들어갔더니 '아들이 아직 안 왔는데 잘 수가 있나.' 하셨다.

아내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간식을 챙겨 드리며 어머니 심심했지요, 하며 여쭈니 '그래, 심심했다. 이제 나는 너 없으면 못 산다.' 하시더란다. 아내는 어머니의 이 말씀을 듣고 방전 일보 직전에 다시 충전되며 없던 힘이 생기더라고 했다.

우리는 어머니를 삼 년간 모셨다. 그간 아내는 최선을 다했다. 종이 기저귀도 쓰지 않고 부드러운 헝겊 기저귀를 일일이 빨아서 사용했다. 목욕탕에도 모시고 가며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보살폈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한계가 왔다. 아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치매 어머니를 모시는 건, 무리라 판단했다. 어머니가 맨정신이라면 자식이 아플 만큼 뒷바라지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돌봄을 받기로 어렵게 의견을 모았다.

나는 요양원 입소를 결정하고 몇 날 며칠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기는 일이 도의에 맞는 일인지, 번뇌가 이어졌다. 그냥 시골 어디에 방 하나 얻어서 둘이 살까, 생각도 해 봤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왜, 나라에서 효도비까지 세워가며 효자를 기리고 효행을 칭찬하는지, 유년 시절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의 자식은 당연히 효자여야 하고 실제로 모든 자녀는 효자, 효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나는 입관식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국화 꽃잎을 한 잎 한 잎 따서 어머니를 곱게 단장해 놓으셨다. 마치 금방이라도 천상으로 날아갈 관음보살 같았다.

비통한 자식들의 마음을 밝고 평온하게 해 준 장례지도사 덕분이다. 나는 어머니의 이마를 만졌다. 이미 온기는 사라지고 차가웠다.

슬퍼할 겨를도 잠시였다. 장례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지 걱정이었다. 왜냐면 연일 사망자가 한꺼번에 많이 나와 상주가 원하는 날짜에 장례를 치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화장장 사정이 허락해야만 비로소 출상할 수 있었다. 수도권에서 오일장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지만, 선친께서 친히 마중을 나오셨는지 무사히 삼일장을 마치고 영천 국립호국원에 아버지와 합장했다.

장례를 마친 후 나는 SNS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어머니의 사진을 올려서 삼 년간 추모 기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모실 때 아내가 서문시장에서 맞추어 드린 옥색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파란색을 남달리 좋아했고, 당신이 가장 즐겨 입으시던 옷이었다.

9. 장모님은 그리움, 나는 바람에 날리는 들꽃 향기여라

장모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 배경은 조금 극적이다. 신축년 한가위 다음 날, 장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소통이 되지 않는다. 사위인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딸의 안부도 묻지 않았다. 무덤덤하고 감정이 전혀 없었다.

아내에게 장모님이 이상하니 처제와 통화해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 새 옷을 입고 보행기를 끌고 나와, 집에 가자고 했단다. 치매가 의심되었다. 우리는 처제에게 당장 내일 장모님을 모셔오라고 일렀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우리는 장모님을 동네 피부과에 모시고 갔다. 발톱무좀이 생겨서였다. 처방을 받고 바로 치매 검사를 하기 위해 단골 내과에 들렀다. 몇 가지 문진과 진찰을 해보더니 MRI를 찍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내과 선생님은 우리 주치의나 다름없는 분이라 서둘러 검사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장모님 뇌 사진을 찍고 초조하게 판독을 기다렸다. 잠시 후 보호자를 불렀다. 아내와 둘이 들어갔는데 뇌경색이란다. 즉시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걸어서 들어왔는데 입원하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곧장 파티마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입원 수속을 끝내고 나니 저녁 여덟 시 반이었다. 그 이후 장모님은 약 열흘 정도 입원 치료를 하고 우리 집에 오셨다.

장모님을 이년 반쯤 모시면서 곡기를 끊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인근 병원에 입원도 한번 했고 처방을 받아 약으로 회복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수저를 놓으신 채 이틀간 집에서 모시는데 이승잠을 잤다. 아내는 자식으로서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는 그 상황을 힘들어했다.

우리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가까운 병원으로 모셨다. 정해진 시간에 매일 특별면회를 했다.

나는 장모님과의 이별이 성큼성큼 다가옴을 느꼈다. 멀리 있는 가족에게도 연락해서 생전에 얼굴을 한 번씩 보도록 했다. 아내가 요양사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목욕을 시키고 나니 우리 마음도 개운해졌다.

갑진년 새해가 밝은지 스무이튿날 어슴새벽, 임종할 때가 가까웠으니 얼른 병원에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짐을 챙겨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장모님의 호흡은 가빴으나 평온해 보였다. 아내와 나는 장모님 손을 꼭 잡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엄마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엄마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우리는 장모님 저승길이 외롭지 않게 마치 하늘에 기도하듯 계속해서 읊조렸다. 어느새 아내의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 눈에도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예닐곱 번을 반복하니 장모님 눈가에도 이슬이 두어 방울 맺혔다. 잠시 뒤 '임종했습니다.'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서야 이승을 떠난 줄 알았다.

우리 아파트 현관 옆에는 사이좋은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산수유나무와 동백나무가 다소곳이 터 잡았다. 둘은 위, 아래 바로 이웃 사이지만 환희의 순간에 뜨거운 포옹을 나누지는 못했다.

어쩌면 두 꽃이 만나는 일보다 산수유 붉은 열매와 빨간 동백꽃이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한 번만이라도 그랬으면 싶었다. 장모님이 살아 계시던 지난해 섣달부터 품었던 내 바람이었다.

장모님은 붉은 산수유를 꽃으로 알고 좋아하셨다. 지팡이를 짚고 출입문을 나서다가 허리 한번 쭉 펴고, '아이고, 저 꽃이 참 예쁘네. 무슨 꽃이고?' 붉디붉은 산수유를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다.

장모님이 소천한 후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집을 나서며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곳을 쳐다봤다. 봄기운을 듬뿍 마셔서인지 동백꽃망울은 처녀 풋 가슴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건만, 산수유나무 붉은 구슬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남아 있지 않았다. 세차게 내린 '입춘 맞이 겨울비'에 떨어진 걸까.

그토록 소망하던 산수유와 동백꽃의 상봉은 없었다. 꽃과 꽃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붉은 산수유와 동백꽃망울의 짧은 동거는 엄연히 있었다. 두 나무의 사랑은 꽃과 꽃이 아니라 열매와 꽃망울의 애잔한 사랑이었다. 머잖아 그 사랑은 별리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다를 바 있겠는가. 산수유의 정열적 사랑이 동백꽃으로 투영되듯 장모님은 이생의 버팀줄을 놓은 대신, 하늘이 내려 준 구원의 줄을 타고 천상의 나팔꽃으로 환생하리라.

두 분이 하늘로 떠난 후,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삶은 '들꽃처럼 무심히 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향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가 곧 인생이라면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나만의 향취를 하늬바람에 날리고 싶다.

비바람 맞지 않고 눈보라 없이 핀 꽃이 나비의 날갯짓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모과 옹두리 깊은 사연에 짙은 향이 배어나듯 질곡의 세월에 담금질한 향내가 멀리멀리 퍼져가리라.

비록 내 인생길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아픔을 딛고 일어서 제복에 꽃을 피웠다. 노년에는 두 엄마를 번갈아 모시며 천상의 나팔꽃 환생에 일조했으니 그나마 사람 도리는 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꽃향기면 어떻고, 사람 향이면 어떠하랴. 문자 향이 물씬 풍기면 덩실덩실 춤을 추겠다. 연하든 진하든 개의치 않으마.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선사하는 향기라면 두 손 모아 날리련다. 부디, 내가 이곳에 오기 전보다 다녀간 뒤가 더 멋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천직을 통해 국민의 꽃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이제 내가 거둔 꽃씨를 누군가에게 돌려 드리고 싶다. 그 꽃씨가 희망으로 다시 피어 지구촌에 흩날리면, 제법 사람 살만한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가자지구처럼 뒤엉키지 않는 세상, 아낌없이 기쁨 주며, 보람의 향기가 가득한 그런 세상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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