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여인열전 ③장녹수(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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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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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총애로 인해 장녹수에게 권력이 모이는 모습을 묘사한 기록.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25일 갑오 2번째기사


조선시대 내명부 여인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적 기록이 승자에게 경도돼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 하지만 장녹수의 경우는 그녀가 행한 악행의 내용이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어서, 그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해석할 여지는 어우동이나 장희빈처럼 높지 않을 듯 하다. 장녹수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연산군은 그의 말이라면 모두 들어주었다. 그러니 권력의 무게추는 장녹수에게로 기울 수 밖에 없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곳간의 재물들을 모아 그의 집으로 보냈고, 온갖 귀한 보물들을 보내 그 마음을 기쁘게 했다. (장녹수가 취한) 노비·전답·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25일·사진)” 온갖 뇌물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실록은 장녹수가 연산군을 아이처럼 조롱하고, 노예처럼 대했다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승은까지 입은 궁녀를 모함해 목숨까지 빼앗아 버리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궁녀 전향과 수근비에게 투기의 죄목(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4월 25일)을 덮어 씌워 귀양을 보내고, 목숨까지 빼앗아 버린 사건이 그 것이다. 이 일로 전향과 수근비의 가족들까지 애먼 죽임을 당하게 된다. “(전향과 수근비를 능지한 것은) 장녹수(張綠水)가 참소(讖訴·악한 말로써 남을 헐뜯고 고소함)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습이 고와서 녹수가 마음으로 시기해 밤낮으로 왕에게 참소해, 두 사람의 부자형제(父子兄弟)를 하루아침에 다 죽였다.(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6월 9일)” 전향과 수근비에게 내려진 형벌은 ‘능지(陵遲)’형으로 죄인을 죽인 뒤 시신의 머리와 몸, 팔, 다리를 토막내 전시하는 극형이다. 두 궁녀의 머리와 사지는, 본보기를 삼는다는 이유로 나라 곳곳에 전시하게 했고, 그들의 친족을 귀양 보낸 뒤 남은 빈 집에는 죄명을 적어 놓은 비석까지 세우게 했다. 결국 이들의 주검은 갈기 갈기 찢겨져 외딴 섬 등에 흩어져 묻히게 된다. “전향·수근비의 머리와 팔다리는 진도(珍島)에 묻고 돌을 세웠으나, 그 주검이 하나는 경원에 있고 하나는 강계에 있는데 또한 돌을 세우리까?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9일 )” 한 신하의 물음에 대해 연산군은 전향과 수근비의 악명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주검이 묻힌 곳에 비석을 세우도록 명한다.



이러한 모든 지시는 연산군이 내렸지만 그 뒤에 장녹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녹수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변한다. 그의 여종까지 기세등등해 진다. 동지중추부사 이병정(1742~1804)은 어느날 이웃의 다툼을 말리던 과정에서 장녹수의 여종에게 욕을 얻어먹고는 이를 괘씸히 여겨 형조에 이를 제소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수사기관을 총동원해 이병정을 잡아들이게 한다. “어느 사인(士人·이병정)이 장숙용(장녹수)의 집종과 서로 말다툼하다가… 매우 공손하지 못하다. 곧 의금부 낭청으로 하여금 내관과 함께 잡아오게 하라.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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