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강원도 순행 목적은 상원사 중창 낙성식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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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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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세조의 강원도 순행(巡幸)⑤
◇평창 오대산 상원사. 사진=강원일보 DB




세조는 금강산의 4대 고찰 중 하나로 꼽히는 외금강 ‘유점사’를 금강산에 있는 사찰 가운데 마지막으로 방문하지만 이전(④편 참고)처럼 서기(瑞氣·상서로운 기운)가 나타났다는 등의 특별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윤3월6일) 실록을 살펴보면 그러한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햇무리가 목격되는데 이날은 비가 내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사흘 후 세조는 금강산을 떠나면서 자신이 머무는 동안 금강산에서 상서로운 일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이유를 들어 사찰들에 다시 한번 선물을 내린다. 호조에 “해마다 산중에 있는 절에 쌀 100석과 소금 50석을 내려 주게 하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세조의 어가행렬은 간성 명파역과 토성, 양양 낙산사, 강릉 연곡리와 구산역 등을 거쳐 1466년 윤3월16일 오대산에 도착한다. 실록에는 오대산을 대산(臺山)이라고 표기하며 세조 일행이 ‘대산 동구(臺山 洞口)’에 머물렀다고 쓰고 있다. 세조는 오대산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효령대군 이보와 영응 대군 이염, 물거윤 이철, 사산군 이호, 영의정 신숙주, 상당군 한명회, 좌의정 구치관 등을 거느리고 상원사를 찾는다. 이날 부처의 사리(舍利)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곳곳에 나타나는 신비한 일(사리 분신·舍利分身)이 또다시 일어나게 된다. 이에 세조는 군대 안에 있는 범죄자를 사면토록 지시 한다.(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윤3월17일) 실록은 세조의 상원사 방문 이외에는 이날 열린 ‘중요한’ 행사와 관련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날은 상원사 중창이 완료되고 이를 기념하는 성대한 낙성식이 열린 날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상원사 중창 낙성식과 관련해서는 세조를 수행하던 신하 중 한명인 김수온(1410~1481년)이 1475년(성종 6년) 어명을 받아 작성한 ‘상원사중창기’와 민지가 쓴 오대산사적기의 ‘아조본산사적’ 등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세조의 강원도 순행 마지막 목적지는 바로 세조가 원찰(願刹·왕실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건립한 사찰)로 삼은 오대산 상원사였다. 이날 이후 금강산과 오대산으로 이어진 강원도 순행의 어가행렬은 강릉 거화전, 횡성 실미원, 원주 사기막동 등을 거쳐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미니해설

◇국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사진=문화재청


상원사 중창=세조 10년(1464년) 세조의 병환이 10여일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자 왕비 정희왕후가 신미, 학열스님 등을 불러 세조의 원찰 건립에 대해 논의한다. 이에 신미스님이 화재로 피폐해진 오대산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하고, 왕실의 허락을 받아 실행에 옮긴다. 상원사의 중창이 시작 된 이후 세조의 건강이 회복되면서 대대적인 불사가 진행된다. 신미스님 등은 1964년 12월18일에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쓰고 중창을 위한 모연에 나섰다. 이듬해 본격적인 복원공사에 돌입, 1466년 윤3월에 중창이 완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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