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청탑 그릴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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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김수영문학연구회 소속 회원들
시인이 시론 발표한 ‘청탑 그릴’ 방문

자유 갈망 그의 시적 마음 형성했던 곳
경험의 원천 되는 자리 찾는 일 소중해

부산은 다른 세상과 접속하는 공간
맹목적 서울 바라기보다 세계와 호흡을


최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청탑 그릴’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올라와 있는 ‘청탑 그릴’은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부산의 대표적인 고급 레스토랑 건물로 화랑을 겸하기도 하였는데, 1층 칵테일 살롱은 1950~1960년대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들렀던 곳이다. 유명 음식점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서면의 ‘호수 그릴’ 범일동의 ‘석화 그릴’과 더불어 3대 경양식집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모두 근대 문화유산 목록으로 올랐다. 하지만 그 원형을 보존한 경우는 없으며 변화의 물결 속에서 기억의 흔적만 남기고 덧없이 사라졌다. 이러한 처지에 새삼스럽게 ‘청탑 그릴’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김수영문학연구회’에 소속된 학자, 비평가, 시인들이다.

김수영 시인과 부산의 연관성은 이미 그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 현장이 거제리 포로수용소였다는 사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우리 부산의 시각에서 ‘피란수도’라는 위상 정립에 그치지 않고 그 특이성과 세계성을 풍부하게 해명하는 자료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을 지닌다. 즉 김수영이 서면에 있던 ‘서전병원’(스웨덴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군의관 등과 가깝게 지내는 한편 〈타임〉, 〈라이프〉 등의 잡지를 통해 세계를 대면하면서 그의 문학적 원천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무엇보다 김수영의 시인다운 감수성에 기인하겠지만 부산이 세계사적 장소라는 의미와도 무연하지 않을 터인데 이를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수영문학연구회’가 어느 정도 자각한 셈이다. 이들 또한 부산을 단지 제2 도시로 인식하는 데서 성큼 나아간 모양새다.

‘청탑 그릴’은 김수영 시인이 1968년 6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인 4월 펜클럽이 개최한 세미나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시론인 ‘시여 침을 뱉어라’를 발표한 장소이다. ‘김수영문학연구회’ 회원 가운데 유독 이 장소를 찾아 나선 이들은 김수영 문학의 진수가 담긴 이 발표문이 부산과 연관되는 대목을 크게 주목한 까닭이다.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가 말하고 있는 광복동의 ‘밀다원 다방’에 못지않은 의의를 부여하면서 표지석이면 더 좋겠으나 길바닥에 사실을 새겨 기억할 수 있는 계기라도 마련하자는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포로수용소에서 놓여난 뒤에도 김수영은 한두 해 더 부산에서 매우 궁핍한 세월을 보냈다. 자유와 사랑을 갈망하는 그의 시적 마음이 죄다 부산에서 형성됐다.

부산이 다른 세계와 접속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김수영만 아니다. 일제가 지배하던 시기는 관부연락선으로 해협을 잇는 스케일을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 해방으로 대양이 열리고 한국전쟁은 세계 속의 부산을 견인했다. 김수영을 생각하면서 또한 박인환을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럽다. 친구이기도 한 두 사람의 경쟁하던 관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한국전쟁 시기 박인환이 대구를 거쳐 부산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 당시 그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모더니즘을 심화하고 확장하는 계기를 얻는 한편 신문사를 나온 후엔 전쟁으로 부산으로 이전한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해 실질적인 세계 경험을 획득한다. 특히 1955년 그가 사무장으로 ‘남해호’를 타고 3개월에 걸쳐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여행한 사실은 한국이 부산을 매개로 대양적 전환(oceanic turn)을 이룩한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박인환은 태평양을 무대로 한 해양 시와 아메리카 여행 시편을 남겼다. 또한 ‘19일간의 아메리카’라는 기행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여행을 뒤로 하고 이듬해인 1956년 3월 심장마비로 3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김수영은 50을 넘기지 못했고 박인환은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으니 두 시인에 대한 애도의 염(念)은 그를 기리는 문인들에게 여전하다. 서울 도봉구에 ‘김수영문학관’이 있고 강원도 인제에 ‘박인환문학관’이 있어 이들을 연구하고 전시하는 장치는 잘 마련돼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먼저 주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함에도 ‘김수영문학연구회’가 최근에 보인 활동처럼 경험의 원천이 되는 자리를 찾는 일이 소중해 보인다. 박인환이 근무한 ‘대한해운공사’는 1957년 주식회사로 전환되고 1968년 민영화를 거친 뒤에 1980년 ‘대한선주’, 1988년 ‘대한상선’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88년 한진해운에 합병됐다. 모두 한국이 근대화하면서 세계와 접속한 부산의 역사를 담는다. 이 가운데 박인환 시인이 있으니, 그의 요절이 안타깝기만 하다. 김수영과 박인환을 기억하더라도 우리 부산은 그저 반도의 궁색한 피란지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 보인 근대의 모험처럼 부산은 세계사적 장소이자 우리 사회의 미래를 예고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스스로 서울 바라기의 맹목이 되지 말고 세계와 호흡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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