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궂은 날씨에도 10여 명 참가
“바다 도시 부산은 맨발 걷기 최적지
지자체의 적극 행정과 관심 필요해”
스산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한겨울 바닷가. 당초 예상보다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거센 바람마저 갈피를 잃고 춤을 췄다. 우산이 뒤집히지 않게 부여잡은 우산대를 라디오 주파수 맞추듯 이리저리 돌려야 할 정도였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20일 오후. 인적이 사라진 부산 사하구 다대포해수욕장 해변에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맨발의 중년 10여 명이 모였다.
단체명이 적힌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기념 촬영을 마친 이들은 간단한 구호를 외친 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800여m에 달하는 해변을 한 차례 왕복한 이들은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신 후 해변 입구 세족장에서 간단히 발을 씻고 헤어졌다.
이날 대한민국맨발학교 부산지회(부산맨발학교)의 2024년 첫 정기모임이 열렸다. 2019년 1월 첫발을 내디딘 부산맨발학교의 만 다섯 살 생일이기도 했다. 단체 맨발 걷기에 앞서 다대포 백사장에서 하려던 창립 5주년 기념행사를 인근 커피숍에서 가졌다.
부산맨발학교 회원들은 평소 각자 편한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맨발 걷기를 한 후 단체대화방(단톡방)에 사진을 올려 인증받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100일, 1000일, 3000일을 실천하면 대한민국맨발학교에서 상장과 배지, 휘장을 전달한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회원도 여럿이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부산맨발학교는 회원들의 맨발 걷기를 장려하고 격려하기 위해 ‘어싱 투게더’라는 이름으로 함께 걷는 행사를 여러 차례 열었다. 맨발바닥을 땅에 직접 닿게 하는 행위를 뜻하는 어싱(earthing·접지)은 맨발 걷기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전달하는 용어로 통한다. 지표면의 에너지와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여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려는 소망이 담겨 있다. 부산맨발학교는 그동안 오륙도 해맞이공원, 회동저수지 둘레길, 수영강변, 동백섬 등에서 어싱 투게더를 진행했다.
이날 실내에서 5주년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해변을 휘젓던 비바람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회원들이 맨발로 다대포 해변에 섰을 땐 ‘이런 날씨에 맨발 걷기를 강행하는 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온이 많이 낮거나 비가 오는 날 야외에서 맨발로 걷는 게 쉽지 않은 건 사실이죠. 하지만 이런 날 맨발 걷기 효과는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큽니다.” 부산맨발학교 최명솔(62) 지회장의 말이다. 최 지회장에 따르면 추운 날이면 차가운 발바닥을 통해 뇌를 포함한 신체 각 부위에 전달되는 기운의 효과가 더 크다고 한다. 한겨울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같은 원리라는 것이다.
우중 맨발 걷기는 어떨까? 최 지회장은 여기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주장을 이어 갔다. “사람 몸에 있는 양전자가 지표면의 음전자를 받아들여 신체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게 맨발 걷기의 ‘어싱 효과’입니다. 빗방울이 지속해서 지표면을 때리면 음전자가 자극을 받아 활성화됩니다. 평상시보다 음과 양의 교류가 더 강하게 진행된다는 뜻이고요. 결과적으로 기온이 낮은 한겨울 비 내릴 때가 맨발 걷기의 어싱 효과를 최대로 누릴 수 있는 최적기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비바람을 뚫고 다대포해수욕장 맨발 걷기에 참석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6년째 부산맨발학교를 이끌고 있는 최 지회장은 1700회 기록을 보유한 맨발 걷기 마니아다. 개별적으로 맨발 걷기를 실천하던 뚜벅이들을 한데 모은 조직가이기도 하다. 이날 모임 사회를 본 정현섭 씨는 부산 1호 공립 대안 학교인 송정중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송정중학교는 당시 전교생이 매일 20분씩 맨발 걷기를 해 부산 교육계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황미숙 씨는 금정구의 한 유치원 원장이다. 황 원장의 유치원은 4년 전부터 원아들을 대상으로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 나이별로 시간을 달리해 놀이 형식의 맨발 걷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물론이고 부모들도 좋아한다고 자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맨발 걷기를 시작한 후 아이들의 편식이 줄어들고 면역력이 강화되면서 독감 등 질병 발생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고 한다.
개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계기로 시작된 맨발 걷기는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이나 생명사랑운동으로도 발전하고 있다. 부산맨발학교 최명솔 지회장은 “맨발 걷기를 하다 보면 발바닥을 해칠 수 있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 자연정화 활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면서 “최근 유행하는 플로깅이나 줍깅도 맨발 걷기 붐이 일면서 자연스럽게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맨발학교 역시 수영강 흙공던지기 등 수질개선 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맨발 걷기 붐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다지만 지역마다 사정은 제각각이다. 대한민국맨발학교가 있는 대구나 서울숲과 대모산에서 주말마다 맨발 걷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 매년 ‘오감만족 문경새재 맨발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는 경북 문경시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향토 기업의 기부와 관심으로 10km가 넘는 등산로를 황톳길로 조성한 대전의 계족산은 ‘맨발 걷기 성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드넓은 해변을 자랑하는 해수욕장을 여럿 품고 있는 부산도 걷기 성지로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다. 부산은 ‘슈퍼 어싱’으로 불리는 바닷가 맨발 걷기를 사시사철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산맨발학교는 이런 환경을 활용해 전국의 맨발 걷기 가족들이 함께하는 행사 개최를 꿈꾸고 있다. 다행히 부산시를 비롯해 기초 지자체들도 지난해부터 지원 조례를 만드는 등 맨발 걷기 환경 조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부산의 맨발 걷기족들은 이런 분위기를 환영하면서도 적지 않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시내 곳곳에 새로 들어서는 맨발 걷기 산책로나 황톳길 등이 행정 편의적 보여주기식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판단에서다. 공원이나 등산로 일부 구간을 다듬어 ‘맨발 걷기 길’ 팻말을 달아 놓는 건 ‘(등 떠밀려)우리도 하고 있어’라고 생색내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박한 평가도 있다.
부산맨발학교 최명솔 지회장은 “맨발 걷기 조례를 만들면서도 한쪽에선 여전히 자연 흙길을 야자 매트로 덮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다른 지자체의 모범 사례를 잘 참고해 보다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