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배우가 아까운 ‘대외비’, 배우가 완성한 ‘더 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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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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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에서 3·4월은 ‘비수기’로 통합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야외활동이 많아지면서 극장가를 찾는 관객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시기에 도전장을 내미는 영화들은 나옵니다. 화려한 캐스팅으로 무장한 ‘대외비’가 전국에서 관객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주목한 ‘더 웨일’도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지난 1일 동시 개봉한 두 작품을 극장에서 만나봤습니다.

영화 ‘대외비’(왼쪽)와 ‘더 웨일’ 포스터.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제공


아쉽고 아쉬운 ‘대외비’…관객 눈은 높아졌다

“악마와 거래할 수 있다면, 롯데자이언츠 우승과 영화의 흥행 중 무엇을 거래하겠습니까?”

영화 ‘대외비’ 개봉을 앞두고 지난달 25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배우 조진웅이 앵커로부터 받은 짓궂은 질문입니다. 조진웅은 결연한 표정과 단호한 말투로 “자이언츠 우승”이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광팬’으로 알려진 조진웅과 이성민·김무열이 주연한 ‘대외비’는 1992년 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정치 누아르 영화입니다. ‘해운대의 아들’을 자처하는 해웅(조진웅 분)과 정치판 비선실세 순태(이성민 분), 부산을 꽉 잡고 있는 행동파 조폭 필도(김무열 분)가 권력 암투를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악인전’(2019)의 이원태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흥미롭습니다. 만년 국회의원 후보인 해웅은 92년 총선에서 지역구 공천을 받을 것이 유력했지만, ‘흑막’ 순태의 변심으로 다른 후보에게 자리를 빼앗깁니다. 그러자 해웅은 해운대지구 재개발과 관련한 대외비 문서를 손에 넣은 뒤 조폭 필도의 도움으로 선거 자금을 마련, 무소속으로 출마해 약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순태가 개입하면서 지저분한 정치 싸움이 본격화됩니다.

영화는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악마하고 거래하는 것” “권력을 쥐려면 영혼을 팔아야 한다”는 순태의 대사가 보여주듯, 정치와 권력은 절대적인 악(惡)으로 묘사됩니다. 유권자들을 위해 일하겠다던 해웅도 결국 타락해갑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 주인공 모두 ‘나쁜 놈’입니다.

영화의 재미도 비열한 반칙을 동원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수세에 몰린 해웅이 순태에게 반격했다가 다시 불리한 처지에 놓이고,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카드를 꺼내는 식입니다. 시나리오 작업에 꽤 공을 들인 티가 납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극의 전개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조진웅, 이성민, 김무열이라는 베테랑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관객들과 함께 웃음을 터뜨린 장면도 있고, 기억에 남는 대사도 있습니다. 부산 곳곳의 옛 모습을 재현한 배경에도 눈길이 갑니다.

영화 ‘대외비’ 스틸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하지만 대외비에서 참신함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건달이 개입하는 80~90년대 정치 공작 영화는 너무 많았습니다. 스토리가 뻔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을 향한 남자들의 욕망과 암투’를 그린 픽션 영화가 근래 들어 혹평을 면치 못한 이유기도 합니다. 이 재미없는 소재로 계속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도전정신이 의아할 지경입니다.

잘 만든 정치 누아르 영화는 잠시도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감 있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대외비가 연출하는 긴장감은 그리 팽팽하지 않습니다. 심어둔 반전들은 충격을 주기는 하지만, 뒤통수가 얼얼하거나 통쾌함을 느낄 정도는 아닙니다.

캐릭터에서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주연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긴 했지만, 전작에서 본 전형적인 캐릭터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산 사나이를 연기한 조진웅은 ‘범죄와의 전쟁’(2011)의 김판호, 정치 흑막을 연기한 이성민은 ‘남산의 부장들’(2020) 속 박통, ‘재벌집 막내아들’ 속 진양철과 닮았습니다. 김무열은 첫 사투리 연기치고는 훌륭하지만, 군데군데 억양이 어색한 대사가 있습니다.

다소 작위적인 연출도 거슬립니다. 예컨대 해웅이 재개발부지 주민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는 극의 초반 씬은 2000년대 초반 영화에서 볼 법합니다. 조폭들끼리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액션씬도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옆자리 중년 남성 관객은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CGV 실관람평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글은 “언제까지 이런 작품이 양산될는지. 배우 빼고 남는 게 없다”입니다. “배우들 연기에 무임승차하는 연출”이라는 박한 평가도 적잖이 공감을 얻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우승만큼 영화 흥행도 요원해 보입니다.

영화 ‘대외비’ 스틸컷.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272kg 거구로 돌아온 ‘미이라’ 주인공의 인생연기

‘더 웨일’은 연인과 사별한 후 자기혐오에 빠져 스스로를 방치한 끝에 272kg에 달하는 거구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 찰리(브렌든 프레이저 분)는 자신의 제자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딸을 버린 대학 강사입니다. 그러나 연인은 얼마 못가 죽었고, 신경성 폭식증으로 체중이 엄청나게 불어난 찰리는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갑니다. 온라인으로 대학생들에게 작문을 가르치는 그는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결국 찰리는 간호사 친구 리즈(홍 차우 분)로부터 울혈성 심부전 진단을 받지만, 건강 보험이 없다는 핑계로 치료받기를 거부합니다. 일주일 뒤 죽게 된다는 리즈의 말에도 찰리는 아랑곳 않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세이디 싱크 분)를 집에 초대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면 전재산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엘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찰리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쏟아냅니다. 사실 엘리는 아빠가 자신을 버린 충격으로 인간을 증오하게 된 외톨이입니다. 찰리는 그런 엘리의 내면에 남아있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문제아 취급당하는 엘리를 “완벽한 딸”이라고 칭찬하며 사랑으로 보듬어주려 합니다.

동명의 연극이 원작인 ‘더 웨일’은 사랑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과 사별의 아픔으로 자기혐오에 빠진 찰리, 절친한 친구 찰리가 죽음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음식을 가져다주는 리즈, 배신감과 증오심으로 비뚤어진 엘리.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멀리서 보면 비극’이라는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찰리, 리즈, 엘리가 될 수 있습니다.

연극이 원작이다 보니 인물들의 동선이나 대사에서 연극의 느낌이 납니다. 사랑과 솔직함, 구원에 관한 대사는 영화가 끝나고도 되새겨 볼만 합니다.

영화 ‘더 웨일’ 스틸컷. (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제공


다만 호불호가 갈릴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아빠가 뒤늦게 용서를 구한다는 설정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관객 입장에선 찰리의 감정선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또 평소 가치관에 따라 영화의 메시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억지감동을 강요하는 듯하다”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는 실관람평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혹평을 내놓는 관객들조차 브렌든 프레이저의 ‘인생연기’는 인정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영화 ‘미이라’로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그는 이혼 후 위자료 폭탄, 우울증, 영화계 고위급 인사의 성폭력, 건강 문제 등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한때 안타까운 할리우드 스타의 대명사로 통했습니다.

‘더 웨일’에서 프레이저가 보여주는 처연한 눈빛 연기는 이러한 삶의 애환이 담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 찰리의 눈동자에는 딸에 대한 사랑과 함께 과거에 대한 후회와 성찰, 목숨마저 포기한 절망감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보철 분장'으로 만든 거구를 움직이는 몸짓도 자연스럽습니다. 프레이저와 합을 맞춘 세이디 싱크와 홍 차우의 연기 역시 대단합니다.

영화 ‘더 웨일’ 포스터. (주)스튜디오디에이치엘 제공


프레이저는 지난 1월 미국 크리틱스초이스 시상식에 이어 지난달 미국배우조합(SAG)이 주최한 영화 시상식에서도 남우주연상을 연이어 거머쥐었습니다. 이달 개최 예정인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도 수상이 유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됩니다. ‘더 웨일’은 올해 아카데미서 남우주연상 외에도 여우조연상(홍 차우), 분장상 등 총 3개 부문 후보에 올라있습니다.

3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더 웨일’은 이틀간 1만 1433명의 관객을 모았는데, 독립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좋은 성적입니다. 독립·예술영화 부문 박스오피스에서도 1위에 올라있습니다.

‘대외비’는 공휴일인 개봉 당일에는 19만 명에 가까운 관객이 찾아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평일인 이튿날 관객은 4만 7000여 명에 그쳤고, 3일 현재 일별 박스오피스 2위로 밀렸습니다. 이날 박스오피스 1위는 전날 신학기를 맞아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마을’로, 하루에 6만 4000여 명이 관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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