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일 만에 무른 '기계적 법 집행' 엄포[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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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10. 오전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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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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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직역에 굴복 역사, 반복 없다"더니…결국 모든 전공의에 '면죄부'
'전공의 부재' 감수할 생각 아니었다면…'기계적 처분' 왜 그토록 강조?
뒤늦은 명분 포기에도 실리 따를지는 의문…전공의들 "사직처리나 빨리"
편집자 주
노컷뉴스의 '기자수첩'은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브리핑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故)) 이건희 회장이 아무리 미워도, 정몽구 (명예)회장이 맘에 안 들어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망하는 걸 바라는 국민이 있겠어요? (상황에 따라) 재벌 흉도 보고, '재벌 개혁'도 해야 되겠지만, 그 기업들이 무너지길 바라는 사람도 없는 거죠."

 
올 2월 초 의대증원 발표로 촉발된 의·정(醫政) 사태를 취재하며 들은 가장 흥미로운 발언 중 하나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2020년을 비롯한 정부의 '의대 증원 좌절사(史)'를 현장에서 지켜봐온 의료계의 원로는 대형 상급종합병원을 위시한 의료계를 '재벌'에 빗댔다.
 
의사 확충 등 현 정부 의료개혁 방향성에 동의하면서도 기존 시스템을 위협할 정도의 급격한 증원은 지지할 수 없다는 취지였는데, 스스로가 거대한 기득권임을 은연중에 인정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의사단체 전직 간부의 말이 일부 강경파의 객기나 도발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가하면 전공의 이탈 여파가 본격화되던 시점에 공공병원에서 만났던 한 필수의료과 전문의는 "우리는 전공의 파견 규모가 작아 과부하가 걸릴 수준은 아니다"라면서도 이 사태가 연내 해결되긴 어려울 거라 봤다. 또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전제한 채 수련병원들이 전문의 중심의 의료 제공, 수련환경의 근본적 개선을 진행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의료공백이 약 다섯 달째 이어지고 있는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룸직한 미래보다는 바람직한 지향에 가까운 희망사항이었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건 정부가 '의대 2천 명 증원'을 최초 발표하기 전 세웠을 '단계별 대응 시나리오'다. 배가 된 증원 규모를 고려할 때 4년 전을 능가하는 의료계의 반발은 충분히 예상했을 터다. 일찌감치 보건의료 재난위기 경보를 최고단계('심각')로 선포하고 전국 수련병원에는 사직서 수리금지 명령을, 전공의들을 상대로는 업무개시명령 등을 서둘러 발령한 것도 과거 선례에 비춘 '오답노트'였다는 얘기를 정부 관계자로부터 전해 듣기도 했다.
 
의료계 의견 수렴을 위해 1년간이나 의사단체와 테이블에 마주앉고도 "법대로"를 외쳐야 하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적어도 사태 초기 정부의 기조는 일관성은 있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전공의 사직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2월 16일 "이번에는 사후 구제, 선처 같은 게 없다"며 "정부는 굉장히 기계적으로 법을 집행하게 된다는 점을 전공의들께서도 십분 감안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3월 말엔 "5천만 국민을 뒤로 하고 특정 직역에 굴복하는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9·4 의정 합의를 맺으며, 전공의 고발을 취하하고 의대생들에게 국가고시 재응시 기회를 부여했던 전임 정부와는 분명히 '다른 길'을 가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에 증원에 찬성하는 의료계 일각에선 정부가 전공의 행정처분을 강행할 거라면, 절차를 미적대선 안 된다는 얘기도 나왔다. 증원 규모의 과학적 근거는 차치하고, '어차피' 정부의 뚝심대로 증원을 밀어붙일 요량이면 "국민만 보고 가겠다"는 정책의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 달란 의미였다.
 
실제로 한동안 정부는 "'의료대란'은 과장된 표현"이라며 버텼지만, 대학병원은 이내 앙상한 민낯을 드러냈다. 비상경영에 돌입한 '빅5' 등 전공의 비중이 큰 곳일수록 타격은 컸다. 고질적 문제로 지적돼온 '경증환자의 대형병원 쏠림'이 일부 완화되는 순기능도 있었으나 중증·응급의료를 지탱하는 상급병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거듭날 순 없었다. 여름이면 '줄도산'하는 병원이 잇따를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의대 교수들은 번아웃을 호소했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던 정부의 목소리는 서서히 흐려졌다. 지난달 4일에는 복귀 전공의에 한해 행정처분을 철회하겠다며 한 발 물러서더니, 이달 8일 결국 "모든 전공의에 대해 복귀 여부에 상관없이 행정처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처분의 '철회'냐, '취소'냐를 둔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실상 완전한 면죄부를 준 셈이다. '기계적 법 집행' 방침을 내세운 지 143일 만이다.
 
하반기 전공의 모집을 앞두고도 복귀율이 전체 10%를 밑돌자 꺼낸 고육책이나, 명분을 포기한 만큼 실리를 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조규홍 복지장관은 "(전공의들이) 앞으로 정부가 구축하려 하는 필수의료를 책임질 젊은 의사란 점을 감안했다"며 의료공백 해소의 시급성을 근거로 들었지만, 당사자인 전공의들은 "사직서 수리나 빨리 해 달라"는 식이다. 앞뒤가 다른 장단에 이젠 정부가 어떤 발표를 해도 '관심 없다'는 냉소도 깊다.
 
최근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거리로 뛰쳐나온 환자단체조차 이번 정부 대책을 두고 "어떤 긍정이나 부정의 입장도 내기 어려운 심정"이라고 했다. 정부의 변명처럼 중증·응급환자의 적시 치료가 그토록 중요했다면, 수련체계 연속성 확보가 '공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면 왜 진즉 합당한 조치를 못했냐는 질문이 남는다.
 
애당초 전공의 부재를 감수하며 의대 증원을 완수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막다른 곳에 몰려 의료계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는 모양새를 연출할 거였다면, 메시지 관리라도 달리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특정 직역에게 특혜를 약속하면서도 이들의 비판을 면치 못하는 아이러니는 정부가 자초한 결과다.

9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 의정갈등 관련 인쇄물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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