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 묻자 ‘5.18’ 꺼낸 북한…그래도 만난 남북 [뒷北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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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06. 오전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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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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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북한 관련 소식을 심층적으로 들여다 보는 [뒷北뉴스]를 연재합니다. 한주 가장 화제가 됐던 북한 관련 소식을 '앞면'이 아닌 '뒷면', 즉 이면까지 들여다 봄으로써 북한발 보도의 숨은 의도를 짚고, 쏟아지는 북한 뉴스를 팩트체크해 보다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남북 간의 대화는 끊겼습니다. 마지막 대화를 한 지도 5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북한은 '적대적 2국가' 관계를 선언했고, 하다하다 '오물풍선'까지 경험한 우리도 대화에는 크게 뜻이 없어 보입니다. 과연 이대로도 좋은지, 과거의 남북 대화를 끄집어내 판단의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우리나라 정부 요인 등 17명의 목숨을 앗아간 '버마 암살 폭발 사건' 이후 6개월 만에 남북은 마주 앉았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단일팀 구성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버마 사건'은 국제 사회에서 북한 소행으로 이미 결론이 났지만, 북한만은 인정하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 남한과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제3세계 외교전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습니다. '버마 사건'으로 국제사회의 '왕따'가 돼버린 북한은 남북 대화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습니다. 미국까지 끼워넣어 '남북미 3자 회담' 제안을 해온 겁니다. '버마 사건' 석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버마 사건'에 대한 사과와 남북 당사자 간 직접 대화를 역제안하자, 북한의 거부로 '3자 회담'은 없던 일이 됐습니다. 그렇게 끊어진 남북 대화는 다시 석 달 뒤 북한의 LA 올림픽 단일팀 구성 협의 제안을 기점으로 맥을 잇게 됐습니다.

1984년 4월 10일, 판문점에서 열린 1차 남북 체육회담, 초반 남과 북은 화기애애하게 인사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북측은 "체육인답게 통이 크게, 허심탄회하게... 체육인다운 투지로 모든 문제를 처리하자"고 했고, 남측은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오손도손 이야기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나"라고 화답했습니다.

1984년 4월, 1차 남북 체육회담. 북측 대표가 남측 대표의 발언을 저지하고 있다.

그런데 회담이 비공개로 전환되자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습니다. 남측은 바로 '버마 사건'과 '최은희- 신상옥 납치 사건'을 꺼내들었습니다. 두 사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조치 없이는 남북 단일팀 구성 시 선수들의 신변 안전 보장이 우려된다는 겁니다. 이에, 북측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김대중 납치' 사건 등 남한의 내부 문제를 거론하며 받아쳤습니다.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대화 사료집'의 당시 대화 기록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발언자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남측: 북한 당국은 지금이라도 버마 암살 폭발 만행에 대해 민족 앞에 시인사죄하고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성실한 대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북한 당국은 말로만 대화를 운운하지 말고 마땅히 최은희-신상옥 사건에 대해서도 그 잘못을 인정하고 이들을 지체없이 되돌려 보냄으로써 진실성과 신뢰성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북측: 남측 당국은 역사적으로 테러 모략극을 꾸며 왔으며 그것을 터무니 없이 우리와 연결시켜 인민들 손에 남북 대결 의식을 고취해왔습니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참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을 바로 광주 사태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겨레의 원한이 사무쳐있는 이 피비린내 나는 광주 사태야 말로 사상 유례 없는 민족 백정 행위이며, 온 겨레와 인류가 규탄하는 가장 처참한 대학살 만행이었습니다.

북측도 반격을 준비했습니다. 회담 당일에 남측이 대북 전단을 살포했다고 문제 삼았습니다.

북측: 오늘의 첫 체육회담을 몇시간 앞두고 벌어진 이 전례없는 삐라 살포 사건은 우리 측을 모독하고 회담 앞에 인위적인 난관을 조성하려는 매우 불순한 도발 행위입니다. 이게 뭡니까? (삐라를 들고 남측 대표단 앞에 흔들어 대며)

남측: 우리도 새벽에 그런 것이 많아요.

남측도 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내부 문제를 회담 테이블로 끌고 왔습니다.

남측: (북한의) 부자 세습 왕조 구축과 우상화는 자유 세계는 물론 심지어 북측과 같은 체제를 가진 공산국가 내부에서까지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북측: 도발을 너무 하고 있어요! (고성)

남북은 겨우 체육 관련 이슈로 넘어가서 향후 회담 장소 등을 논의한 뒤 합의까지 하지만, 북측 대표단이 외부로부터 메모를 전달받고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북측은 '버마 사건'과 '최은희-신상옥 사건'을 제기한 근본적인 이유가 뭐냐며 남측을 공격하더니, '버마 사건은 남측의 자작극'이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돌연 퇴장해 버렸습니다.

1984년 4월, 2차 남북 체육회담. 남측 대표단이 회의 도중 담배를 피우고 있다.

2차 남북 체육회담은 그로부터 20일 뒤에 열렸습니다. 당시에는 실내 흡연이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북측 대표가 남측 대표에게 담배를 권하기까지 하면서 남북은 이번에도 초반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비공개로 전환되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습니다. 북측이 모두발언에서부터 '1차 회담이 중단된 건 남측이 정치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자, 남측도 준비했다는 듯 받아쳤습니다.

남측: 평화도 민족도 안중에 없이 살인과 납치를 직업으로 일삼는 북측 당국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나 있겠는지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북측 당국이 이러한 반민족적인 도발을 자행하고서도 이에 대한 솔직한 시인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뻔뻔스럽게도 남북대화를 하자고 할 때 우리가 어느 정도 그 말을 믿어야 합니까?

북측: (버마 사건) 당시 남측 당국 대변인이 남측 최고당국자가 현지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교통혼잡으로 지체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버마 당국은 남조선의 관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남측 당국에서 폭발 사건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됩니다.

양측의 격렬한 대립은 상호 체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결국 막말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북측: 똑바로 해.
남측: 너 수석대표야! 조용히 해!
북측: 뭐, 이게 깡패야, 뭐야.
(중략)
북측: 뭐야, 이 사람이 정신병자 아냐? 도대체 말이야...
북측: 정치 발언만 하고 있어, 개백정같은...
북측: 너 자체가 반역자야! 야! 야!
북측: 너와 같은 반역인은 인민 앞에 총탄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라. 저주를 받을 것이오.
남측: 말조심해.
(중략)
북측: 민족 반역자!
남측: 누가 민족 반역자야? 김일성-김정일 부자 세습제 이야기하는 게 민족 반역자야? 김일성-김정일이 반역자야! 테러를 자행한 놈들이 반역자야!
(중략)
북측: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하는 거야 (쌍방 고성) 광주사태를 일으킨 백정같은...
남측: 그것이 바로 백정이야.

남북은 이처럼 막말을 한참 주고받다가 겨우 편지를 교환하기로 하고 2차 회담은 막을 내렸습니다. 3차 남북 체육 회담은 25일 뒤에 올렸는데, 북한이 남측이 '대북 전단'을 살포했다고 문제 삼으며 내내 분위기가 냉랭했습니다.

북측: 삐라나 좀 뿌리지 말고 나오지 삐라는 그게 고의적인게 아니고 뭐야 고의적으로... 짜가지고 나와 가지고서는.
북측: 이게 뭐야 이게 이거 보라! (남측 대표 앞으로 전단을 던짐)
남측: 누구한테 무례한 짓을 하고 있어. 이성을 좀 차려! (북측에 전단을 도로 던짐)
남측: 당신 정신병원에 가야겠구만.

당시 LA 올림픽에 구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불참하기로 하면서 북한도 이미 불참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새였습니다. 회담이 당연히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북은 그 과정에서 서로 언성을 높여 싸우면서도 농담을 주고받거나,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남측: LA 가면 내가 안내할게요. 우리 안마당이오. 내가 장사때문에 자주 다니니까.
북측: 우리가 가면 안내할 사람들이 있을 텐데 뭐.
남측: 남북 대표끼리 가야 좋지 않소. 대표끼리 싸우다 보니까 미운정 고운정 다들었다구 사실.

이후 4차 남북 체육회담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LA 올림픽 남북 단일팀 출전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3차례에 걸친 남북 체육회담은 빈손으로 종료된 겁니다. 회담 내내 남북은 만나기만 하면 싸웠습니다. 현안으로도 싸웠고, 체제와 이념 문제로도 싸웠습니다.

그런데도 남북은 꾸준히 만나서 대화했습니다. 3차 남북 체육회담 이후 5달도 안돼서 북한은 수해를 입은 남한에 수재 물자를 지원해준다는 구실로 대화를 제안했고, 남한도 이미 수해 복구가 완료된 상황이었음에도 북한의 성의를 통 크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이 성사됐습니다.

1985년 9월,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 당시 KBS 보도.

만나기만 하면 싸웠던 남북이지만, 대화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숱한 위기를 딛고 1985년에는 남북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단 동시 교환 방문이 성사되기도 했습니다.

남북이 대화를 하지 않은 지도 이제 5년이 넘어갑니다. 1971년 남북 대화를 시작한 이후 가장 긴 시간입니다. 남북은 이제 만나지도 않고, 대화하지도 않은 채 서로 빗장을 걸어잠그고 있습니다. '버마 사건'이라는 초유의 테러에도 마주 앉았던 남북이었는데, 지금은 말 대신 허공에 종잇장과 쓰레기만 주고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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