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비 ‘천조국’ 미국, 왜 군함은 못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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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25. 오후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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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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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포커스]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이 2월 27일 HD현대중공업 조선소를 방문한 카를로스 델 토로 미국 해군성 장관에게 특수선 건조 시설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조선업계 양강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앞다퉈 미국 군함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중국,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갈등 고조로 군함과 유지·보수·정비(MRO)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한국·일본·중국)에 조선업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다.

자체 건조 역량 미달로 중국과의 해양패권 경쟁에서도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조선업이 쇠락하고 생태계가 이미 무너진 상황에서 K조선이 지정학적 갈등의 틈새를 파고들며 미국 함정 시장 선점에 적극 나서고 있다.

HD현대·한화, 美 군함 시장 선점 경쟁


한화오션은 지난 6월 한화시스템과 함께 총 1억 달러(약 1380억원)에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다. 국내 조선업계가 미국 조선소를 인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1997년 미 해군 필라델피아 국영 조선소 부지에 설립된 필리조선소는 노르웨이 석유·가스·재생에너지 전문기업 아커의 미국 내 자회사다.

미국 연안무역법(존스법)에 따라 미국 본토 연안에서 운항하는 대형 상선의 약 50%를 공급하고 있다. 해군 수송함의 수리·개조 사업도 핵심 사업 영역 중 하나다. 한화오션은 이번 인수로 미 군함 MRO 사업 진출도 가능해졌다.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은 한화그룹의 필리조선소 인수에 대해 “새로운 해양치국 판도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환영하며 “한화가 미국 해안에 들어오는 마지막 한국 조선업체가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영국 군사정보업체 제인스에 따르면 글로벌 함정 시장 규모는 올해 1500억 달러(약 206조8800억원)에서 2029년 2300억 달러(약 317조2100억원)까지 커질 전망이다. 글로벌 해군 함정 MRO 시장 규모는 올해 577억6000만 달러(약 78조원) 수준으로 미국만 따지면 연간 약 20조원에 달한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연간 20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미국 해군 MRO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미국 정부는 미·중 갈등으로 함정 가동률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자국 해군 함정에 대한 MRO 물량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일부 물량을 우방국에 위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최근 미 해군 MRO 사업 입찰자격인 ‘함정정비협약(MSRA)’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으로 두 회사는 향후 5년간 미국 해군이 규정한 함정에 대한 MRO 사업 입찰에 공식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MSRA는 미 함정의 유지보수와 정비를 위해 미국 정부와 일반 조선업체 간의 협약이다. 미 해군 함정 정비에 관한 품질과 신뢰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인증이다. MSRA를 획득한 기업은 미 해군의 다양한 함정 정비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미국 필리조선소 전경. 사진=한화오션


美 해군력, 양적 경쟁에서 中에 밀려


세계 1위 군사대국 미국은 올해 국방예산이 8860억 달러(약 1200조원) 규모에 달해 ‘천조국’으로 불린다. 2차 대전 당시 한 해에 무려 1000척 이상의 상선을 생산하던 미국 조선소는 그 수와 건조 역량이 떨어지며 이제는 5개의 조선소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각 조선소의 연간 인도 척수는 평균 1.3척에 불과한 수준이다.

미국 조선업이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자유 경쟁을 중시하며 보조금을 대폭 축소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반면 중국은 자국 조선산업 육성을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해 세계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렸다.

안보와 직결된 군함 건조 능력을 갖춘 조선소도 미국 내에 없어 해외 조선소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은 제조업 기반 붕괴로 군함 건조에 필요한 산업적 역량을 잃었다.

미 의회예산국(CBO) 분석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 2년간 미국이 6년 걸려 만들어낸 양에 해당하는 17척의 구축함과 순양함을 건조했다. 디지털화와 차세대 기술 개발로 생산성을 높여 경쟁우위를 확보한 K조선에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해군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군함 숫자를 늘려야 하지만 미국 조선업이 높은 인건비와 낮은 수익성으로 쇠락하면서 글로벌 선박 수주 점유율은 0.04%에 그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2023년 글로벌 선박 수주 점유율은 중국이 59%로 세계 1위를 차지했으며 한국(24%)과 일본(13%)이 그 뒤를 이었다.

작전 능력이나 위력은 떨어지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이미 중국 해군이 미국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미 국방부의 ‘2022년 중국군사력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해군은 2020년 340척을 보유해 함정 수에서 미국을 추월했고 조만간 400척까지 늘릴 계획이지만 미 해군 함정은 현재 300척에 못 미치고 있다.

미국은 2045년까지 350척으로 늘릴 예정이지만 자체 건조 역량이 떨어져 중국 함정 조선소의 생산량을 따라잡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노후 함정의 퇴역으로 함대가 축소될 가능성이 높고 연평균 100여 척이 전 세계에서 상시 작전 임무에 투입돼야 하기 때문에 손상된 함정을 수리하는 등 MRO 사업 수요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미국 조선소의 역량 부족으로 선박 건조가 수년간 지연되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전함의 MRO 사업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안보와 자국 조선업 보호 및 육성을 위해 1920년 제정한 존스법도 조선업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

존스법은 미국에서 만든 선박만이 미국의 항구에서 다른 항구로 물품과 승객을 운송할 수 있다는 강제 규정이다. 결과적으로 존스법은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미국 내 해상운송 비용과 선박 건조 비용을 높였고 신기술에 대한 투자와 혁신을 억제해 조선업 쇠락에 일조했다.

권혁웅 한화오션 대표와 카를로스 델 토로 미국 해군성 장관이 한화오션에서 잠수함 장보고-III와 관련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한화오션


MRO 수요도 감당 불가…기댈 곳은 한국·일본뿐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 일본의 조선업에 손을 내밀고 있다. 카를로스 델 토로 해군성 장관은 지난 4월 9일 ‘해군 리그’ 행사에서 “저와 제 팀이 한국에 갔을 때 우리는 선박 건조 공정의 디지털화 수준과 실시간 모니터링에 깜짝 놀랐다”며 “한국 조선업체의 최고경영진은 선박이 언제 인도될지 날짜까지 알려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델 토로 장관은 지난 2월 HD현대중공업 울산 본사와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을 방문해 한국 조선업체의 함정 건조 역량을 확인했다. HD현대중공업에서 올해 한국 해군에 인도될 예정인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을 둘러보고 한화오션에서는 건조 중인 잠수함 장보고-III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델 토로 장관은 “한국과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이지스 구축함을 포함한 고품질 선박을 건조한다”면서 이들과의 협력이 미 조선업의 위기를 이겨낼 방안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도 ‘초국가적 위협 프로젝트’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빠르게 증강하는 중국 해군력에 대한 해상 우위를 유지하려면 한국, 일본 같은 동맹과 협력을 심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 정부기관이 쓰는 선박(전투함, 민간선 포함)은 무조건 미국 내에서 건조해야 한다는 존스법으로 인해 미국이 선박 건조 역량을 단시일 내 확대하기는 힘들지만 지난해 세계 선박 건조량의 24%를 차지한 한국, 13%를 차지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해군과의 격차를 좁힐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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