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극우 정치 설계자가 남긴 유산, 어마어마하다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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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장 마리 르펜이 세계 정치에 끼친 영향
 2016년 1월 27일(현지시간)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의 공동 창당자인 장 마리 르펜이 파리 서쪽 생클루드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프랑스 극우 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국민전선(Front National, FN)의 공동 창당자였던 장 마리 르펜이 지난 7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국민전선은 현재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 RN)의 전신으로, 그는 현 지도자인 마린 르펜의 부친이기도 하다.

장 마리 르펜은 프랑스를 넘어 현대 극우 정치의 설계자로 평가받으며, 반이민, 반세계화, 그리고 국가 정체성 수호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 담론을 체계화했다. 그는 이러한 전략을 통해 국민전선을 프랑스 정치의 주변부에서 주류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 극우 정치의 흐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장 마리 르펜의 생애는 곧 프랑스 극우 정치의 역사였다. 1950년대 푸자드주의 운동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그는 1972년 FN을 창당하며 본격적으로 극우 세력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았다. FN은 초창기에는 소수의 급진적 지지층에 의존했으나, 1980년대 드뢰(Dreux) 지방선거와 유럽의회 선거를 통해 점차 제도권 정당으로 성장했다.

특히 2002년 대선은 르펜과 FN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적으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이 선거에서 르펜은 예상을 뒤엎고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를 제치고 결선에 진출했으며, 재선을 노리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맞대결을 펼쳤다. 프랑스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겼을 뿐 아니라, 현대 프랑스 정치사의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다.

직전 총선에서 패배한 시라크 대통령은 의회 권력을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이 주도하는 진보연합에 내주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좌파 연합은 최상의 공조 체제를 유지하며 강력한 정치적 결집력을 과시했다. 여론조사와 다수의 전문가들도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가 대선에서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1차 투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자크 시라크 후보가 1위, 장 마리 르펜 후보가 2위로 결선에 진출했으며, 유력한 대통령 후보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3위로 탈락하는 대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최종 결선에서 시라크 대통령이 무난히 승리하며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 사건 이후 프랑스 정치는 사실상 "극우 대 반(反)극우"라는 대립 구도로 재편됐다.

현대 극우 정당의 모델

 1995년 5월 2일(현지시간)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의 공동 창당자인 장 마리 르펜이 파리 외곽 생클라우드의 자택에서 대통령 후보 리오넬 조스팽과 자크 시라크의 토론을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때로는 단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바꿔놓는다. 조스팽 총리는 선거 결과 발표 몇 시간 만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이후 르펜의 FN은 프랑스 정치에서의 약진을 넘어 전 세계 극우 정치 운동에 전략적 영감을 주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FN은 세 가지 주요 측면에서 현대 극우 정당들의 모델로 평가받는다.

첫 번째로, 르펜은 국가 정체성과 이민 문제를 정치의 핵심 의제로 부상시켰다. 그는 단순히 반외국인 정서를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고, "프랑스 국민을 우선으로"라는 구호를 통해 자국의 경제적, 문화적 우선권을 주장하며 이민자와 외국인을 경제적 불평등과 정체성 위기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이 같은 접근은 전 세계적에 유사한 메시지를 전파하며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이탈리아 마테오 살비니의 "이탈리아 우선", 그리고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적 담론에 중요한 전략적 영감을 주었다.

두 번째로, FN은 세계화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 계층의 불안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국민 우선"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메시지는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에 제동을 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가 정체성과 주권 회복이라는 명분 앞에 기존 정치권은 무력하기만 했다.

이 전략은 세계화로 인해 소외감을 느끼던 계층에 강력히 어필하며 FN을 단순한 극우 정당의 틀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 경제정책과 보호주의를 강조하는 대안적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를 통해 FN은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불신을 흡수하며, 글로벌 차원에서도 유사한 메시지와 전략을 극우 정당들이 채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FN은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급진적 이미지를 벗어나 대중 정당으로 자리 잡고자 하는 "탈(脫)악마화" 전략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FN은 과거의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이미지를 감추고, 보다 폭넓은 유권자층에 어필해 주류 정치 무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략은 독일의 대안당(AfD), 스페인의 복스(Vox), 영국의 개혁당(Reform UK) 등 유럽의 극우 정당들에게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이들 정당은 FN의 사례를 참고하여, "위험한 정당"이라는 기존 이미지를 완화시키는 동시에, 경제적 불안을 느끼는 중도보수층과 저소득층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며 정치적 입지를 확대해 나갔다.

때로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역사의 중요한 흐름 바꿔

 7일(현지시간) 프랑스 극우 정치인 장 마리 르펜이 사망한 지 몇 시간 후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반자본주의신당(NPA)이 주최한 대규모 행사 "르펜은 죽었다!"에 참석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있다.
ⓒ 연합뉴스

극우 정치는 이후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같은 지도자들이 실제로 집권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정권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이라는 강력한 구호 아래 보호무역과 이민 제한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 제조업 고용 증가나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같은 약속된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보우소나루의 브라질 역시 팬데믹 대응 실패와 환경 파괴로 인해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극우 정치가 분명한 비전과 실질적 정책보다 이미지 정치와 선동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극우 정치의 본질적 문제는 정치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국민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분열과 배타적 증오를 부추긴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갈등의 정치가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다. 극우 정당이 약진한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나타난 정치적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작동을 방해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형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갈등과 증오를 조장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은 현대 정치가 직면한 심각한 도전 중 하나다.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이 문제를 단순히 극우 세력의 부상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반(反)극우" 진영의 심각한 전략 부재와 안일한 대응 또한 이 상황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극우 정치의 부상은 단지 이념적 문제가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불안과 분노에서 비롯된 현실적인 문제임을 직시해야 한다. 극우 정치 세력의 성장 배경에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소외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유권자를 비난하거나 배제하는 접근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극단적인 반발과 양극화를 초래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 정치 지지층은 단순히 자신들의 목소리가 억압된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헌법적 질서를 유린하는 행위까지도 정당화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으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치적 담론 속에서 더욱 단단히 결속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대립의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며, 특히 오늘날과 같은 혼란과 분열의 시대에는 통합의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통합이란 단순히 이념의 타협을 넘어, 국민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 받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 반영될 수 있다는 신뢰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극단주의와 극우 정치의 발흥은 계속될 것이며, 그 결과는 더욱 심각한 사회적 균열로 이어질 것이다.

르펜이 현대 정치에 남긴 유산은 분명하다. 증오와 배타의 유혹은 강렬하고 구체적 행위들은 통쾌하지만, 그것들이 남긴 갈등과 분열의 상처는 점점 깊어진다. 사회악은 철저히 응징해야 하지만, 주권자 가운데 소외계층이 만들어진다면, 사회악에 대한 응징은 그만큼 어려워지고 오히려 그들이 사회악을 둘러싸는 장벽과 철조망이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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