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는 그의 육성과 함께 언론을 비롯한 정치인, 유튜버들은 즉시 현장을 생중계했다. 시민들 역시 눈과 귀를 총동원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다. 대부분 '계엄'이라는 단어를 즉각적으로 인지하고 위기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늘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했다. 누군가는 들을 수 없어서, 볼 수 없어서, 혹은 계엄의 뜻조차 몰라서 상황을 곧바로 인지할 수 없었다. 바로 시·청각 장애인과 발달장애인들이다. 장애인활동지원사로서 나는 이들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KTV 국민방송 생중계를 포함해 당시 뉴스특보를 편성한 지상파 3사·종합편성채널 중에서도 KBS만 유일하게 수어 동시통역을 제공했었다. 더불어 재난문자 역시 발송되지 않았다. 결국 장애인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비장애인보다 한참 늦게 정보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중대한 국가적 비상사태에도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것이다.
문자도, 통역도 없어 뒤늦게 인지... '계엄은 재난 아니'란 정부 해명 힘 없는 이유
수어가 제1 언어인 농인 제희정(29) 씨는 다음날인 12월 4일 새벽 12시가 되어서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계엄 소식을 접했다. 재난문자가 오지 않았기에 농인 부모님 역시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뉴스 한글자막을 보고 있는 제희정씨 |
ⓒ 제희정 |
그녀는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재난문자가 와 경보가 울려야 하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며, "계엄은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는 비상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날 밤은 정보 접근이 제한된 그녀와 가족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단다.
난데없는 계엄 선포 이후, 제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대구에서 열린 두 차례 탄핵 집회에 참여했다. 물론 불편함도 감수해야 했다. 첫 집회에서는 수어 통역이 제공되지 않아 발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청인 참석자들의 분위기를 살피고 구호 타이밍을 따르느라 신경 썼다"며,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열기를 보탰다고 했다.
다행히 두 번째 집회에서는 수어 통역사가 배치되면서 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집회 무대에도 올라 "같은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 중 장애인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녀가 "청인은 음성언어로, 농인은 수어로 얘기할 수 있으니 이건 바로 국민의 목소리"라고 수어로 발언하자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윤석열 퇴진 대구시민시국대회'에서 수어로 발언하는 농인 유튜버 제희정 씨 |
ⓒ 유튜브 '뉴스민' |
이아나(27) 씨에게도 비상계엄은 더 큰 두려움과 혼란이었다. 이씨는 신경 다양인이자 한국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이다. 그녀는 내란 당일, 홍대에서 지인들과 뒤풀이를 하던 중 단체 카톡방에서 '비상계엄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메시지를 보고 처음 비상계엄 소식을 접했다. (*신경 다양인: 자폐 특성, ADHD, 난독증, 성격장애 등 뇌신경의 차이로 발생하는 '다름'을 '생물학적 다양성'으로 인식하는 관점이다.)
하지만 계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비상계엄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주변에서는 "어떻게 하느냐"며 난리가 났지만, 그녀는 계엄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기에 오히려 차분할 수 있었단다. 일행과 헤어진 후 사이렌을 울려대는 경찰차와 군인 버스를 마주하고서야 '진짜 전쟁이 났구나'라는 생각에 심각성을 비로소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 비상계엄 당일 오후 11시경 이아나씨가 단체 채팅방에서 주고받은 메시지 |
ⓒ 이아나씨 제공 |
집에 도착해서도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비상계엄 당시 국회에 병력을 투입한 남태령 수도방위사령부가 집 인근에 위치한 탓에,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주변 헬기 소리가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급히 유튜브로 뉴스 라이브 방송을 켰지만 실시간 자막은 제공되지 않았고, 자료화면만 반복되면서 두려움만 더 커질 뿐이었다.
그녀는 재난문자를 보내지 않았던 행정안전부가 당시 내놓은 해명, 즉 "비상계엄은 재난이 아니다"라는 설명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전쟁이 났든 안 났든,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상황도 재난과 다름없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재난문자만으로는 청각장애인이 정보 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수어가 제1 언어인 농인의 경우, 음성언어인 한글은 외국어 자막처럼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씨도 여의도 탄핵 집회에 참석했지만, 어려운 점이 많았다. 대형 스크린에 떠 있는 수어 통역 화면이 너무 작아 거의 볼 수 없어서다. 정보를 어떻게 인지했냐는 물음에 "(보청기를 껴도) 주변 소음이 커 사실상 안 들린다"면서도 "사람들이 박수치면 (따라) 치고, 박수 안 치면 가만히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을 때에도 그녀는 현장을 지켰지만, 사람들의 환호하는 표정을 보며 겨우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 비상계엄 당시 뉴스를 보고 있는 이아나씨 |
ⓒ 이아나 |
전쟁과도 같았던 그날 밤, 배제되고 소외당한 건 청각장애인과 농인뿐만이 아니었다. 시각장애인 조현대(60) 씨는 응급실에서 계엄 상황을 들었다. 집에 가기 위해 '장애인 복지콜' 콜센터 직원과 통화하던 중, 계엄 선포로 여의도 일대 교통이 혼잡해지면서 택시 배차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믿기 어려웠던 그는 병원 간호사에게 사실을 재차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시각장애인 한상혁(59) 씨도 "소리만 듣다 보니 정보 인지가 바로 안 된다"며 "처음에는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에도 시각을 이용하지 않다 보니 정보 불신이 크다"면서도 "그나마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재난문자라도 왔으면 상황을 좀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일상에서도 보장받기 어려운 정보 접근권
사실 비상계엄령으로 불거진 장애인 정보 접근권 문제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애써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몰랐던, 아니 '모르는 척' 해왔을 뿐이다.
제씨와 이씨 모두 평범한 일상에서도 정보 접근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유명 영화제에 방문했던 제씨는 수어 통역사나 속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알아서 데려오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여행 계획 중 숙소 정보를 어쩔 수 없이 전화로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 특히 불편하다고 말했다.
TV 화면 속 수어 통역사의 화면이 작아, 잘 보이지 않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제씨는 "(특히) 고령 농인은 눈이 침침해 지금처럼 작은 동그라미 화면 속 수어 통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보기 힘들다"며 화면 크기가 지금보다 더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TV 자체 자막이 제공된다 해도 정확도가 떨어지는 한계가 있다고도 말했다.
책 <더티 워크>의 저자 이얼 프레스는 사회 불평등은 현대인들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지속된다고 지적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희생자였던 농인 김경철 씨가 40여 년이 흐른 오늘까지 여전히 소환되는 현실과, 2019년 강원 산불 속보 때도 수어 통역이 제공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앞으로 위기는 또 올 것이다. 그때마다 장애인에겐 불평등한 사회에 또다시 배제되고,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장애인 등 약자들이 위기 뒤로 매번 밀려나는 이유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탓도 크다.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모른 척'은 더 큰 문제다. 계엄의 무게와 강도가 모두에게 똑같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계엄부터 탄핵, 여객기 참사까지… 다사다난했던 2024년을 보내고 맞이한 새해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하다 중지한 3일(관련 기사: 공수처, 5시간 30분 대치 끝에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 중지 https://omn.kr/2bpto ). 새로운 위기 뒤 금세 잊힌 장애인들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
Q.농인과 청각장애인에 대한 흔한 오해, 아예 안 들린다? |
A.그렇지 않다. 흔히 청각장애인은 무조건 들을 수 없다고 오해하지만, 청력과 데시벨에 따라 들리는 정도가 다르다. 보청기와 인공와우 착용으로 저하된 청력의 선명도를 향상할 수 있다. 또 청각장애인은 수어(手語)만 사용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음성 발화가 가능한 사람도 있다. 농인 유튜버 제희정씨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www.youtube.com/@yeongyeong00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일부는 제가 진행하는 관악FM 라디오에도 방송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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