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조 원에 달하는 더불어민주당의 2025년도 예산 감액안은 윤석열을 어지간히 분노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비상계엄 거사일'이 민주당이 감액예산안을 제출한 이틀 뒤였다는 점, 윤석열이 담화로 직접 밝힌 비상계엄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민주당의 예산 삭감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상계엄은 조세재정의 역사에도 상흔을 남길 초유의 일이었다. 윤석열의 이러한 '견문발검(見蚊拔劍)'은 응당 그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는 미치광이의 칼부림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산에서의 '행정부 절대 우위 시대의 종언'이라는 차원에서다.
감액 대부분은 예비비와 국고채 이자
▲ 지난 12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담화를 TV로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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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팩트체크된 내용이니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다. 민주당 감액예산안에 대한 윤석열의 분노는 대부분 오해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어 일일이 반박하기조차 민망한 내용이다.
삭감한 4.1조 원이 큰돈으로 보이긴 해도 정부 편성 기준 총지출 677조 원의 0.6%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5~7조 원 수준의 예산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협상 과정에서 야당의 4.1조 원 삭감 요구는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열심히 하라고 헌법이 국회에 예산심의권을 부여한 것이다.
규모로 따지면 통상적으로 이뤄지는 정부의 예산 구조조정이 훨씬 무자비하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정부는 50조 원 이상 지출이 조정된 예산안을 제출했다. 기재부가 매년 지출구조조정의 성과라고 밝히고 있는 지출 규모만 하더라도 25조 원 안팎이다. 여기에 국회의 4.1조 원 감액안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국회는 오히려 더 분발해야 한다.
이 4.1조 원 감액 중 60%에 육박하는 2.4조 원은 예비비 감액분이다. 예비비는 정부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 남용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윤석열은 12일 담화문에서 민주당이 재해 대책 예비비를 1조 원 삭감했다고 힐난했지만, 재난 대응 긴급 예산은 추가경정예산(추경)으로 편성해 집행하면 되는 일이다. 용산 대통령실 이전과 해외 순방에 불투명하게 동원된 수백억 원 예비비에 대한 해명부터 내놓아야 할 일이었다. 투명한 예산 집행과 임의 지출 축소를 위해 예비비의 축소는 바람직한 방향성이다.
다음이 국고채 이자상환액 5000억 원 삭감이다. 이 예산은 소위 '약속 대련' 예산으로 예비비와 함께 언제나 과대 편성되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항목이다. 기획재정부는 국고채 예상 이자율을 과대 산정해 지출을 부풀린 후 국회의 다른 사업 예산 증액 요구에 지렛대로 활용한다. 정부는 못 이기는 척 지출을 깎고 그만큼 국회 요구 예산을 반영해 준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다른 예산사업들은 삭감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매년 5000억 원 안팎의 불용액이 나오는 게 현실이니, 국회 입장에서는 대폭 삭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수활동비(특활비) 삭감을 마약 범죄 수사 방해로 호도하는 인식도 놀랍다. 천억 원에 달하는 특활비는 이미 정부 예산안의 암적 존재로서 재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불러오는 대표 항목으로 수술이 불가피하다. 마약 수사할 돈으로 부하들 관리하고 떡값을 나눠주니 문제가 아닌가. 진작에 개혁되었어야 할 항목이었다. 집권할 때는 방치하다가 이제 와서 칼을 휘두르는 민주당의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건 특활비 삭감은 사필귀정이다. 개혁을 하려면 전모를 밝혀야 하는데 정부가 집행내역과 증빙자료조차 못 보여 준다고 버티면서 예산만 달라고 한다면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원전 예산 삭감에 대한 분노 역시 상식적이지 않다. 담화에서 언급한 체코 수출 원전 예산은 아예 삭감된 적도 없다. 민주당이 지난해에 비해 대폭 증액된 원전 예산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해 주었는데도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외에도 청년 일자리 지원사업, 취약 계층 아동 자산 형성 지원 사업, 백신 개발 R&D 예산, 돌봄수당 삭감은 낮은 집행률이나 불충분한 절차가 이유다. 국정 방향이 다를지라도 대체로 국회는 정부안을 존중해 예산을 심의한다. 너무 존중해서 문제라면 문제일 뿐, 이유 없는 삭감은 없다.
본질은 정부의 압도적 우위
▲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월 1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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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이러한 비틀린 인식의 배경에는 예산 결정 과정에서의 행정부의 전통적 절대 우위와 입법부의 약세가 자리한다. 지금까지의 행정부는 소수 국정예산의 조정을 감수하면 원하는 대로 정부 원안을 대부분 관철할 수 있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양당의 예산안 합의안에서 야당 몫 증액으로 관철된 예산은 연구개발(R&D), 새만금, 지역화폐뿐이었다.
이번 감액 4.1조 원도 예비비와 국고채 이자상환액 감액분을 제외하면 1.2조 원에 그치고, 이는 정부 편성 총지출의 0.2%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부가 편성한 예산에 대해 입법부가 역대급으로 조정했다는 게 이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편성권은 이런 입법부의 미미한 심의권을 아득히 초월한다. 정부는 예산 편성의 전권을 휘두르며 수많은 사업을 폐지하고 창설하며, 증액하고 감액한다. 단적으로 지난해 정부의 R&D 예산 감액 규모만 하더라도 5.2조 원이었다. 국회가 매달려서 겨우 얻어낸 게 6000억 원 복구였다.
부처들이 제출한 예산을 조정하는 기획재정부의 권한은 더욱 막강하다. 기재부 제출 자료에 따르면, 2018~2022년 기재부는 부처들이 제출한 예산안에서 평균적으로 11조 원을 증액시켰다. 그러나 국회는 심의 과정에서 평균적으로 1.6조 원을 증액시키거나 삭감했다. 즉 산술적으로 행정 관료 집단인 기재부의 예산 조정 권한이 국민을 대표해 예산을 심의하는 국회의 7배 이상에 달하는 것이다.
예산 뿐만이 아니다. 78조 원(2025년 편성기준)에 달하는 조세지출도 그렇다. 조세지출은 국세감면액으로 사실상의 보조금으로 기능하며 예산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조세특례 같은 세법에 의해 좌우되는데, 세법의 제출과 심의는 압도적으로 정부 우위의 구조에서 이뤄지므로 지난 10년 동안 매년 8%씩 감면액을 늘려온 기재부 방침에 국회는 뾰족한 대응책을 내지 못했다. 고작 법정 국세감면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할 뿐, 정부 제출 세법을 막아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가 대한민국의 예산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느냐' 묻는다면 국민도 국회도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 특히 기획재정부라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떤 예산을 증액하거나 삭감해야 하는 처지라면, 정부의 예산안 편성 과정에서 담당 부처 공무원과 기획재정부 담당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길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9월 이후 국회 심의에 기대를 건다면 이미 가망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회 예산 심의는 실질적으로 무력하기 때문이다.
헌법에 보장된 정당한 국회의 예산심의권 행사에 이렇게 윤석열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전통적 행정부 압도적 우위 예산 권한을 대통령 자신의 권력으로 간주했던 탓이다. 비상계엄 발동에 묻히긴 했지만 민주당의 수정예산안에 대해 기재부는 범정부 합동브리핑이라는 이례적 형식으로 비난했고, 여당 원내대표 추경호는 아예 협상 불가를 선언하고 수정안 단독 통과를 사실상 내버려뒀다. 관료엘리트 주도의 예산 질서가 받은 위협에 대한 다양한 징후적 대응들이다.
행정부의 압도적 우위 끝낸 민주당 수정예산안
▲ 우원식 국회의장이 지난 2일 국회에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박성준 원내수석부대표를 만나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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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국회의 예산 심의가 무력했던 이유로 세 가지를 꼽겠다. 첫째, 짧은 심의 기간이다. 정부 기능이 고도화되면서 사업은 너무 많은데 심의 기간은 너무 짧다. 9~11월 석 달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9월과 10월은 사실상 대부분의 국회의 정책 역량이 국정감사에 집중되므로 실질적 심의 기간은 한 달에 불과하다.
둘째, 소선거구제의 문제다. 다수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사업 예산 획득을 지상과제로 삼고, 다른 국정 전반 예산은 이차적 관심사다. 이런 사정은 국회의원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정부의 먹잇감이 된다. 앞서 언급한 고의적으로 과대하게 편성한 예산을 활용해 지역구 예산을 나눠주고 기존 정부 사업을 방어하는 거래가 이뤄질 수 있는 배경이다.
세 번째 문제는 예산 프로세스 전반이 장막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부처의 예산요구서나 세부사업의 계획서 자체를 공개하지 않는다. 왜 기재부가 예산을 조정했는지는 기재부만 안다. 액수조차도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사업계획서에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 전체적인 통계는 전혀 확인이 불가하다. 가장 실질적인 예산 변동이 이뤄지는 편성 과정의 정보가 사실상 부재한 채 심의가 진행되는 것이다.
최종 예산안 협상이 이른바 '소소위'라고 하는 밀실협의체에서 이뤄지는 습속도 국회 자신이 그 권능을 스스로 저해하는 지점이다. 속기록도 없이 양당과 기재부 관료 극소수만 참여하는 밀실 협의 하에서 국민들은 국회의 예산 조정이 어떤 이유로 이뤄졌는지 알지 못한 채 결과만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불투명한 협상 과정은 정치인들의 담합과 미흡한 심의, 주권자의 예산 불신과 무기력을 불러오고 있다.
민주당의 이번 수정예산안은 국회의원들이 '소소위'에서의 소소한 예산 나눠먹기 편익을 포기하고 단호하게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협상력을 확보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아무리 국회 다수당이라 하더라도 단독수정안을 올릴 수 없다면 대정부 협상에 기댈 수밖에 없고, 이런 사정을 아는 정부여당은 고자세로 일관해 왔다. 어차피 수정안도 못 만든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예산 파행의 책임 부담 때문에 야당이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야당 단독수정안을 낼 수 있게 됨으로써 정부의 이 전략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예산안의 특성상 완전히 외통수에 걸린 것이다. 단독 수정 예산안을 기어이 만들어 낸 민주당 정책 단위의 역량에 경의를 표한다. 수만 개의 사업이 얽히고설킨 예산안에서 짧은 시간 안에 정합성 있는 수정예산안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런 전략을 상대한 첫 상대가 권한의 행사에 분별과 절제가 없는 인격이라는 게 대한민국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행정부의 예산편성권과 입법부의 증액권 없는 예산심의권의 만남은 언제나 심의 권한의 소극적 행사로 귀결했다. 더 이상 국민 없는 예산, 국회 패싱 재정은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속 불가능하다. 추경은 당연하거니와 그 너머를 준비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굳건한 열망은 비상계엄의 총구 앞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국회를 지켜냈다. 이제는 예산과 재정이 시민들의 삶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게 만들 책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