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안 죽을 거라 하더니" 새벽 4시부터 8명 잇따라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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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장'과 박중기 선생의 동지들 그리고 유가족이 겪은 고통
1975년 4월 9일 아침, 서대문구치소 앞의 조그마한 공간은 그야말로 눈물과 통곡과 그리고 한탄의 바다였다. 얼마 되지 않은 교도관으로서의 경험이었지만, 대법원 판결이 내린 바로 다음 날 새벽 4시부터 같은 사건의 관계자 8명이 잇따라 처형된 경우는 아마도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느닷없는 사형 집행 소식을 듣고, 시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가족들은 모두 넋이 빠진 사람들처럼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신부님들의 옷깃을 부여잡고, "신부님들 안 죽을 거라 하더니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 안 죽는다더니만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하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 <1987> 속 유해진이 연기한 전병용 전 교도관이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기고한 인혁당 관련 글 중 일부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가족들의 오열과 통곡이 생생히 들리는 듯한 증언이 아닐 수 없다. 백서에 기록된 대법원 확정 판결에서 사형 집행까지의 과정이다. 전무후무였고, 이 역시 일사천리였다.

- 1975년 4월 8일 10시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피고인 및 변호사조차 출석하지 않은 채 준비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후 상고를 기각

- 대법원의 상고 기각결정이 내려지자 국방부 장관 서종철은 '사형집행명령서'를 작성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로 송부

-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가 서울구치소에 '사형수의 심신상황'을 조회하자 서울구치소는 의사의 '진단서'(사형수 8명 이상무)를 회신

- 4월 9일 비상고등군법회의검찰부(담당송종의)는 '형집행지휘'를 서울구치소에 송부

- 4월 9일 4시 55분 형 확정 18시간 만에 서도원을 시작으로 사형 집행이 진행되어 8시 50분 도예종을 끝으로 형 집행 종료, 각 30분 소요

독재정권의 이러한 유례없는 사법 살인을 접했을 당시, 박중기 선생은 라디오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그때 선생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때는 정말 미치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세월이 지금까지 지탱하게 한 것 같다." (헌쇠 박중기 선생 산수문집 <헌쇠 80년> 중에서)

살아남은 이의 슬픔, 생존자 박중기가 말하는 그 날의 진실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이사장 등의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이어간 박중기 선생.
ⓒ 4.9통일평화재단

박중기 선생은 20여 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이같이 회고했다. 내란음모 혐의로 6개월을 복역하지 않았다면 그도 사형수의 대열에 섰을지 모를 일이다. 박중기 선생은 그런 상상할 수도 없는 시절을 버텨왔고, 이제 아흔을 넘겼다. 그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 촬영에서 아직도 인혁당 사건 자체를 자세히 묘사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는 과거 동지들을 떠나보내게 한 사법살인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멀쩡한 사람을 죽인 겁니다. 정말 참혹하고도 참혹한 일이었어요. 지금 재심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니까 진실이 다 밝혀지겠지만(실제로 몇 년 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 역시 완전한 조작이었지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어요. (헌쇠 박중기 선생 산수문집 <헌쇠 80년> 중에서)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던 박중기 선생. 이후 그는 평생의 죄책감일지 모를 감정을 안은 채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의 생계를 도왔고 자제들의 학비를 댔다. 또 고물 장사를 하며 부도가 나고, 유가족들의 부탁으로 보증을 잘못 서 파산을 맞은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 대신에 김용원이 죽은 거야..."

박중기 선생이 순간 카메라 앞에서 조심스러워진다.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도 김용원 선생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말수가 적어지신다. 향후 10년이면 1세기를 꼬박 살아 낸 이 어른이 어떤 심정으로 반백 년 넘는 세월을 견뎌왔을지 까마득해진다.

김용원은 희생자 8인 중 한 사람이다. 역시 희생자인 고 이수병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건실한 자연과학도로서 고등학교 동창인 이수병이 징역을 사는 동안에도 친구를 꾸준히 돌봐줬다. 두 사람은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사이였고, 따라서 김용원은 일어학원 강사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친구에게 여러 차례 걸쳐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 돈이 중앙정보부의 혹독한 고문에 의해 인혁당 조직자금으로 둔갑해 버렸다. 조용하고 성실한 여자 고등학교 선생님 김용원. 간첩으로 몰아간다 해도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 사회적 관계가 거의 없다는 것이 독재정권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유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그런 김용원에게 역시나 암장 멤버이자 둘 모두와 '절친'이었던 박중기 선생은 부채감과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 같다. 박중기가 보유한 운명의 장난 같은 알리바이가 아니었다면 중앙정보부는 분명 착실하고 평범한 고교 교사인 김용원 대신 본인을 선택했음을 일찍이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박중기 선생의 눈에 가장 억울한 죽음인 이유는 따로 있다.

변혁을 꿈꿨던 '암장' 동지들과의 인연

 인혁당 사건 희생자인 고 김용원 선생 묘.
ⓒ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암장(岩漿)으로 살다가 활화산의 뜨거운 분출을 미룬 채 갔으니 분하다.
그러나 그는 조국 산하에 의로움으로 남아 그의 사랑은 사람마다의 가슴 속에
꽃으로 피어 날 것이요 그의 생각과 열정은 겨레의 숨결로 살아날 것이다.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된 김용원의 묘에 새겨져 있는 비문이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짧을 생을 마감한 이들에게, 암장의 정신만큼은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박중기 선생은 암정 멤버였던 김용원과 1년 반 가까이 자취 생활을 했다. 박중기 선생은 서울대 유인물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투옥 기간이 알리바이가 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제외됐다. 그런 박 선생을 대신해 김용원이 조직 활동을 이어갔다. 카메라 앞에서 "이과 김용원은 천재였다"며 흐뭇해하는 박중기 선생이 평생 부채감을 간직했을 이유다.

이들을 엮어준 '암장'(岩漿) 그룹은 '세상에 변혁을 일으키는 마그마와 같은 존재가 되겠다'며 박중기가 동지였던 고 이수병, 고 김금수와 주도해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과학 독서 동아리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경험한 열혈 청년 세대의 모임이었다.

앞선 연재기사 속 이창훈 4.9통화평일재단 사료실장과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박중기 선생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보자. 2년 전 85세 나이로 별세한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 이사장은 생전 헌쇠 박중기 선생 기념문집 <헌쇠 80년>(2013)에 기고한 글에서 암장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그는 박중기 선생을 평생 '중기 형'이라고 불렀다.

정치경제학 입문 또는 해설을 비롯하여 마르크스의 <자본론>, 애사기의 <대중철학>과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등 철학 서적, <세계사교정>을 비롯한 역사서적, 팸플릿 종류의 정치학 서적, 박태원·한설야·이태준·김남천·이기영 등이 쓴 소설과 이용악·오장환의 시집 등을 돌려가며 읽고 토론하였다.

무척이나 의욕 넘치는 자세들이었다. 화산을 예정한 암장의 뜨거웠던 의지였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중기형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가 한두 살 더 많아 암장 내에서 언제나 맏형 노릇을 했다. 암장은 그 뒤로도 끊임없이 땅 밖으로 분출하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된다.

그룹의 맏형이던 박중기 선생은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동료들보다 먼저 군대에 갔다. 휴가 때면 군대에서 된장을 가지고 왔고, 그때는 반찬 없이 밥만 먹던 동지들에게 잔치의 날이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이념을 넘어 자취방과 생활을 공유하는 돈독한 동지들이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 선생은 4·19 혁명 당시 암장 동지들과 함께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및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서 활동했고, 이후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가운데서도 민족민주운동과 변혁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동지들을 떠나보낸 뒤 정치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은 후 그는 고물 장사 등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됐고, IMF 사태로 직격탄을 맞기 전까지 업종을 바꿔 고철 장사로 사업을 늘렸다. 박 선생의 호인 '헌쇠'도 여기서 기인했다.

1차 인혁당 사건 이후 어쩔 수 없이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암장 그룹의 꿈을 박중기 선생이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 청년 시절, 동지이자 동생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박중기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드리워진다.

반면 김금수 이사장을 비롯해 살아남았으나 먼저 가버린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간간이 내비치기도 한다. 암장 시절이 있었기에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고 정권의 탄압과 감시를 인내해야 했지만 반대로 그 가혹한 시절도 버텨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사정은 또 달랐던 것 같다.

'빨갱이의 새끼들'이 겪은 국가폭력과 연좌제 그리고 사찰

▲ '여보 단 한순간만이라도' 5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가톨릭센터에서열린 인혁당 희생자 추모 전시회 개막식에서 인혁당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2012.10.5
ⓒ 연합뉴스

"사는 동안 내내 '뺄개이(빨갱이) 새끼'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60대가 된 고 도예종(1924∼1975)의 아들 도한수씨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피해자들이 사형당한 지 49주기 되던 날에 내뱉은 울분이다. 8명 사형수의 유가족은 물론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수감 됐다 목숨을 부지한 피해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서슬 퍼런 군부 독재와 유신 시대를 거치며 빨갱이란 주홍글씨로 몸서리를 쳐야 했다. 누가 그들을 빨갱이로 만들었는가.

한국 현대사에 있어 국가 폭력에 의해 자행된 최대 학살인 제주 4·3 이래 희생자들과 피해자들, 그 유가족들은 연좌제의 고통에 뼛속까지 신음해야 했다. 그 와중에 희생자들의 부인들은 박정희 독재정권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유가족들은 기본적으로 크나큰 경제적 피해를 보았다.

기본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가장들이 모두 구속이 되자 수입원이 끊겼고, 양봉업, 메추리업, 나사점, 목욕업 등 사업을 하던 집안은 모두 사업이 망했으며, 건설회사 간부, 명예회장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던 집안들은 그만큼 타격이 더 컸다. 특히 유기수, 무기수의 경우 석방된 이후에도 전혀 취직이 되지 않아서 계속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박중기 선생이 목재상이나 고철사업 등 자영업이나 사업을 해야 했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생한 다음부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경찰들은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1달에 1번씩 감시, 이른바 '요시찰' 명목으로 면담 등을 했다고 한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의 자식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볼까.

고 하재완의 막내아들은 네 살 때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간첩새끼"라고 하면서 총살하는 장난을 당했다. 동네 어른들도 이를 막기는커녕 웃으며 방관했다. 둘째 딸은 국민학교 2학년 소풍 때 반 아이들이 간첩의 딸이라고 놀리면서 도시락에 개미를 집어넣고 따라다니며 돌을 던지는 봉변을 당했다. 그리고 아들이 맞선을 볼 때 사돈이 될 뻔한 사람이 "당신한테 내 자식을 시집보내느니 차라리 김일성과 결혼시키겠다"고 말하는 수모와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이었을 터다. 이 같은 수모와 고통은 사건 전후 잉태돼 있던 씨앗이었다. 사형수들의 부인들은 사법 살인 전 이미 고문과도 같은 가혹행위와 강요를 당했다. 백서에 따르면, 1975년 1월 중순 이 사건 사형수들의 처와 전창일의 처는 중앙정보부로 불법 연행돼 각서를 쓰고 나왔다.

대구에 거주하던 송상진, 도예종, 하재완의 부인 모두 1975년 1월 15일 구속 영장도 발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구 지역 경찰서로 불법 구금된 후 중앙정보부로 이송됐다. 이어 중앙정보부는 이들에게 '남편이 공산주의자다', '구명운동을 하지 않겠다', '남편이 정부 전복을 모의했다'는 내용의 각서 작성을 강요했다. 김용원의 부인도 '남편이 인혁당'이라는 각서를 작성하도록 강요받았다.

<인혁당 백서>에 따르면, 약을 먹여 성적 흥분 상태에 놓인 부인들을 희롱한 중정 직원들까지 있었다. 급기야 자살을 기도한 사례도 있었다. 어느 유족 부인은 중정 수사관이 준 물을 마시고 정신이 흥분되어 불러주는 대로 각서를 작성했다. 정신이 든 다음에 자책감에 시달린 채 자식들과 함께 극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살아났다.

박중기 선생도 그 시절, 유족들과 다를 바 없이 정보기관에 시달렸던 고통의 기억을 털어놓은 바 있다. 말 그대로, 참혹하고도 슬픈 시대였다.

"1975년 4월 9일 (사형) 집행하고 나서 바로 '사회안정법'을 만들어서 예비 검속을 했어요. 그날부터 안기부에서 두 사람을 붙여서 밀착감시를 하더군요. 집 앞에 아예 상주하면서… 2년 동안을 감시당했어요.

당시 홍대입구에서 조그만 구멍가게 하면서 단칸방에서 애를 키우며 살았는데, 몸은 망가지고, 친구들은 다 죽고, 철저한 감시는 당하지, 어디 이동도 하지 못하고,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정말로 기가 막힌 시절이었지요.

그러다 도저히 생업도 안 되고 해서 친구 권유로 고물 장사를 시작했어요. 1978년 겨울쯤부터. 그렇게 70년대를 보냈지요. 참혹하고 슬픈, 고통스러운 70년대…" (헌쇠 박중기 선생 산수문집 <헌쇠 80년> 중에서)


덧붙이는 글 | https://tumblbug.com/19750409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텀블벅 후원 페이지입니다.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 연재 기사는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바탕하고 있으며,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게재됩니다. 기사 내 박중기 선생 외 존칭은 생략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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