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인근의 우리 동네는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한다. 몇 해 전, 이곳 초등학생이던 우리 아이들이 방학 끝 무렵 플로리다에 다녀온 적이 있다.
아이들은 신이 났지만 나는 새까맣게 그을릴 아이 얼굴이 걱정이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을 새 학년 새 친구들에게 첫인상으로 주고 싶지 않았다. 아침마다 바지런히 선크림을 발라 주었지만, 아이들은 금세 까무잡잡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오이며 감자를 번갈아 얼굴에 올려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학 후 반 친구 하나가 다른 어떤 아이에게 "너는 하얀 얼굴이네! 방학 때 아무 데도 놀러 안 갔어?" 하고 놀리더란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아니라 하얀 얼굴이 놀림받다니. '라때(나 때)'는 하얀 얼굴이 귀티의 상징이었고, 다들 그걸 원했는데도.
놀림말 '하얀 얼굴'에 대한 부모과 교사의 대처
한국에 '개근 거지'라는 말이 있다는 외신 보도를 보았다. 주변에 물어보고 찾아 보니 아직 널리 쓰이는 말은 아닌 듯하고, 아이들 사이 자극적 놀림말 같다. 학기 중에도 해외로 체험 학습을 다녀오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학교만 다니는 아이에게 '성실함'보다 '가난 혹은 무능력'이란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일 테다.
내가 읽은 외신 보도에서는 '해외여행'에 좀 더 무게를 둔 듯했다. 아빠가 권하는 의미 있는 국내 여행은 창피하다며 해외로 보내달라는 자녀 요구를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는데 뭔가 씁쓸했다.
물론 미국에도 자극적으로 놀리거나 차별적 의미를 담은 말들이 있다. 하얀 얼굴 말고도 홈텔(hometel) , 챗룸마우스(chatroom mouse) 같은 단어들이다. 호텔 대신 집에서 여름을 보낸다고 홈텔, 챗룸마우스는 자랑할 일이 없으니 채팅방에서 쥐처럼 조용히 소리 없이 산다고 놀리는 말이다. 가난한 아이들을 지칭하는 Broke, Bum 같은 단어도 있다. SNS에선 이런 신조어가 곧잘 퍼졌다 사라지곤 한다.
▲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개인의 경험'과 '에세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느꼈던 것 같다.(자료사진) |
ⓒ 픽사베이 |
한 번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남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어 온 가족이 오랜만에 한국 방문을 하게 되었다. 학교로부터 최대 결석 일수를 안내받고, 장기 결석자를 위한 숙제도 한아름 받았는데, 아이는 교장선생님과 담임(Homeroom)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숙제를 하나 따로 받았다. 여행 일지를 써보라는 것이었다.
역사 유적지나 박물관도 가능한 부지런히 방문하고, 소감이 담긴 에세이 한두 편을 반드시 포함하란다. 하지 않는다고 불이익은 없으며, 낸다고 해서 특별한 혜택이 있지도 않았다. 그때 처음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개인의 경험'과 '에세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느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정말 꼼꼼하게 일지와 에세이를 살펴 주시며 '특별한 기회'를 아이가 잘 활용했다고 메모를 남겨 주셨다.
미국은 겨울 방학이 없다시피 하고 대신 여름 방학이 길다. 이미 2월부터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여름 나기를 위해 '서머 캠프(Summer Camp)'를 알아보고 이른 등록 전쟁을 치른다. 스포츠 캠프에서부터 자연 관찰 프로그램까지 캠프 종류도 정말 다양한데, 가장 무난하고 흔한 건 동네마다 서너 개씩은 있는 '데이 캠프'(Day Camp-낮시간 동안 운영되는 활동 중심 캠프)다.
형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여름 방학-캠프-가족 여행'은 미국 어린이들에겐 거의 당연한 키워드다. 해외, 다른 주로 가거나 바다 위 크루즈를 타기도 한다. 하다못해 동네 서머 캠프만 다녀도 까맣게 타니, '하얀 얼굴'이란 형편상 집에만 있다 온 아이에게 쓰는 꽤 자극적인 놀림말인 셈이다.
내 경험상,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의 수다를 듣다가 이런 '놀림말'을 그냥 넘기는 미국 엄마들은 잘 없다. 스쿨버스 스탑에서, 레스토랑에서, 놀이터에서, 도서관에서, 쇼핑을 하다 말고 아이들의 비매너는 미국 엄마들의 '잔소리 트리거'이다.
우리 아이와 나는 듣지 못했는데, 스쿨버스에서 내리며 우리 아이를 향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더라며 아이를 데리고 집까지 찾아와 직접 사과하게 한 엄마도 있었다. '아들의 행동 교정을 위해서이니 꼭 사과를 받아 달라'면서.
'엄마의 훈계'는 생각하는 의자나 생각하는 방보다 엄하고 힘들다. 이런 미국 엄마들의 귀에 '하얀 얼굴'이라는 단어가 걸리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누군가는 선생님께 뭔가 좋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한 달쯤 지나, 아이 반 공개수업에서 역시나 '하얀 얼굴 사건'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실 벽 한쪽에 학생들의 그림과 짧은 에세이들을 보고서다. 전시 주제는 '지난여름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었다. '부모님들의 좋은 제안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라는 작은 글귀도 발견했다.
교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봤었다. 여름 내내 풍뎅이와 나비를 키운 이야기, 할머니에게 전통음식을 배운 이야기, 도서관 리딩프로그램을 완료해 수료장을 받은 이야기, 엄마와 5km 마라톤에 도전해 성공한 이야기들 속에서 당연하지만 누가 집에만 있었던 '하얀 얼굴'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우리 반은 모두, '자기만의 특별한 경험'을 했던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친구를 놀려서는 안 된다는 꾸지람보다 시선을 바꾸어주는 더 훌륭한 전환이 된 셈이다. 가정과 학교가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말이다.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더 중요
'어디에 갔었느냐'는 자랑보다 '어떤 시간을 보냈느냐'를 중시하는 미국의 교육 풍토는 입시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재학 중에 하는 자원봉사와 자기소개서에 해당하는 에세이의 중요성이다.
큰아이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두 개의 대통령 봉사상(브론즈)을 받았다. 외향적인 성격의 큰아이는 학교와 교회, 한글학교, 지역사회 봉사에 꾸준히 참여했다(관련 기사: 주삿바늘 목에 찌르는 사람들, 슬프다는 말 밖에는 https://omn.kr/25aoi ). 봉사 시간을 받을 수 있는 활동인지 아닌지도 굳이 따지지 않았고, 일손이 필요하다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덕분에 추천서도 잘 받았다.
▲ 아이 포함 가족들과 지난해 8월 미국 마약 거리로 유명한 켄싱턴 거리에 봉사를 다녀왔다. 외향적인 성격의 큰아이는 학교와 교회, 한글학교, 지역사회 봉사에 꾸준히 참여했다. 버려진 주사기 뚜껑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모습. |
ⓒ 장소영 |
선생님들이 '봉사 시간이 모자라는 아이들은 S에게 좀 나눠달라고 하렴' 농담을 할 정도였다. '사람과 연결될 때'라는 아이의 경험은, 그대로 에세이에 담겼다.
대학생들의 '갭이어(Gap year-휴학)'도 그런 자신만의 경험이나 봉사의 연장으로 쓰인다. 보통은 대학 생활 중에 1년을 쉬며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지만 경우에 따라 입학 전이나, 아예 입시를 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뒤 갭이어부터 가지는 학생도 있다. 이때 어디서 무슨 활동을 했고 그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작성해, 좋은 학교에 진학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큰아이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한국 방문을 좋은 기회로 삼아 에세이를 써오라고 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개인의 경험을 사회적 경험으로 발전시켜 글로 담아내는 능력을 차근차근 기르게 하기 위함인 듯싶다. 미국 명문대생들이 험지에서 하는 자원봉사율이 높고, 시민들의 발렌티어링(Volunteering-자원봉사)이 생활화된 이유도, 가정과 학교가 함께 만들어간 사회적 분위기 덕은 아닐까.
차별과 언어는 학습된다고들 한다. 아이들 사이에 도는 '개근 거지' 같은 말은 어른에게서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전환시킬 수 있는 것도 어른이다. 가정도, 학교도, 언론도 한 마음으로 건강한 말을 실어 나르면 좋겠다.
나도 미국 엄마 흉내를 내본다. "어디 놀러 안 갔느냐니, 질문이 잘못됐네. 대신 어떻게 말 걸 수 있었을까?" 핑계를 대자면, 한국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미국 엄마들처럼 이런 대화를 길게 끌고 가기 어렵다(아이들과의 대화가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그래도 계속 아이들 말에 귀를 기울이고, 관점을 바꿔 주려고 노력한다. 남들 하는 거 못해서 안절부절못하기 보다야 그 편이 낫지 않을까.
▲ 봉사 활동으로 받은 대통령 봉사상 특별할 것도, 뛰어난 재능도 아닌 꾸준한 지역 사회 봉사 활동으로 받는 대통령상이다. 미국의 교육 풍토에서는 업적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경험담을 잘 표현하는 내는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 |
ⓒ 장소영 |
큰아이가 봉사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SNS에 올리자 한국 지인이 '엄마가 대신 도장받으러 다닌 건 아니고?'라며 농담 섞인 댓글을 단 적이 있다. 농담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아이의 수고가 폄하되길 원치 않는다고 쪽지로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여기선 '작은 주전자에도 큰 귀가 있는 법이다(Little pitchers have big ears-아이들이 듣고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현재 큰아이는 갭이어 중이다. 올가을엔, 그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자신의 꿈과 관련된 나라로 드디어 혼자 여행을 나간다. 녀석만의 어떤 경험을 담아 올지, 그 경험이 어떤 방향으로 아이를 이끌지 기대하며 지켜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