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안 성토... 60대 여당 지지자와 40대 야당 지지자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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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 운전사] 택시 안에서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승강장에 줄지어 서있는 택시
ⓒ 연합뉴스

 
작년 9월 택시를 시작한 이후 7월 14일 현재까지 5468건의 호출을 받았다. 평균 2명이 탑승했다고 가정하면 10개월 동안 1만 5256명이 내 택시를 타고 내렸다. 
 
이 중에서 드물게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 나지 않은 사람들이 여럿 있지만 내게 정치 이야기를 한 사람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세 명이다. 여자 하나 남자 둘. 셋 중 60대 후반의 둘은 여당 지지자였고 40대 초반의 남성은 야당이었다(모수가 너무 적지만 여기서도 세대 간 정치 지형이 엿보인다). 
 
다른 택시 기사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 경험을 기준으로 하면 확실히 요즘 택시 안 대화 문화는 사라졌다 해도 과하지 않다. 사라진 풍경을 다시 불러낸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상대 지도자에 대한 분노가 좁은 택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팽배했다는 점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 잠깐 사이 다소 민감한 정치 이야기를 쉽게 꺼내 들었다는 것도 공통점이고 셋 모두 내게 어떤 질문이나 동의 없이 당연히 자기들 편이라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전개하는 공통점도 있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여당이나 야당이 하는 '짓거리'는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상식 밖의 말과 행동이기 때문에 누구든 상대방 편을 든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몰상식한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
 
어떤 경우든 상식과 몰상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대화와 타협은 배제되고 이기고 지는 싸움만 남는다. 각자의 상식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이 말은 곧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는 말과 같다.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양분되어 미국의 정치 역사를 함께 써 온 양당정치의 한국형 실사판이다. 
 
겉으로는 치열하게 각자의 정의를 자기 땅에 굳건하게 심어 보겠다는 의지의 표상으로 비치는 이 싸움이 실상은 양당정치라는 이분법 구도 속에 시민들을 정치적 볼모로 삼아 자기 이익을 챙겨 온 권력투쟁이라는 건 새삼스러운 주장도 아니다. 말하자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한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이 본질적으로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어 온 동지인 셈이다. 
 
한국과 미국 정치가 닮은 건 이뿐만 아니다. 성공한 미국 정치인들이 대부분 여야를 가리지 않고 8개 사립대학으로 형성된 아이비리그 출신인 것처럼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인서울' 출신이다. 
 
'늙고 돈 많은 백인 남성'의 대결장이 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대표하는 미국 정치는 정치자금 동원에 실질적인 제한이 없는 돈 많은 부자들의 대결장이다. 한국도 부자들이 정치를 한다. 이를 입증하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2023년 11월 23일 <뉴스타파>의 '부자가 지배하는 나라...공직자 재산 30년치 분석'에 따르면 국회의원 70%가 한국 상위 10% 부자로 밝혀졌고, 상당 수 의원들은 지역구와 상관없이 '강남 3구'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여의도 국회는 강남 좌파와 강남 우파의 대결장인 셈이다. 
 
나는 인서울 출신으로 강남에 집을 소유한 상위 10% 부자가 정치인이라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인들 대다수가 그런 사람들이라는 건 분명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90% 사람들이 배제되면서 그들의 삶이 정치 행위를 통한 제도와 법률로 적절하게 구조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 문제의 해법은 강남 3구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그곳에 집을 소유한 10% 부자 정치인이 자기 이익에 반하는 정책에 손을 드는 건 자기 존재의 부정과 같다.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가족과 각종 이권 등이 복잡하게 얽힌 자기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한국 정치의 우선순위는 10% 안에서 시작된다.
 
 부자가 지배하는 나라를 심층 분석한 <뉴스타파> 보도
ⓒ 뉴스타파

 
내 마음이 괴이해졌다
 
과거 지역에서 진보 정당 활동을 했다. 지금은 지리멸렬해졌지만 한때 각광받던 대중정당이었다. 어느 당이든 정당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체제가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한 당의 강령이 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한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대중정당으로 강령을 내세웠던 그곳도 예외 없이 서로 다른 내부 조직이 있었고 크게는 매파와 비둘기파로 나뉘어 여러 사안을 두고 다투었다. 소속 조직 없이 정당 활동만 했던 나는 개별 사안에 대해 조직의 결정에서 자유로운 입장이었고 늘 정당의 대중성에 우선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달리 조직의 이념과 정당의 강령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하면서 세계사의 변화에 맞물린 사회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매파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 있었다. 성격도 좋았고 주위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고 부인도 공무원이어서 아이들 건사하며 사는 데 전혀 부족함 없는 상류층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여럿이 편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 아파트값이 올랐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만족한 표정의 강경한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괴이해졌다. 
 
적어도 사회주의자라면 노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불로소득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한데 아파트 공화국의 현실은 그런 마음마저 무너뜨리는 것 같아 서글프기까지 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오래 부자로 살아남을 그가 가진, 자기 존재의 기반을 배반하는 이념적 경향성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했다. 
 
2년 전 투잡으로 고급 대형택시를 운전할 때였다. 본사에서 대절한 내 택시에 지역에서 올라온 대기업 노조원들을 태우고 서울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나는 운전하고 그들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같은 공고를 나온 선후배들이 여럿 있었고 학교와 직장 안 위계질서가 있었으며 일반 회사에서는 볼 수 없는 후배의 깍듯한 선배 대우가 인상적이었다. 노조 활동을 하는 생산직이자 정규직이었는데 가장 선배로 보이는 사람은 듣자하니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에 살고 비싸고 좋은 차를 타고 있었다.
 
전형적인 생산직 노동자인 그가 억대 연봉을 받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같은 일을 하고도 200여만 원을 받는 (2023년 노동사회연구원 발표 기준) 41%의 비정규직이 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다. 
 
자발적 비정규직을 자처하다 1년 전에 개인택시라는 자영업자로 변신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사는 나는 생산직 노동자인 이 사람의 운 좋은 성공이 부러운 건 사실인데 비정규직 문제 해법이 이 사람의 좋은 집과 차를 절반으로 줄이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인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통한 기업의 과도한 이윤추구에서 찾아야지 부자 노동자의 탐욕 때문이라는 언설은 불평등한 노동시장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표퓰리즘적 선동이다. 이는 요즘 자기 이익 챙기기에 더 급급해 보이는 대기업 노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튼 내가 당시 호형호제하던 그 노조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높은 연봉에 정년까지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경제적으로는 내겐 너무 부러운 이들의 노조 안에 자본주의 철폐와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목표로 하는 그룹이 있다는 걸 생각해 내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누가 보아도 한국 자본주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사회적 열망이라기엔 설명이 부족했다. 어쩌면 그들이 누리는 흔들림 없는 자본의 힘이 바깥 현실과 상관없이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뒷배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대기업 일자리 비율은 2021년 기준 14%다. 실제 노동조합이 가장 절실한 86%의 노조 조직률은 12.2%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언론을 장식하는 노조 관련 소식은 대부분 대기업노조에 편중되어 있다. 
 
국회와 언론이 외면하고 있는 중소기업이나 전체 임금노동자 중 17.6%(2021년 기준)에 달하는 5인 미만 사업장에 소속된 400만 노동자의 현실은 최저임금과 만성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삶이다. 

지금 내게 실재하는 세계
 
 승강장에서 택시가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1992년이었다. 이십대 시절 고향에서 스페어 기사로 법인 택시를 운전할 때였다. 아직 혁명 운동가로서의 당찬 포부를 안고 있었다. 당시 택시 기본요금이 서울 기준으로는 900원이었고 10원 50원 동전이 활발하게 유통되던 시기였다. 오전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오전반을 할 때는 사납금 채우기도 벅찼다. 
 
예상외로 강도 높은 노동과 벅찬 사납금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몇십 원 거슴름돈은 괜찮겠지 하며 당당하게 내리는 손님에게 화딱지가 나고 몇십 원 잔돈 안 받고 내리는 손님을 만나면 기쁨이 넘치는 나를 발견하곤 흠칫했다. 
 
명색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혁명운동을 하는 내가 겨우 몇십 원 때문에 천당과 나락을 오가는 좀팽이로 변해가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일하는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단위는 10원 50원이었다. 오로지 그것이 내 노동의 세계였다. 인간의 생각은 자기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이마누엘 칸트가 말했다. '이론이 없는 경험은 맹목적이고, 경험이 없는 이론은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사유에는 한계가 없지만 경험이 없는 사유는 삶이 될 수 없었다.  
 
인서울 출신으로 강남 3구에 집을 소유한 상위 10% 부자인 사람들이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권력을 분점해 온 대한민국에서 서민들의 삶인 민생문제가 항상 뒤로 밀리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90%가 아닌 10%의 세계를 살고 있었다. 오로지 그곳에 실재하는 그들의 삶이 있었다. 강남 아파트, 대치동 학원과 과학고 그리고 의사나 변호사를 향한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곳. 
 
그때 그 강경했던 사회주의자는 은퇴한 지금도 좋은 아파트에 살며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지만 카톡방에서는 잊지 않고 한물간 사회주의 국가의 동향을 올리고 자본주의의 해악을 고발한다. 그렇지만 나는 더 좋은 사회를 향한 그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좋은 사람이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게 불완전하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의 2010년 9월 1일 자 <한겨례> 칼럼 제목이다. 그녀는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사람에 대한 이상화 경향이 지나치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곤 한다'고 썼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가 너무 다른 삶의 바탕 위에 존재하고 거기에서 경험을 쌓고 각자 다른 생각을 키운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런 인간이 만든 세상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 다만 오랜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세상은 그래도 아주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진보해 왔다. 그 방향은 언제나 공정하고 평등한 쪽을 향해 있었다. 문제는 그걸 넉넉히 받아들이기엔 개인의 시간이 너무 짧은 찰나의 순간이라는 점이다. 
 
긴 역사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찰나의 내 시간, 우리 사회 90%의 삶을 살아가는 나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오늘도 내 새끼들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켜야 할 가장으로서의 삶을 위해 빈차 등을 켜고 거리를 달린다. 오로지 지금 내게 실재하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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