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골목길 끝에 있는 조명가게에는 다양한 이들이 오간다. 트렁크를 끌고 배회하다가, 시끄럽게 짖는 개를 찾다가, 범인을 쫓다가, 전구를 사 오라는 엄마 심부름 때문에,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조명가게를 찾는다. 이들의 외형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트렁크를 끄는 지영(김설현)의 손톱은 손가락 안쪽에 박혀 있고, 개를 쫓는 병진의 얼굴과 옷에는 땀 대신 눈이 잔뜩 얼어붙어 있다. 범인을 쫓던 형사 성식(배성우)의 눈은 자주 돌아가고, 남고생 지웅(김기해)의 한쪽 다리는 뒤로 꺾여 있다. 물에 젖은 상태로 하이힐을 신고 걷는 혜원(김선화)의 몸은 거인처럼 늘어나고, 그를 보고 놀라 도망친 여고생 현주(신은수)는 그림자가 없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조명가게에 들어선 사람들이 묻는다. 가게 주인 원영(주지훈)은 무심하게 대답한다. “어디나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원영의 대답은 이곳이 조명을 파는 평범한 곳이지만, 동시에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조명가게’(디즈니플러스) 4회까지는 이렇게 낯설고 수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으스스하고 어지럽게 펼쳐진다.
드라마는 5회에 이르러서야 사연의 윤곽을 보여준다. 낯설고 이상하며, 기괴하기까지 한 이들은 사실 얼마 전 발생한 교통사고 희생자들로 이미 죽었거나, 코마 상태에 빠진 이들이다. “행정구역상 경기도지만 사실상 서울”인 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362번 버스 운전기사 승원(박혁권)은 비가 오는 어느 날 밤, 브레이크 이상을 발견하지만 차고지에서 점검받지 않으면 개인 비용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직원의 말에 수리를 포기하고 출발한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현주와 우산 들고 마중 나온 엄마 유희(이정은), 친구들과 농구 게임을 하고 귀가하는 지웅, 지영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에 들뜬 현민(엄태구), 다툼 끝에 따로 앉은 동성 커플 혜원과 선해(김민하), 할머니 배웅받고 혼자 귀가하는 아이를 태운 채로. 그렇게 위태롭게 달리던 버스는 하필 정비되지 않은 도로에 바퀴가 걸려 다리 한가운데서 중심을 잃고 추락하고 만다. 때마침 현민을 마중하러 나오던 지영은 버스 추락 현장을 목격하고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둘 사이를 반대하던 현민의 엄마로부터 그가 죽었다는 문자를 받고 자살한다.
그러니까 4회까지 우리가 본 골목길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에 위치한 다리처럼 ‘사후세계’로 가는 길목인 것이다. 느닷없이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튕겨진 이들이 배회하게 된 골목길 끝에 있는 조명가게는 코마 상태에 빠진 이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공간이다. 수많은 조명 중 자신만의 빛을 찾은 사람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그 세계에 남게 되는 것이다.
삶의 자리와 죽음의 시간은 어떻게 나뉠까? 이 쉽지 않은 질문에 드라마는 ‘의지’라는 단어를 반복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환자의 보호자에게 의료진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제부터는 환자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만이 스스로를 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절망한 보호자는 묻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 그 의지라는 게 어떻게 생기는 거죠?”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드라마는 의지를 시각화해 보여준다.
조명가게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은 사람은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 그러나 그 빛을 누구도 대신 발견하거나 , 가져다줄 수는 없다 . 자신의 의지로 발견하고 손에 쥐어야 한다 . 코마 상태였던 현민 , 현주 , 성식 , 지웅은 자신의 의지로 그 빛을 손에 쥐었기에 눈을 뜰 수 있었다 . 전구를 깨는 것도 의지의 결과다 . 선해는 이미 죽은 혜원과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 사후세계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전구를 깬다.
그 의지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걸 드라마는 ‘어시스트’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어시스트란, 아직 빛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이 발견하도록 돕는 걸 의미한다. 현주는 버스가 추락할 때 자신을 힘껏 끌어안은 엄마, 유희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유희는 코마 상태에 빠진 딸을 살리기 위해 죽어서도 절박한 마음으로 딸을 계속 조명가게에 심부름을 보낸다. 지영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현민 때문에 상처를 받지만, 잘린 그의 몸을 트렁크에 넣고 둘만의 추억이 어린 장소를 배회하며 상처 꿰매기를 반복하다가 현민을 살리기 위해 조명가게로 보낸다. 세상의 편견 때문에 사랑하는 선해가 피해를 입을까봐 죽어서도 차마 선해 앞에 나서지도 못한 채 그의 등 뒤에 붙어 있던 혜원은 선해를 조명가게로 향하게 한다. 병진(박정표) 주위에서 짖으며 그를 분노하게 했던 개는 사실, 산에서 추락해 죽을 위기에 처한 병진이 구조될 때까지 짖다가 끝내 무지개다리를 건넌 안내견이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버스가 추락했다고 생각한 승원은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애쓴다. 다리가 돌아간 채 주저앉은 지웅은 그런 승원 등에 업혀 조명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이는 버스가 추락할 때 지웅이 힘껏 위로 밀어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사후세계에서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돕는다면, 그 바깥에서는 중환자실 의료진이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돕는다. 과거에 사고로 죽을 뻔했던 간호사 영지(박보영)는 사채빚 때문에 생매장당했다가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자살을 시도한 뒤 코마 상태에 빠진 원철(김지훈)의 귀에 쌓인 모래를 정성껏 털어내고 그 귀에 이어폰을 꽂아준다. 응원가를 듣고 일어나라고. 그 이어폰은 영지가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 중환자실 간호사가 끼워줬던 것이다. 그의 귀에 반복해서 들리는 김광석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사후세계에서 지웅이 어두운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반복해서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원철과 지웅은 중환자실에 나란히 누워 있다. 영지의 응원이 그렇게 연결된 셈이고 과거의 응원이 현재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살고자 하는 의지는 오롯이 당사자의 몫이지만, 서로의 도움을 통해 생긴다는 걸 보여준다. 살고자 하는 것도 의지의 문제지만, 살리는 일에도 의지가 필요하다. 그 동기는 다양하다. 승원처럼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연인을 위한 애끊는 사랑의 힘일 수도 있고, 약자를 우선하여 살리고 싶은 선한 마음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미 죽은 자들이 살 힘을 다해 힘껏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조명가게’는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을 향한 깊은 연민과 선한 힘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수작이지만, 아쉬운 면도 있다. 드라마에는 이른바 ‘빌런’이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인간 사회가 ‘선의’로만 구성된 것처럼 누구도 서로를 해치지 않는 단순한 구성은 인간 세계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하게 할 수 있다. 원영이 과거 아파트 붕괴 사고 희생자이자 유희와 부녀 관계라는 설정 등 곳곳에 흩뿌려진 ‘신파’도 한계로 지적될 만하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울지 않겠다는 내 의지를 여러 대목에서 꺾었다. 선한 사람들이 애틋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하며 서로를 구원하려 애쓰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사무치게 그리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울고 싶었는데 드라마가 어시스트해준 격이랄까?
어둠을 헤매다 조명가게를 찾은 손님들에게 원영은 이렇게 말한다. “이곳엔 어떻게 오시게 된 겁니까, 여기 말고 이곳에.” 원영을 만난 이들은 이렇게 묻는다. “이곳 말고 여기는 어디입니까?” 선문답 같은 이들의 대화처럼 드라마는 ‘이곳’과 ‘여기’에 관해 자주 묻는다. 우리가 있는 ‘여기’는 어디이며 ‘이곳’에서는 무엇이 보이는가? 2024년 12월3일 이후 우리는 ‘조명가게’ 속 인물들처럼 어둠뿐인 골목길에 느닷없이 떨어져 배회하는 느낌이다. 어떤 날은 인류애가 바사삭 부서지고, 밤새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며 잠을 설치다 아침을 맞는다. 제주항공 참사가 난 12월29일 이후부터는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승원이 목 놓아 우는 바람에 엘리베이터가 눈물에 잠겨버린 드라마 속 장면처럼 깊은 슬픔에 잠겨 있기도 하다. 그러다 또 어떤 날에는 사람들 틈에서 인류애를 발견하고 미래에 관한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그 희망은 작고 연약하다. 우리를 내팽개친 국가를 지키겠다고 서울 여의도, 남태령, 광화문, 한남동, 각 지역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애써 끌어모은 빛이다. 그 빛은 광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투쟁 현장에, 참사를 당한 이들 곁으로 번지는 빛이다. 그 빛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거침없는 한파에도, 눈치 없이 내리는 눈에도, 염치없는 권력의 버티기에도 물러섬이 없다. 사람을 가려 비추지도 않는다. 성소수자, 장애인, 농업인, 이주민, 유가족 등 그저 서로를 다정하게 비출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빛을 찾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찾는 빛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두렵더라도 길고 어두운 골목길을 통과해야 하고, 자신을 가둔 문을 박차고 나서야 한다. 빛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찾을 생각이 없는 이들을 깨워 등에 업고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이 과정이 참으로 고되지만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침내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이미 죽은 자도 산 사람들을 도우려 안간힘을 쓰는데,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서로를 돕지 않을 이유를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아직 인류애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이고 ‘조명가게’에서 찾은 ‘응원봉’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