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사찰하던 독립운동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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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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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국외로 탈출한 1세대 사회주의자 조리환의 행방은?
보석 출감한 조리환. 동아일보 1927년 10월17일치


체포된 지 근 2년 만이었다. 조리환(曺利煥·30)은 서대문형무소 옥문을 나섰다. 1927년 10월15일 오후 5시였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것이었다. 질병으로 인한 보증 석방제도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조선총독부 판사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사안이었다. 대일본제국의 영토에 변경을 가할 우려가 있고, 신성한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려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병보석 출옥… 폐결핵 3기 진단


그럼에도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함은 그만큼 병세가 위중했음을 뜻했다. 형무소 문 앞에는 출감을 반기는 가족과 동지들이 여럿 모여 있었지만 누구도 조리환과 말을 나누지 못했다. 그는 언어조차 자유로이 하기 어려울 만큼 중태였기 때문이다. 조리환은 곧바로 서울 시내 정동에 있는 ‘이성용의원’으로 직행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폐결핵 치료에 성가가 높은 젊은 의학박사가 개원한 병원이었다. 의사는 우려를 표명했다. “지금 진찰해봤는데, 폐 양쪽이 모두 상해서 아무래도 안심하기 어렵습니다.”1

폐결핵 3기 진단이 나왔다. 외부인 면회를 일절 허용해서는 안 되는 엄중한 상태였다. 조리환의 서울 체류지는 안국동 98번지였다. 방 하나를 빌려 세 든 집이었다. 종로경찰서 관할구역이었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자의 동정’을 사찰하는 것은 그 경찰서의 소관 업무였다. 사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안국동과 정동 사이를 전차로 오가면서 통원 치료에 전념했다. 출옥 후 10개월 즈음에 조리환의 병세는 상당히 호전돼 있었다. 이따금 내방객이 찾아와서 긴 대화를 나누는데, 조금도 피로한 형색을 보이지 않았다. 1928년 8월1일에는 고향인 충남 당진 사람 3명이 찾아와 긴 시간에 걸쳐 대담을 했는데도 심신이 거뜬한 것처럼 보였다.

그해 8월10일이었다. 담당 형사는 조리환이 숙소에 머물러 있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다. 이부자리와 살림살이가 평소와 다름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침에 외출했다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형사는 그의 부재를 인지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통원 치료차 외출했다가 미처 귀가하지 않은, 자주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경찰이 낌새를 눈치챈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재차 방문했는데 여전히 부재중이었다. “병세가 거의 호전돼 언제라도 도주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음을 상기한 경찰 당국은 “도주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2 한발 늦었지만 예상 도주 경로에 경계망을 펼쳤다. 하지만 조리환은 탈출 경로와 방법을 오랫동안 숙고해왔음이 틀림없다. 그는 경찰의 수배망에 포착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어떤 방법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었을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행방불명인 채로 세월이 흘렀다. 조리환의 ‘공범들’인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재판이 종료된 지도 7년이 지났다. 1934년 조선일보는 보석 출감 중에 국외로 망명한 사회주의자들을 환기하는 기사를 실었다.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춰버린 까닭에 재판이 중지된 조리환 등에 대해 궁금함을 표했다.3

조리환은 제1세대 사회주의자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1890년대에 출생해 전통적인 한학 소양을 갖추고 있고, 국내외 여러 층위 학교에서 중등 이상의 근대 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이었다. 또 3·1운동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한국 역사상 첫 사회주의자들이 나왔다.

3·1운동 참여로 징역살이 뒤 언론인 활동


조리환은 1897년생이었으므로 제1세대 사회주의자 가운데서 젊은 축에 속했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 애국계몽운동 덕에 설립된 사립학교를 마치고 천주교 신학교에서 2년, 임시측량원양성소에서 1년간 중등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그로 인해 1년간 징역을 살았다. 그가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처음 가담한 것은 감옥에서 나온 뒤 1922년의 일이었다.4 이런 경력은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비밀결사에 가담함과 동시에 대중운동에도 헌신했다. 충남 당진의 1920년대 전반기 운동권을 이끈 두드러진 지도자 역할을 했다. 당진의 신합청년회를 거점으로 삼아 충남청년대회, 충청도청년대회 개최를 주도했고, 당진소작조합을 발기함으로써 농민운동 분야에도 진출했다. 인천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1923년 인천 조선물산소비조합 설립을 추진하는 27명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진과 인천을 한 권역으로 활동한 점이 이채롭다. 충남 서해안 지역은 바닷길로 인천항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육로가 아니라 해로 편으로 인천을 경유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조리환의 사회운동 권역이 당진과 인천 두 곳에 걸쳐 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언론인이었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었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사 당진지국에 소속된 기자였는데, 이듬해에는 중앙 일간지 시대일보사의 사회부 기자로 선임됐다. 1925년 4월에 열린 전조선기자대회에는 시대일보사 본사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기자로서 민완한 취재 능력을 인정받아 특파원으로도 일했다. 1925년 11월 말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존재가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이 속속 검거되던 때였다. 사회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이때 조리환은 신의주 특파원으로 임명됐다.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조리환도 그 비밀결사의 일원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검사위원이었다.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였던 것이다. 짐짓 무관한 척, 신문기자 자격으로 사건에 접근하려던 조리환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그도 신의주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조리환은 경찰 취조 과정에서 된통 당했던 것 같다. 가혹한 고문이 그의 건강을 해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12월12일 검사국으로 송치돼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끙끙 앓아누웠다.

가혹한 고문으로 급격한 건강 악화


감옥 옆방에 수감돼 있던 ‘공범’ 임원근은 조리환이 겪은 고통을 생생히 지켜봤다. 낮에 누워서는 안 되는 감옥 수칙에도 불구하고, 조리환은 허가를 받아 줄곧 누워 있으면서 신음했다고 한다. 감방 문밖에 지키고 서 있는 간수와 청소부 사이의 대화를 엿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정신 상태마저 어지러웠다. 국그릇에 소변을 보려 하고, 빈번히 마개 닫힌 우유병을 입에 댄 채 마시려 했다. 10여 일 동안이나 죽도 먹지 못한 채 앓는 일도 있었다. 지켜보는 임원근은 공포와 불안을 느꼈다. 평소에도 그의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수감 중에 그처럼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5

국외로 망명한 조리환은 어디로 갔는가? 동료 임원근은 그의 안위를 진정으로 걱정했다. “지금 이때 그는 어느 바다, 어느 산골에서 표랑의 밤길을 헤매고 있는지” 궁금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 여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임원근은 “오직 그의 건강한 존재만을 힘껏 축원할 뿐”이라고 기원했다. 어찌 임원근뿐이겠는가. 조리환을 기억하는 동료, 친지, 가족의 마음은 다 같았을 것이다.

조리환은 소련을 망명지로 택했다. 뒷날 작성된 러시아어 문서에는 “1928년 8월12일 중국에서 노보키옙스크를 거쳐 스스로 소련으로 입국했다”고 기재돼 있다.6 중국에서 입국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북간도로 가서 거기서 훈춘을 거쳐 육로를 통해 연해주로 월경했던 것 같다. 노보키옙스크는 1936년 이후 ‘크라스키노’로 개칭됐는데, 조선인들 사이에 연추(煙秋)라고 불리는 조선인 밀집지구였다. 조선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한 곳이었다.

그는 정치망명자로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모프르(МОПР, 국제혁명가후원회)의 지원을 받아 흑해 연안의 풍광 좋은 휴양지 크림반도 지역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얄타 결핵연구소’ ‘알룹카 제르진스키휴양원’ 등지에서 4년 동안 줄곧 치료를 받았다.

조리환이 1932년 거주한 러시아 모스크바 보론초보폴레 거리 3번지 건물. 임경석 제공


건강을 회복한 조리환은 1932년부터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으로 복귀해 혁명운동에 종사하거나 모스크바에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국제당 동방부 앞으로 빈번하게 청원서를 넣었다. 1932년 9월과 11월, 1933년 7월에 작성한 세 종류의 청원서가 남아 있다.

그러나 국제당이 조선인 망명자들을 위해 제공할 수 있었던 사회적 자산은 제한적이었다. 조리환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조교 자격으로 얼마간 일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스탈린 대숙청 광풍 속 불길한 메모


걱정이 든다. 조리환은 스탈린 대숙청의 광풍에는 휩쓸리지 않았는가? 구 스베틀라나가 조사한 스탈린 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는 6339명이다.7 그 속에 조리환의 성명이 포함돼 있는지 여부를 다각적으로 찾아봤다. 다행이다. 그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길한 조짐이 있다. 김단야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이성태의 투서(제1523호 ‘‘열혈 청년’ 이성태는 왜 동지들을 고발했나’ 참조) 속에는 조리환의 이름도 거명돼 있다. 불길한 예감은 유감스럽게도 사실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국제당 간부부장 벨로프가 1939년 3월19일자로 모프르 간부 보그다노프에게 보낸 메모가 남아 있다.

국제당 간부부장 벨로프가 1939년 3월19일자로 모프르 간부 보그다노프에게 보낸 메모. 임경석 제공


“조리환의 예금통장에는 500루블 75코페이카의 잔액이 남아 있고, 800루블의 채권이 있다. 소유주의 사후 상속인이 없으므로 국립은행으로 귀속해야 한다.”8

조리환의 예금과 채권 잔액 귀속 문제에 대한 국제당의 결정 사항을 전하는 이 메모를 통해 우리는 조리환도 스탈린 대숙청의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1. ‘중태인 조리환, 15일 보석 입원’ 조선일보 1927년 10월17일치 2면

2. 경성종로경찰서장, ‘京鍾警高秘제7704호의2, 공산당원 여행에 관한 건’ 1928년 8월11일, 2쪽, ‘學生盟休에 關한 情報綴’(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3. ‘공판 중지 7년간’ 조선일보 1934년 8월16일, 조간 4면

4. 曺利煥, ‘약력’, 1932년 9월9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89 л.16-17

5. 임원근, ‘옥중기(2)’, ‘삼천리’ 제9호, 1930년 10월, 45쪽

6. А.Ратнек, Справка no.3714 Чо-Ли-Хван(조리환 확인증), 7 марта 1936г, РГАСПИ ф.495 оп.495 д.228 л.1

7. 구 스베틀라나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번역, ‘스탈린 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전 3권)’, 독립기념관, 2019

8. Зав.отделоь Кадров ИККИ Велов(국제당집행부 간부부장 벨로프). ЦК МОПР Тов.Вогданову на Ваш запрос от 7.Ⅲ.1939г.(모프르 중앙위 보그다노프 동무 앞, 1939년 3월7일자 귀하의 문의에 대해), 1939년 3월19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89 л.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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