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 메뉴판에서 ‘ㅉㅉㅁ’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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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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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중식당’ 189곳 메뉴판 전수조사


서울 을지로에 있는 ‘가야성’은 문을 연 지 40년 넘은 터줏대감 중식당이다. 석 달 전 직원 이모씨(60)는 벽면에 널찍하게 붙은 메뉴판 한쪽을 종이로 가려뒀다. ‘일석이조’ 글자 아래로 ‘짬짜면(짬뽕 짜장면) 8000원’ 등 메뉴와 가격이 적혀 있던 자리다.

“손이 많이 가니까 그렇지. 바쁠 때 손님들이 한 명씩 와서 짬짜면 시키면 일이 안 돼버려.” 지난 6일 오후 2시쯤, 이씨가 점심 손님들이 사용했던 앞접시를 닦아 높게 쌓아올리며 말했다. 이씨는 “짬짜면 외에도 요일별로 나눠서 팔던 볶짜면(볶음밥 짜장면), 탕짬면(탕수육 짬뽕) 등 반반 메뉴를 모두 메뉴판에서 가렸다”고 말했다.

짬짜면이 사라졌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고민을 종식할 혁신으로 주목받았던 중식당의 주요 메뉴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경향신문이 지난 8일 기준 네이버 지도에서 ‘광화문 짜장면’으로 검색해 나온 데이터를 전수 분석한 결과 중식당 189곳 중 28곳(15.3%)만 메뉴판에 짬짜면을 남겨두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메뉴를 보기 어려운 곳은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가서 확인했다. 검색된 결과 전체(312건)에서 마라탕 전문점이나 코스요리 중식당, 폐업한 식당 등(123곳)은 분석에서 제외했다.

네이버에서 ‘광화문 중식당’으로 검색되는 가게 중 온라인상 메뉴판에 짬짜면이 있는 28곳을 표시한 지도. 짬짜면 판매를 중단했으나 온라인 메뉴판을 수정하지 않은 곳도 있어 실제 수는 더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은 기자


소석택씨(43) 가족이 운영하는 ‘영화루’는 10년 가까이 짬짜면을 팔다가 2018년 5월 중단했다. 소씨는 인건비와 재료값 상승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했다. “짬짜면이 단순히 짜장 반, 짬뽕 반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죠. 짜장면 야채랑 짬뽕 야채를 동시에 볶아야 하는데, 한 사람이 할 일을 2명이 해야 하는 거예요.”

소씨는 “짬짜면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짜장이나 짬뽕 단품 메뉴보다 1.5배는 더 되지만 가격을 그 정도로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이제 홀에서 쓰던 짬짜면 그릇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짬짜면 실종 현상은 그릇상가에서도 확인된다. 서울 중구 황학동 주방거리에 있는 도매상점 ‘주방뱅크’에서 일하는 서정남씨(60)는 “가운데 칸막이가 있는 짬짜면용 그릇은 15년 전 한창 많이 팔리다가 5~6년 전쯤부터 거래량이 반토막 난 후 최근까지 계속 줄어들었다”면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석 달에 한 번꼴로 찾는 사람이 있었는데 올해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거래하는 공장에서도 짬짜면 그릇이 단종된 곳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소비자 반응은 어떨까. 직장인 오은석씨(29)는 ‘중화요리 마니아’다. 대학생 때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중식당을 찾는다. 그는 “파는 곳이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메뉴판에서 짬짜면을 찾는 손님 자체를 못봤다”면서 “짜장과 짬뽕, 둘 중 어느 하나도 푸짐하게 먹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인기도 시들해진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커뮤니티에는 ‘짬짜면’ 키워드 게시글로 “하나를 포기하는 어른의 자세를 배우지 못한 자들을 위한 발명품” “짜장과 짬뽕을 둘 다 먹어서 만족스러운 게 아니라 2개 다 제대로 먹지 않은 느낌” 등의 내용이 올라와 있다.

지난 6일 서울 을지로에 있는 중식당 가야성의 메뉴판. 짬짜면 등 ‘반반 메뉴’가 적힌 자리가 종이로 가려져 있다. 강은 기자


수요와 공급이 모두 줄고 있으나 꿋꿋이 짬짜면으로 승부를 보는 식당도 있다. 이용호씨(49)가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중식당은 짬짜면을 1만3000원에 판매한다. 짜장면(9500원), 짬뽕(1만1000원)과 비교하면 가격이 꽤 높은 편이다. 이씨는 “짜장면, 짬뽕, 짬짜면의 판매 비율을 따지면 짬짜면이 5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짬짜면을 메뉴판 상단에 놓고 주력 메뉴로 홍보하고 있다”면서 “짬짜면 그릇을 세척하기도 번거롭고,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격을 올려 받는다면 장사가 오히려 잘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칸막이가 있는 그릇에 짜장면과 짬뽕을 절반씩 넣어 파는 짬짜면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진 1997~1998년 처음 생겨났다고 알려져 있다. 경제가 어렵던 시기 돈 벌 방법을 궁리하던 그릇공장 사장이 중국집에서 짜장과 짬뽕을 하나씩 시켜 나눠 먹는 연인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고안했다는 등 여러 탄생설이 있다. 무명의 연극배우인 김정환씨가 1999년 반반 그릇을 특허 출원했다는 이야기가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적도 있다.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는 “짬짜면은 시대가 낳은 메뉴였으나 태생적인 맛의 구조적 한계에 인건비 상승 등이 겹치면서 메뉴 개발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고 말했다. 그는 “짬짜면은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맛을 즐기고 싶다는 심리에서 나온 ‘불황형 메뉴’의 일종이었다”면서 “요즘은 흑돼지 스태미나 짬뽕이나 트러플 짜장 등 중화요리 메뉴에서 고급화가 이뤄지는 추세”라고 했다.

서울 종로구 중식당 ‘영화루’를 운영하는 소석택씨(43)가 지난 6일 가게에서 짬짜면 그릇 을 보여주고 있다. 강은 기자


정 칼럼니스트는 반반 메뉴 단점도 언급했다. 그는 “짬짜면은 국물이 있고 없고, 달고 맵고 등 정반대 특성을 가진 주식(主食)을 모아놓고 먹는 음식”이라며 “먹는 사람으로서는 밥과 햄버거, 혹은 비빔밥과 볶음밥을 같이 먹는 것처럼 음식이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다른 반반 메뉴 중에서도 만들기 번거롭고 고객 만족도도 높지 않은 것이 많다”며 “요식업이 전문화될수록 맛이 조화롭지 않은 반반 메뉴는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몇년 전 등장해 반짝 유행했던 반반 커피, 반반 빙수, 반반 파스타 등 각종 반반 메뉴는 기대만큼의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고 있다.

짬짜면이 사라진 현상에서 ‘선택’에 관한 인간 심리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헝거’(hunger·갈망)가 있는데 막상 고민했던 것을 모두 가지게 되면 그 갈망이 줄어들게 된다”면서 “짬짜면의 경우 획득된 재화에 대한 욕구가 줄어드는 심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짜장과 짬뽕을 먹고 싶다는 심리에는 어느 하나를 메인으로 먹고 나머지는 맛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본다”면서 “메인과 서브가 아니라 정확히 절반씩 주는 것은 소비자가 기대했던 게 아닐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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