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힘이 세다
경기장에 난입한 어린이 팬이 안전요원에 이끌려 퇴장당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팬의 머리를 쓰다듬는 특유의 다정함을 감추지 못했던 손흥민(토트넘) 선수. 상대팀의 팬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득점은 “동료(또는 팀) 덕분”이라고 공을 돌리는 그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인성도 월클(월드 클래스)”이라는 극찬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국가대표 손흥민을 사랑하는 이유는 비단 축구 실력뿐만이 아님을 그의 ‘엄한 아버지’ 손웅정씨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정(情)의 시대는 각자도생 사회를 만나 온기를 잃었다. 친절함은 사라지고 선의는 아둔함으로 각인되는 세상에서 다정은 약점이 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 더 다정할 필요가 있다. 삭막해진 사회에서 놓치고 있는 다정함의 온기를, 잊고 있던 다정함의 가치를 찾아봤다.
어떤 다정함은 존중에서 시작된다
미국의 유명 MC인 코넌 오브라이언은 NBC <투나잇 쇼> 고별 방송에서 “절대 시니컬하게 굴지 말라. 그것은 어디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만약 네가 열심히 살고 친절하게 행동한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당시 방송사 내부 갈등으로 밀려나가는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절대 시니컬하게 굴지 말라.
그것은 어디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_코넌 오브라이언
인문학 재단에서 일하는 고한성씨는 대중 강연을 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모 교수를 연사로 섭외하며 오브라이언이 언급했던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정중한 거절에도 섭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고씨는 교수의 논문을 찾아 읽고 그의 관점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간곡함을 담아 메일을 썼고 그 결과 ‘수락’이라는 응답을 얻었다.
고씨는 “마침내 만나게 된 교수님께서 ‘참 다정하게 나를 초청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다정하게’라는 네 글자의 힘이 무척 크게 느껴졌다”며 “다정의 힘은 가늠할 수 없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듯 두 사람,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고은지 작가의 에세이 <너의 하루가 시원하길 바라>에는 “은은한 햇살이 빙하를 녹이고 작은 위로가 언 마음을 녹이듯 너의 다정함은 그런 것이다. 햇살같이 따스하고 편안한 것. 그럼에도 결코 약하지 않은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세 살 쌍둥이 형제를 둔 박영환·정수정씨 역시 지난달 아이들과 함께 찾은 동네 식당에서 ‘햇살같이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낮잠 시간을 놓쳐 칭얼거리는 아이들 탓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부부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 서둘러 밥값을 계산하려 일어났다. 그때 주방에서 뛰어나온 식당 주인이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주인의 손에는 부부가 주문했던 메뉴와 같은 음식 2인분과 밑반찬, 김치 등이 담긴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박씨는 “나이가 지긋한 사장님께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잠깐 봐주고 싶은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 또한 불편해한다고 들어 그러지 못했다. 집에 가서 차분히 먹어라. 속이 든든해야 힘을 낼 수 있다’고 하시는데 울컥 눈물이 났다”며 “주방에서 내내 힐끔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저 이상한 분이라 생각하고 경계했던 나를 돌아봤다. 각박한 세상에 길들어 다정함을 잊고 살았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죄송했다”고 말했다.
호의는 호의로 돌아온다
다수의 학자가 밝혀낸 다정함의 기능은 다면적이다. 다정한 행동은 상대방이 존중받고 지지받고 있다는 감정이 들게 한다. 또한 갈등이나 스트레스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탱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강화한다. 이렇게 돈독해진 유대감은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동체 문화를 근간으로 해온 한국 사회에서 정은 가치 있는 대상이었다. 서로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기반으로 한 다정함은 이웃 간의 결속력을 높이고 개인에게 소속감을 주며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다정은 ‘빛’이 아닌 ‘빚’이 됐다. 자연히 다정의 농도 또한 희석되는 분위기다.
대학생 최준형씨는 “어느 순간부터 ‘시니컬하다’ ‘시크하다’는 말이 ‘쿨함’의 대명사가 됐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표현을 이런 단어들로 포장하면서 솔직함과 무례함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면서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는 등의 밈이 떠도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각박해져 가고 있는가를 실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직장인 박혜영씨도 “간혹 후배들을 도와주거나 오지랖을 부려볼까 하다가도 ‘꼰대’라는 말을 들을까 망설여진다.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것 같다”며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행해져야 할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가 기이하게 느껴진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집단주의 해체가 가속화되면서 다정의 문화가 사라지게 됐다고 해석한다. 이동휘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IMF 이후 서구식 개인주의가 유입됐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합리적 시민의식은 미처 따라오지 못한 듯 보인다”며 “그러다 보니 책임은 다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만 강조하는 문화, 호의를 권리로 당연시하는 문화가 팽배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성·합리 내세운 ‘쿨함’
또는 쿨함을 가장한 무례함에
지치고 상처받는 현대인들
다정함은 재능이자 전략
존중받는다는 느낌 주고 관계 강화
세련되게 연대감 이어가는 방식
또한 이 교수는 “다정함은 상호호혜성이 담보되는 문화일 때 활성화되는데 현재 한국을 관통하는 흐름은 ‘손해 보지 말자’와 ‘내 가족 중심주의’다”라고 짚었다. 그는 특히 익명이 보장되는 공간에서는 타인에 대한 신랄한 비난과 공격이 난무하고 있는 점을 우려했다. 이 교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발현되고 역지사지 인식, 공감적 이해, 인권과 윤리의식에 대한 학습이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불경기가 지속되고 불공정한 사회가 이어지면서 혐오와 분노가 증폭되고, 그 과정에서 다정함이 줄어들게 됐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정미연 사회학자는 “다정이 미덕이었던 과거와 달리 사회적 불안과 불경기를 겪으며 자란 MZ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사고와 삶의 방식을 보인다”며 “내 삶의 여유가 없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자신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지금의 삭막함을 유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술의 발전과 소셜미디어의 보편화 역시 감정의 전달과 다정한 태도를 단순하게 무력화시켰다는 의견도 있다. 김형선 관계 전문가는 “사람들은 대화하면서 호감을 느끼고 배려라는 매너를 습득하게 되는데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감정 표현이 서툴어졌다”고 말한다. 또한 “대화 방식도 온·오프라인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카톡 이모티콘이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다정은 병? 다정은 재능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7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는 지구를 구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아내를 향해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엄중한 상황에서 다소 뜬금없이 들렸던 그의 말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것
_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중에서
정신의학 교수 켈리 하딩의 책 <다정함의 과학>에는 흥미로운 실험이 등장한다. 조지아대 생명공학과 네렘 교수팀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토끼들에게 몇달간 고지방 사료를 먹이고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박동수, 혈압을 측정했다. 몇달 후 모든 토끼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졌고 심장마비나 뇌졸중에 걸릴 확률이 올라갔다.
그런데 유독 한 무리의 토끼들만 혈관에 쌓인 지방 성분이 60%나 적었다. 특정 연구원이 먹이를 준 무리였다. 해당 연구원은 토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 말을 걸고 껴안고 쓰다듬었다. ‘고지방 식단이 심장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실험이 “병에 걸리는 토끼와 건강을 유지하는 토끼를 나누는 것은 식단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애정”이라는 명제를 증명한 셈이다.
다정함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넘어 인류를 이끌어온 힘이기도 하다. 진화 인류학을 연구하는 브라이언 헤어 박사와 저널리스트 버네사 우즈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라고 기술했다.
병에 걸리는 토끼와
건강을 유지하는 토끼를
나누는 것은 식단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애정이다
_켈리 하딩의 책 <다정함의 과학> 중에서
현대사회에 다정의 역할을 대입한다면 좀 더 세련되게 연대감을 이어가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재은 MBC 아나운서는 저서 <다정한 말이 똑똑한 말을 이깁니다>에서 “다정한 말하기는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사람을 마주하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다정은 다채로운 표현을 허용한다. 정답이 없기에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소통 전문가 방유리씨는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착한 말로, 기분을 어루만지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다정은 재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그는 “이 재능은 후천적으로도 길러진다”며 “지금까지의 세상은 다정함이 있어 유지됐다. 모두가 할 수 있고, 모두가 해야 하는 원칙인 셈”이라고 말했다.
다정은 모두의 몫이다
초등학생인 수아양은 최근 네 차례 큰 수술을 이겨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오랜만의 등교에 잔뜩 기대하고 교실로 들어섰지만 그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다. 서운함과 당혹감을 보이던 찰나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들고 오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서야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깜짝 이벤트였음을 깨달았다. 따뜻한 배려에 감동한 수아양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배운 친구들 역시 덩달아 눈물을 훔쳤다. 친구들은 당분간 휠체어를 타고 생활해야 하는 그를 ‘공주’라고 칭하며 “밥을 먹을 때도 한 숟갈씩 먹여주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수아양의 이야기는 ‘학생을 울렸습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영상을 제작한 김창용 교사는 “앞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모두가 함께 고민해 내놓은 선물”이라며 “교직 생활을 하며 바라본 교실은 따뜻함과 다정함이 머무는 공간이다. 아이들의 순수함 덕이다. 그 힘이 우리 사회로도 퍼져나가길 희망하며 영상을 공개했다”고 전했다.
다정함은 모두의 몫이다. 누구나 다정함의 조각을 이어갈 수 있다. 김현희 상담심리학자는 “관계 불화 상담을 하다 보면 ‘따뜻한 말 한마디만 있었어도’라는 가정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행위, 걱정하고 공감해주는 한마디가 행복의 원천이 되고 다정한 사회를 만든다”며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거창한 행동이 아닌 일상의 작은 배려, 즉 다정함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른 듯 보이지만 다정은 우리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보물이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