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 여성들 외면할 수 없다”···프랑스 임신 중지 ‘비범죄화’ 이끈 베이유 전 장관[시스루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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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3.06. 오후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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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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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이유 전 프랑스 보건부 장관. 위키피디아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이 1974년 11월 프랑스 파리 국회의사당 연단에 올랐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뒤로한 채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보건부 장관으로서, 여성으로서, 국회 밖 사람으로서 이 나라의 선출직 공무원들께 임신 중지 관련법 변화를 제안하기 위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여성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굴욕감과 충격을 주는 30만 건의 임신 중지 시술을 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남성 481명, 여성 9명으로 이뤄진 국회의원들 앞에서 목소리를 낸 이는 시몬 베이유 당시 보건부 장관이었다. 그는 지난 4일(현지시간) 프랑스 의회가 헌법에 임신 중지 자유 보장을 명시하는 개헌을 이뤄내기 이전에 임신 중지 비범죄화를 이끈 인물이다.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베이유 전 장관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7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1년 만에 수용소에서 나온 그는 파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뒤 변호사로 일했다. 1956년 법무부 산하 교도소에서 고위 행정직을 맡기 시작했고, 여권 증진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프랑스 감옥에서 여성 수감자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고, 알제리 독립 전쟁 중에 붙잡힌 여성 수감자들이 학대와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들을 현지에서 프랑스로 이송했다.

베이유 전 장관은 1974년 보수 성향의 자크 시라크 내각에서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프랑스의 임신 중지 비범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가톨릭의 영향을 크게 받는 프랑스는 비범죄화 이전까지 임신 중지 시술을 하거나 해당 과정에 관여되면 최대 징역 10년을 받도록 형법에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1971년 여성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를 포함한 343명의 여성은 “나는 임신 중지를 경험했다”며 임신 중지 비범죄화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보비니 아동법원이 16세였을 때 강간을 당한 후 임신 중지 시술을 한 여성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임신 중지 비범죄화 반대 여론이 거셌다. 베이유 전 장관이 형법 개정을 추진하려 하자 집에는 ‘네 자식이나 지옥에 보내라’라고 비난하는 협박 편지가 전해졌다. 집 건물 벽과 차에는 나치당 로고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1974년 11월26일(현지시간) 시몬 베이유 당시 프랑스 보건부 장관이 파리 국회의사당에서 발언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베이유 전 장관은 굴하지 않았다. 1974년 11월26일 의회에 형법 개정안인 이른바 ‘베이유 법’을 제출하고 연설을 하며 국회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는 “어떤 여성도 가벼운 마음으로 임신 중지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비극이다”라며 “임신 중지는 절박한 상황에 대한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법은 그들(임신 중지를 택한 여성들)에게 치욕, 수치, 고독을 선고하고 있다. 이런 괴로운 상황에 부닥친 여성들을 누가 돌보나”라면서 “이들은 매년 3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여성들이며 대부분 그들의 고통과 비극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그의 연설을 들은 국회의원들은 25시간 동안 ‘마라톤 토론’을 시작했다. 의원들의 질의를 받던 베이유 전 장관은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한 의원은 “장관님, 태아를 오븐에 던질 겁니까?”라고 그에게 비아냥대기도 했다. 홀로코스트 당시 독일군이 수용자를 살상하는 방법에 빗댄 것이다.

같은 해 11월 29일, 의회는 찬성 284대 반대 189로 베이유 법을 통과시켰다. 1975년 공포된 이 법은 임신 10주 이내에 임신 중지를 허용한다.

임신 중지 비범죄화 후 프랑스 정부는 임신 중지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하기 시작했다. 1982년부터는 임신 중지 시술 비용 일부를, 2013년부터는 전액을 의료보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1988년 유산 유도제 미페프리스톤 판매가 합법화됐다. 2024년 3월4일에는 임신 중지 자유를 보장한 개헌안이 의회에서 통과했다.

이 밖에 베이유 전 장관은 보건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병원, 청소년 시설 등에서 실내 흡연을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보육 수당과 출산 수당을 주는 정책도 시행했다.

1979년 첫 유럽의회 여성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유럽국 간 통합을 강조하는 활동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국가 간 경계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여성 건강권 향상과 유럽 통합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17년 6월30일 향년 90세로 작고했다. 프랑스 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고인의 시신을 프랑스 역대 위인들이 묻혀있는 파리 팡테옹에 안장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17년 7월5일(현지시각) 프랑스 앵발리드에서 열린 정치가 시몬 베이유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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