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은 매질하는 ‘세이노’에게 왜 고마워하나[2030 ‘내탓’ 설명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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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1.26. 오전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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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 박준은씨(32)가 <세이노의 가르침> 책을 들고 있다. 본인제공


“용수철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당신의 삶을 이 거친 세상에서 우뚝 홀로 세울 수 있도록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피 튀기듯 노력하라.”

지난해 일부 청년들에게 ‘구원’으로 다가온 책이 있다. 자신을 ‘1000억원대 자산가’라고 소개한 저자 ‘세이노’(Say No·필명)의 자기계발서 <세이노의 가르침>이다. 세이노가 2003년~2004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과 온라인 카페에 올린 글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교보문고와 예스24에서 2023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고물가에 불황이 겹쳐 청년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2010년대 유행하던 ‘파이어족’(경제 자립을 이뤄 30~40대에 은퇴하려는 사람들)이나 ‘욜로’(현재 행복을 가장 중점에 두고 소비하는 태도)는 현실성 없는 옛말이 됐다. ‘노오력의 배신’을 말하거나 ‘헬조선’을 탓하는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대신 청년들은 ‘갓생 살기’(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에 도전하거나 ‘거지방’(지출을 보고하는 단체 메신저 대화방)에 들어가 ‘무지출 챌린지’를 하면서 버티고 있다.

‘각자도생’과 ‘노력’을 강조하는 <세이노의 가르침>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청년들에게 ‘실전 생존술’로 다가왔다. 1쇄가 발간된 지난해 3월 첫째 주에는 30대 남성 구매자가 전체의 22.6%(교보문고)로 가장 많았다. 20·30대 독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책의 글귀를 매일 공유하거나 책에 나온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오프라인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세이노의 가르침>에 대해 온라인 서평을 남기거나 독서모임에 참가한 20·30대 독자 6명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들은 20년 전 익명의 자산가가 쓴 이 글들을 “현실적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밑줄 쫙···세이노에 열광하는 청년들


자영업자 최보겸씨(34)가 인스타그램에 공유한 서평(왼쪽 사진). 자영업자 임원우씨(34)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 사진. 본인제공


‘부자 되는 법’뿐만이 아니라 ‘유용한 변호사와 의사를 만날 방법’ ‘남편을 변화시키는 방법’ 등 생활 전반을 다룬 이 책은 입소문을 타고 팬층을 두껍게 확보했다. <세이노의 가르침> 온라인카페 가입자 수는 25일 기준 10만 명이 넘는다. 온라인에는 “인생을 변화시킨 책” “필독도서”라며 추천 글이 쏟아지고, 필사노트 사진이 올라오기도 한다.

청년 독자들은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책을 ‘곱씹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직장인 박기명씨(34)는 <세이노의 가르침>을 “꺼내먹는다”고 표현했다. 책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마음이 해이해지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 도움이 되는 부분을 한 번씩 들춰본다고 했다. 인상깊은 대목은 볼펜으로 밑줄을 긋는다. 지인 10여 명에게 “책을 읽어봐라”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박씨는 지난해 여름 이 책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모임 참가자 8명은 책 내용을 응용해 ‘새 습관 만들기’를 한 달간 진행했다. 박씨는 “이전에는 주말 근무와 야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었는데, 책을 읽고 그런 마음이 아예 없어졌다”며 “회사에 남아서 일을 하는 게 세이노 입장에서는 (성공의) 기본이더라”고 했다.

지인 추천으로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은 자영업자 임원우씨(34)도 가방에 항상 이 책을 넣고 다닌다. 지난해 10월에는 직원들과 책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임씨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책 사진으로 가득하다. “세상의 기준에 맞춰 일하라. 그래야 부자가 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을 사랑한다.” 책의 구절들은 임씨의 인생 모토가 됐다.

자영업자 임원우씨(34·맨 오른쪽)가 지난해 10월 서울 광진구 THE금융서비스 교육장에서 회사 구성원들과 독서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본인제공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책의 서술 방식은 직설적이다. 중간중간 비속어가 나오기도 한다. “가난한 자들의 특성은 버려라” “전쟁터에서 휴머니즘을 찾지 마라”며 개인의 변화를 강조한다. 저자는 “가난은 사회구조적 현상인가” 질문을 던진 뒤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결론내린다.

이 책에 빠져든 이들은 이렇게 “정신 차려라”고 쓴소리를 하는 세이노를 ‘사이다’ ‘간지러운 것을 긁어준 어른’으로 묘사했다. 이름을 알리려고 쓰는 다른 자기계발서와 달리 작가가 이름을 숨기고 책을 PDF파일로 무료로 배포한 것에서 진정성을 느꼈다는 이들도 있다.

이모씨(38)는 평일에는 직장으로,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출근한다. 이씨가 두 개의 직업을 가진 이유는 자녀 둘에게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고 싶어서다. 하지만 세상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물가상승으로 밀가루 등 재룟값이 치솟았다. 이씨는 “빵 두 개에 7000~8000원이니 손님이 두 개 사려다 하나만 사는 게 눈에 보인다”고 했다.

그러던 중 <세이노의 가르침>을 온라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책을 읽었다. 이씨는 “이름을 드러내며 유명세를 이용해 출간을 돈벌이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 같이 힘들었던 입장에서 ‘삶을 되돌아봐라’고 조언하는 부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시대라는 점을 무시 못 한다”면서도 “사회 구조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자기가 바뀌는 게 가장 쉽고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준은씨(32)는 4년간 영어강사로 일하며 원하는 직업에 도전하다 적성을 찾아 카페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룟값은 오르고 인근에 경쟁 카페가 계속 생겨 다른 직업을 찾을까 고민 중이다. “저도 노력을 많이 하면서 사는데, 또래들이 ‘미라클 모닝’하는 걸 보면 ‘많이 부족하구나’ 생각이 들 때도 있죠. 친구들은 다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데 ‘나는 저렇게 못 사나’ 부러워할 때도 있었고요.” 박씨는 “경제적 방향성을 잡고 싶다”며 “(세이노는) MBTI T스러운(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성향) 작가님 같았고, 저를 채찍질하는 느낌이 색다르게 다가왔다”고 했다.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다 코로나19 때 일감이 떨어져 사업을 시작한 최보겸씨(34)는 “이 책을 읽으며 혼나는 기분이었다. 다른 책에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책은 ‘잠을 줄여서라도 일을 열심히 해야한다’는 식으로 직설적이어서 좋았다”고 했다.

‘껄끄러움’ 느껴도 “어쩌겠나, 이게 세상인걸”


‘세상 탓하지 마라’라는 책이 건네는 메시지에 거부감을 느끼다가 현실살이를 떠올리며 이내 책 내용에 공감한 이들도 있다.

책에는 “좋아하는 일을 섣불리 하지 마라” “이 사회의 불우한 사람들을 돕고자 사회사업학과를 선택하여 공부하였다면 나중에 월급이 적다느니, 또는 순수학문 전공자들이 취직이 안 되므로 국가적 차원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말이다” 등 구절이 있다.

직장인 허모씨(28)는 연기자를 꿈꿨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자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사업을 접었고 생활비 대출까지 받았고, 지금은 새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허씨는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돈을 많이 못 버는 직업을 택했으면 정부 탓하지 말아라, 네가 선택해놓은 건데 왜 그러냐’ 이런 느낌의 말이 있었다”며 “이쪽 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것 같아서 싫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허씨의 마음은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연기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며 “초반에는 공감이 안 되다가 뒤로 갈수록 조금씩 왜 이 사람이 욕설까지 써가면서 충고를 했는지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피해자 비난하기’ 효과” 우려도


이 책의 인기에는 사회 구조의 개선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니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꿔서라도 각자도생하려는 청년들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박기명씨는 “피도 나고 해야 새살이 돋는다”며 “긍정적 사고방식도 능력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임원우씨는 “기득권과 환경을 개인이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은 유한하다”며 “개인의 능력을 우선 개발해 서로서로 이끌어주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게 현실적”이라고 했다.

책이 강조하는 능력주의와 ‘개인의 노력’이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조차 개인 탓으로 돌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조적 문제의 개선 노력을 방기하거나 폄훼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25일 “피해자를 비난하는 ‘누칼협’(누가 칼로 위협했나) 문화와 이 책의 메시지가 관통한다”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책임 져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는 사회불평등과 사회적 책임을 부정할 수 있고, ‘피해자 비난하기’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양승훈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서평 전문지 ‘서울 리뷰 오브 북스’ 여름호에 쓴 글에서 “세이노의 가르침에 대해 구조적 판단에 기댄 담론적 사회비평을 하는 것은 어쩌면 우스운 일”이라며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주체의 탄생을 짚어 내거나, 절망적 현실에 놓인 개인들을 달달 볶아 대며 채근하는 태도를 폭력적이라 말해 봐야 <세이노의 가르침>을 찾는 이들에게 아무런 가르침도, 반대로 위안도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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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12515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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