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에도 ‘갓생’이 화두다. 서점가에는 갓생을 위한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에 꾸준히 오르고 유통업계 역시 스케줄, 건강 등 다양한 갓생 관련 상품을 출시하며 ‘갓생러(갓생하는 사람)’ 공략에 나섰다.
갓생. 신을 의미하는 ‘갓(god)’과 삶을 의미하는 ‘생(生)’을 조합한 신조어로, 매일 생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부지런하게 사는 인생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해 구인·구직 플랫폼 알바천국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7.4%가 ‘갓생을 추구한다’고 답했다.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무기력·번아웃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언뜻 보기에는 거슬릴 것 없는 희망찬 트렌드다.
그러나 ‘저마다 잘 산다는 기준이 다르다’를 전제조건으로 설정한다면 갓생은 모두에게 좋은 상수가 아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변수가 된다. 문제는 변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갓생을 옹호하는 맹목적인 사회 분위기가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며 발생하는 폐해다.
취업 준비 과정부터 퇴사까지의 여정을 자신의 채널에 소개한 유튜버 유네린은 “나는 ‘갓생’ 사는 줄 알았는데 그냥 과로하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서는 내가 행복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며 갓생의 허점을 꼬집었다.
갓생의 명암은 제이미 배런의 <과부하 인간: 노력하고 성장해서 성공해도 불행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너도나도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그런데 그 몰입이 좀 과한 듯싶다. 동기를 부여하려다 삶에 의욕을 잃고, 완벽해지려 애쓰다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상. 이게 맞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박영한 트렌드 분석가는 “‘갓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인 모습이다. 그렇다 보니 갓생하지 못한 삶의 고달픔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계획적인 삶에서 계획만 남은 삶’ ‘신 같은 삶을 살려다 (과로사해) 신과 마주할 삶’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를 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트렌드가 만들어내는 파장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근면 이데올로기가 만든 ‘성공’ 강박
‘갓생’은 팬데믹과 함께 성장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립의 시간을 보내며 저마다 소소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성취해내는 과정을 통해 암흑기를 견뎌냈다는 이들의 증언과 이 시기 급속도로 늘어난 이와 관련한 키워드 검색량이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오운완’ ‘모닝루틴’ 등 해시태그가 더해진 갓생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소통이 불가했던 시절 함께하는 재미를 더했다. 여기에 유튜브, 틱톡 등에서 갓생을 주제로 한 콘텐츠가 예상치 못한 수익을 내며 너도나도 ‘갓생살이’에 동참, 대척점에 서 있던 ‘욜로’ ‘플렉스’의 인기를 가뿐히 넘어섰다.
2030세대를 중심으로 번진 갓생 열풍은 최근 10대와 4050세대까지 확장, ‘스터디 윗미’(공부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보며 함께 공부하는 것), ‘현금 챌린지’(지정한 현금 한도 내에서만 소비하는 것)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해외에서도 갓생과 일맥상통하는 챌린지를 찾을 수 있다. 일명 ‘댓 걸 챌린지(THAT GIRL CHALLENGE)’로 불리는 이 챌린지는 주로 아침 일찍 일어나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며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루틴을 공유하는 Z세대들의 움직임이다. 틱톡과 유튜브 등을 통해 확산 중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갓생’을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김수명 사회학자는 “한국 사회에서 근면은 근대화와 경제 개발을 성공시킨 마법의 키워드로, 성실함과 책임감 등과 같은 단어와 맥을 같이한다. 반면 휴식은 게으름, 철없음의 범주에서 정의한다. 정반대의 개념이 아님에도 말이다”라며 “‘새벽종이 울리면’ 일어나던 관습이나 ‘아침형 인간’ ‘미러클 모닝’ 등도 이 근면 이데올로기를 만나 미덕으로 포장됐고 현재의 갓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석했다.
매년 10개의 키워드를 예측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조망하는 <트렌드 코리아 2024>가 올해의 단어로 제시한 ‘육각형 인간’과 ‘분초 사회’ 역시 ‘갓생 살기’의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외모, 학력, 자산 등 6개의 꼭짓점으로 이뤄진 육각형 그래프를 충족하는 완벽한 인간을 선망하는 흐름과 이를 위해 시간 사용의 효율성을 극도로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 언제는 ‘노오오오오력’ 이라며
동시에 ‘갓생’은 치열해진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대학생 정모연씨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노오오오력’으로 폄훼하던 열정이 갓생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을 보면 그만큼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방증”이라며 “갓생을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을 보장하는 길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가끔은 ‘최소한 갓생은 했자나’라는 자기 위로와 변명을 위한 방패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자조했다.
갓생은 암묵적 강요와 이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서슴지 않는다. 10년 차 주부 공영은씨는 “아이가 태어난 뒤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여전히 주변에서는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다시 취업할 생각은 없어?’ 같은 질문을 한다”며 “뚜렷한 결과물이 없으면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이 상황이 가끔 ‘갓생 가스라이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토로한다.
빼곡한 계획에 ‘번아웃 증후군’(극심한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열정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호소하는 이들의 고충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올해 고3이 되는 박시호양은 새해를 맞아 ‘갓생템’이라 불리는 타이머를 사고 해야 할 일을 적은 ‘투 두 리스트’를 체크할 수 있는 다이어리도 샀다. 그러나 거창했던 시작은 ‘작심삼일’로 막을 내렸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역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박양은 “공부를 할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획대로 해내지 못하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하루의 계획을 끝내지 못하니 숨이 막혔고 내려놓자니 갓생을 사는 친구들에게 뒤처질까 불안했다”고 후유증을 전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정형화된 갓생의 이미지가 기준이 됐다는 점이다. ‘건강하고 진취적이며 행복한 삶’으로 포장된 갓생은 개개인 상황과 조건은 고려되지 않은 채 ‘모닝루틴’ ‘명상’ 등 정제된 단어 속에 매몰됐다. 직장인 김혜정씨는 “누구나 할 수 있음 직한 리스트들이 실패라는 단어를 만나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둔갑했다”며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다시 열심히 산다는 이미지에 나를 욱여넣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활이 반복되더라” 낙담했다.
■ ‘걍생’도 나쁘지 않더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갓생’에 반대하며 ‘탈갓생’을 선언한 이들도 눈에 띈다. 30대 직장인 이진주씨는 요즘 ‘걍생’살이 중이다. 그가 정의한 ‘걍생’은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에는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주변인에게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걍(그냥)’ 사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속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갓생러’였다. “갓생은 곧 신과 같은 삶”이라 정의했던 그는 새벽 5시에 기상해 명상하고 건강한 재료로 만든 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섰다. 이동 시간에는 유튜브와 뉴스레터 등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정보를 확인하고 회사에서는 분 단위로 움직이며 일을 해냈다. 퇴근 후의 삶도 바빴다. 매일 운동과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에 힘썼고, 잠들기 전에는 오늘에 대해 반성하고 내일을 위한 계획을 세우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으며 힘을 냈다.
혹독한 노력이 동반된 삶이었지만 남은 것은 피로뿐이었다. 오후 2시만 되면 병든 닭처럼 졸았고, 업무 생산성이 높아지기는커녕 뚝 떨어져 차질이 생겼다. 결국 그는 ‘미러클 모닝’을 포기‘당’했다. 방법을 바꿔 ‘갓생살이’를 이어갔지만 아쉬움은 지속됐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더 몸을 혹사하기도 했다.
변화는 ‘본질을 잊고 목적도 없이 열심히 사는 것에만 몰두하는’ 딜레마에서 벗어나면서부터다. 이씨는 “애초 나를 기준으로 한 갓생이 아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는 ‘나는 수준 미달 인생’이라 자책한 것이다. 잘 살려고 시작한 갓생인데 잘 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웃었다.
갓생을 내려놓으니 여유가 생겼다. 생산성과 효율성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도 찾았다. 그는 “한발 떨어져 보니 그냥 살기도 쉽지 않더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 우리는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만 이를 간과한다”고 강조했다.
■ ‘미생’이면 어때서?
크리에이터 개으른은 인스타툰 ‘게으름 사용법(@sloth.adult)’을 연재 중인 작가다. 애초 ‘게으름뱅이의 갓생 도전기’라는 콘셉트로 시작했지만 필명이 주는 어감에서 유추할 수 있듯 부지런함과 거리가 멀었던 그에게 갓생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이 있다. 나처럼 반복적인 일상에 쉽게 싫증을 내거나 계획을 세우는 데 서툰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 이건 기질의 차이이지 의지의 차이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를 주목한 또 다른 이유는 단순한 실패 변명이라 하기에는 묵직하게 다가오는 ‘갓생론’ 때문이다. 그는 “‘아침의 나라’라는 의미를 품은 조선부터 ‘빠름( 82)’을 품은 국가 번호까지, 나아가 ‘무척 바쁘시죠’가 칭찬인 우리 사회는 갓생에 최적화된 나라다. 그러니 부지런히 사는 것이 정답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우리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지 ‘갓’생을 살 수 있는 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갓생’의 부작용은 강박감이다. 그는 “무리하게 갓생을 지속하는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형식에 매달리는 경우를 많이 봤다. 기계처럼 시간과 생산한 것들에 대한 셈에 민감해지게 되더라”며 “갓생의 원동력인 인정 욕구까지 더해지면 그때부터 갓생은 강박이 된다. 그러다 보니 흐름이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혐오하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인스타툰에는 ‘활성뇌’와 ‘휴식뇌’가 등장한다. 효율, 의식, 이성, 논리를 담당하는 활성뇌만큼이나 무의식, 직관, 감정, 창의를 담당하는 휴식뇌도 역할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강박은 닫힌 사고를 하게 하고 예민하게 만들 뿐”이라며 “또한 이는 최선을 다하는 것과 별개의 것이다. 개성이나 자기애를 넘어서는 ‘갓생’보다 ‘미완’의 인생도 나쁘지 않음을 돌아보면 좋겠다”고 설파했다.
■ ‘갓생’도 답이 아니라면?
미국의 대표적 온라인 미디어 버즈피드의 수석작가이자 뉴욕타임스 기고가인 앤 헬렌 피터슨는 저서 <요즘 애들>에서 ‘밀레니얼은 어떻게 번아웃 세대가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며 “일시적 병증이 아닌 우리 시대 상태이며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직시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김현두 자기계발연구소장은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시간부터 가져보면 좋겠다. 즉 방향을 정하라는 의미”라며 “그다음에는 신체와 정신력을 키울 수 있는 기초 체력을 쌓아야 한다. 삶을 확장하기 위한 다양한 경험, 실천은 마지막 순서”라고 강조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 역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목표를 세우는 것에 집중해 보면 좋겠다”며 “‘새벽 5시에 일어나기’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강아지와 산책하기’처럼 소소하지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