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콩강변 ‘츨롱’ 지역에 수놓인 동화책, 아이들의 눈은 반짝반짝[잘했어, 츨롱 친구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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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1.21. 오후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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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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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한수빈 기자


“뭐이, 삐, 바이, 부언, 쁘람.”

지난달 31일 오전 8시30분(현지시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190㎞가량 떨어진 크라티에주 츨롱에 있는 비알깐생 초등학교 교문에 들어서자 숫자 1부터 5를 세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파란색 지붕 아래 교실에 들어가자 1학년 40여명이 교실에 있었다. 선생님이 빨대 다섯 개를 들어 올리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건 몇 개일까요? 나와서 숫자를 글자로 적어볼까요?” 그러자 아이들이 검지를 들고 일제히 “저요!저요!”를 외쳤다. 한 남자아이가 파란색 보드마커로 칠판에 ‘ប្រាំ(크메르 문자로 5)’를 적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잘했어” 칭찬했다. 목소리가 제일 컸던 밍 키앙(5)에게 ‘오늘 숫자 세는 걸 배웠는데 어땠냐’고 물어보니 “행복하다”고 답했다.

11월20일은 전 세계 아동의 기본 권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유엔이 지정한 ‘세계 어린이의 날’이다. 1954년 지정됐고, 1989년 같은 날 유엔 총회는 아동권리협약을 채택했다. 경향신문은 세계 어린이의 날을 앞두고 캄보디아 츨롱 지역을 방문해 농촌 어린이들의 문해 교육 현장을 두루두루 살펴봤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쓴 2020년과 2021년, 다른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거두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캄보디아의 교육 환경은 악화했다. 어려운 경제 사정과 사교육 인프라가 부족해 공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더욱 고립된 처지였다. 캄보디아 교육부는 “온라인으로 교육하겠다”고 했지만 19.4%에 불과한 캄보디아의 가정 내 컴퓨터 보급률(2022년 6월 기준)로는 학교 교육의 빈자리를 메우기 어려웠다. 캄보디아에서도 농촌 상황은 더욱 나빴다. 어린이까지도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은 고스란히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시간이 됐다.

코로나19가 잦아든 지금 캄보디아의 어린이들은 코로나19로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이겨내고 있었다. 메콩강변에 위치한 츨롱 지역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질문하자 옆 친구에게 질세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들러 캄보디아 전래동화책을 읽었다. 글자 맞히기 게임에서 임무를 성공하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요”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어요.” 세상을 조금씩 더 알게 된 어린이들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꿈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비알깐생 초등학생의 ‘특별한’ 쉬는 시간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지난달 31일, 프놈펜에서 차로 6시간을 달려 츨롱 지역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는 오와 열이 가지런하게 맞춰진 플랜테이션(대규모 상업 농장)용 고무나무가 보였다. 올해 두 번째 심어졌다는 벼 사이사이로는 햇볕이 내리 쬈다. 이날 낮 최고 기온은 33도였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캄보디아 초등학교의 등·하교 시간은 두 타임으로 나뉜다. 오전 7시에 등교해 오전 11시에 끝나는 반, 오후 1시에 등교해 오후 5시에 끝나는 반이 있다. 오전 수업이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난 8시쯤, 츨롱 지역 곳곳에서는 소를 끌고 가는 어린이들이 눈에 띄었다.

1학년 교실 안에는 글자가 적힌 알록달록한 색종이가 천장에 걸려 있었다. ‘រោងចក្រ(공장)’ ‘ការរៀន(학습)’과 같은, 저학년 친구들에게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벽에는 채소 그림과 그에 해당하는 낱말이 적힌 판과 구구단 표가 붙어 있었다. 캄보디아 아이들은 크메르 문자로 수학, 영어 등 학문을 접한다. 숫자도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크메르어로 보통 표기한다.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크메르어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돌아왔다. 비알깐생 초등학생들은 교실 한 쪽에 놓인 글자 학습 교구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교구는 한국의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함께하는 민·관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올해부터 비치됐다.

흰색 셔츠에 남색 치마 혹은 바지를 교복처럼 입은 1학년 학생 7명이 책상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책상에는 학습 게임판이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크메르 문자 중 모음만 쓰여 있는 판에 자음이 써진 카드를 찍찍이로 붙여 한 음절을 만드는 게임을 했다. “허” “묘” “쏘” 음절이 만들어지자 1학년 친구들은 자신감 있게 글자를 읽었다.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교탁 옆에서는 여자 어린이 둘이 과일이 그려진 그림판을 바닥에 두고 앉아 있었다. 한 학생은 망고 그림과 ‘ស្វាយ’라고 적힌 글자를 고사리손으로 가리키며 “쓰와이”라고 말했다. 다른 학생은 ‘មង្ឃុត’ 글자를 보곤 “몽콧(망고스틴)”이라고 소리를 냈다.

담임 교사 파이삐 써이(29)는 “이전에는 아이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교구가 생긴 뒤로 교실 안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한다”며 “교구를 빌려 가겠다는 학생도 있다. 성적이 부진한 학생에게는 교구를 집에 가져가서 공부하도록 독려하고 있다”고 했다.

“읽기대회 상 받고 싶어요”···방과 후에도 도서관은 문전성시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하교 하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오전 11시가 되자 교문 앞에는 아이들을 데리러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끌고 온 학부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교실에서 뛰쳐나와 바로 부모 품에 안겼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도서관은 비알깐생 초등학생들의 또 다른 방과 후 놀이터다. 6학년 옛 끔엿(12)은 매일같이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태블릿 PC로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블릿 화면에 나온 새 그림을 누르자 크메르 글자 하나가 띄워졌다. 그러자 옛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꺼” “자오” 하며 새가 낸 소리를 따라 했다.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학생이 태블릿PC를 이용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TV, 태블릿PC 등을 활용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다른 학생 4명은 의자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도서관에는 2만5500권의 책이 있다. 책장 아래에는 저학년을 위한 그림책이, 위에는 고학년을 위한 두툼한 책이 있었다. 학교는 수요조사를 거쳐 학생들이 읽고 싶어하는 책을 꾸준히 사 모으고 있다.

몇몇 어린이는 도서관에 있는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캄보디아 교육부에서 만든 크메르어 수업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리딩 챔피언’에서 상을 받고 싶다고 했다. 리딩 챔피언은 전교생 책 읽기 대회로, 학교는 크메르 문자로 적힌 책을 잘 읽는 어린이에게 상을 준다.

오두막 1층에 모인 어린이들


츨롱 지역의 집은 외양부터 한국과 달랐다. 가옥 1층은 나무 기둥만 둔 채 공간을 비워두고, 2층에 생활공간을 두는 형태의 집이었다. 땅속 습기가 집 안에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가옥 형태라고 한다.

이런 형태의 집에서 1층의 남는 공간을 활용해 만든 읽기 공부방이 ‘리딩 캠프’다. 리딩 캠프도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KOICA가 민·관협력사업으로 만들었다. 관리와 감독은 비알깐생 초등학교 교장이 맡았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청년 자원봉사자들이 어린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친다. 이런 식의 리딩 캠프는 츨롱 지역에 18곳이 있다.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리딩캠프(방과후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같은 날 오후 2시쯤,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인 리딩 캠프 한 곳에 도착하자 15명의 어린이들이 부르는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미래가 밝아질 거예요.” 6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동화책, 색연필, 화이트보드 등 교육에 필요한 도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학교 도서관은 학교에 등록된 학생만 갈 수 있지만, 리딩 캠프는 모든 어린이에게 열려 있다. 별도 수업료나 입장료는 없다. 오전 7시30분부터 오전 11시,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리딩캠프가 열리는 시간 중 아무 때나 이곳을 방문할 수 있다.

리딩 캠프에서 어린이들이 지켜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장애 유무, 집안의 재산 정도, 인종 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기’와 ‘다른 친구를 직·간접적으로 위협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쓰지 않기’가 그 원칙이다. 리딩 캠프 벽면에는 이 원칙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학원이 없고, 과외 학습이 흔치 않은 츨롱 지역에서 리딩 캠프는 어린이와 부모 모두에게 소중한 곳이다. 어린이들은 해결하기 어려운 학교 숙제가 있으면 자원봉사자나 다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며 자극을 받기도 한다. 하루 평균 30명이 리딩 캠프를 찾는다고 한다.

지난 10월31일 캄보디아 크라티에 비알깐생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0.31 한수빈 기자


자원봉사자는 마을에서 함께 얼굴을 보고 자란 ‘동네 언니’나 ‘동네 형’이다. 거부감 없이 리딩 캠프를 찾을 수 있는 이유다. 리딩 캠프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한 지 3개월 된 쟌 피어룸(21)은 “원래 어린이들은 집에 가면 부모님 일을 돕거나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며 “리딩 캠프가 생긴 뒤에는 아이들이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이곳에 와 하루를 행복하게 보낸다”고 말했다.

쟌은 “부모들은 일을 나가 있으면 자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해했다. 하지만 여기에 오면 공부도 할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어 안심한다”며 “부모님 손에 끌려온 친구들은 처음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곳에 오지만 어느 순간 학습 놀이를 하며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현지 비정부기구(NGO)가 주축이 된 츨롱 지역 초등교육 개선 사업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1단계 사업이 진행됐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1단계 사업 전후 츨롱 지역 초등학교 중퇴율이 4.73%에서 4.13%로 감소한 것으로 집계했다. 올해 2월 시작한 2단계 사업은 오는 2025년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경향신문·초록우산어린이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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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1120060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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