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반도체 산업 "이공계 진학 기피 현상·인재 부족"으로 위기 직면
인식 개선 위해 정부가 석박사 인력 활용해 산학연구 범위 넓혀가야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이나 팹리스 기업들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겪는 것 이상으로 엔지니어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학계나 기업에만 인재 양성을 기댈 게 아니라 정부에서도 반도체 엔지니어가 양성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특히 중위권 학교 출신의 인재가 많이 나와야 업계가 엔지니어 확보 어려움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유재희(사진) 홍익대학교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반도체공학회 부회장)는 7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유 교수는 미국 코넬 대학교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박사를 취득한 시스템반도체 설계 전문가다. 미국 반도체 회사인 Texas Instruments에서 일한 뒤, 2000년대 초 실리콘 밸리 이동통신용 팹리스 반도체 기업 "GCT세미컨덕터" 기술 고문으로 일했다. 이후 국내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및 여러 중소기업 등에서 기술 자문 역할을 맡아왔다.
그런 그는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이공계 진학 기피 현상"과 "인재 부족"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유 교수는 "소부장과 팹리스 기업들을 만나면 엔지니어를 채용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 고충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한 중견 기업이 이공계가 아닌 무용과 출신 학생을 뽑아 엔지니어로 교육하고 있는 것을 봤다. 그만큼 반도체 인재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기술·인재 유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21년 이후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한국과 대만 등 동아시아에 포진해 있던 반도체 제조 공장을 미국 본토로 이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로 인한 반도체 기술 및 인력의 국외 유출 가능성은 이전보다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한국 반도체 엔지니어 모시기에도 적극적이다. 글로벌 3위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최근 국내에서 업종과 경력을 가리지 않고 반도체 인재 채용을 진행했다. 최대 20% 수준의 임금인상과 거주비를 지원하며 구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교수는 이에 대해 "외국 반도체 기업에서 오랜 기간 일해 중역으로 승진된 한국인 엔지니어가 있는지를 찾아보면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한국 엔지니어의 능력이 부족해서 못 올라가는 게 아니다. 초기 근무 조건은 국내보다 좋을 수 있지만, 학생들에게 외국기업으로의 취업은 결코 권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부족한 반도체 인재 수가 우리나라의 존망 자체를 뒤흔드는 요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유 교수는 "현재 우위에 있는 메모리 D램 마저 주도권을 놓치게 되면 우리나라 경제는 영원히 자생력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서울대나 연세대·고려대 출신뿐 아니라 중위권 대학 반도체 인재 양성에 힘써 많은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미국 반도체 패권과 중국의 기술력 추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중진 개발 인력이 확보돼야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정부 부처 내에도 이공계 출신 기술관료가 많아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실제 중국에선 "테크노크라트"라는 이름의 기술관료가 각 부처에 포진해 있다. 중국은 지난 1970년대 기술관료주의 운동을 통해 과학이나 공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당·국가의 주요 직책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수 차례 국가 지도자가 바뀌었지만, 기술관료에 대한 중요성은 유지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22년 중국 20차 당대회에서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 205명 중 기술관료 비율은 49.5%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중국의 미래 경제 개발 전략을 재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 행정부와 정치권 인사들을 보면 대부분 법조계나 경제학 전공 출신이 주도권을 잡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중국은 이공계 출신들이 관료로 대거 포진해 있다"며 "장관뿐 아니라 차관이나 각 부처 과장급에도 기술관료 출신이 많아져야 하고, 그것이 우리나라 경제와 산업 경쟁력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반도체 산업계와 학계가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협업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유 교수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기업 내부에서는 회사 밖 이공계 석박사 인력의 경력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인식이 확산하면서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 기업에 전달되지 않게 하는 요인이 되고, 이공계는 또 한 번 위축되고 있다.
그는 이 같은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선 정부가 반도체 석박사 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산학연구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현재 국내 대학 교수들이 정년을 보장받기 위해선 매년 여러 건의 논문을 게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논문의 수가 교수에 대한 정량 평가로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공계에선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크지 않은 논문도 수시로 발표되고 있다.
유 교수는 "산학연구 내에서 학계는 기업이 직접 하기 어려운 연구에서 성과를 내 미래 기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기업은 학계의 개발 성과를 활용해 수익을 내는 미국 실리콘밸리 식의 방식이 국내에도 꼭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처럼 돈을 벌어오는 기업에게 미래 R&D(연구개발) 기술 로드맵 수행까지 스스로 하라고 하면 이는 무리일 수 있다. 이공계 교수가 기업 기술 발전에 기여하면 이를 대학 내 실적에 반영하고, 기업도 대학교 내 필요한 인력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식의 산학연구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이 같은 변화를 각 대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하게 하기는 어렵고, 정부 차원에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 같은 변화가 디스플레이 산업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부에서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주 하는데, 디스플레이에 대해서는 반도체 관련 분야 정도로만 여기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며 "디스플레이 산업이 무너지면 스마트폰 사업도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변화의 필요성을 꼭 제안하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