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당하는 시대로 돌아갈 뻔 [하종강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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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12.25. 오전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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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송곳’의 한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2002년 공무원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3천명 넘는 공무원이 징계를 당했다. ‘3천여명이 징계당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가정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사건이 3천건 넘게 발생한 것이다. 친분이 있는 해직 공무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 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켜봐야 했다.

2009년 한 방송사에서 ‘시티홀’이라는 20부작 드라마가 방송됐다. 10급 기능직 공무원 신미래씨의 역할을 배우 김선아씨가 맡아 열연했다. 일종의 비정규직 공무원인 신미래씨가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당하게 당선된다. 시장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 시장실보다 먼저 찾아간 곳이 놀랍게도 공무원노동조합 사무실이다.

노조 사무실에 불쑥 들어선 시장이 노조 간부들에게 묻는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제 떡잎은 어때 보이십니까?” 노조 위원장이 답한다. “다른 시장님과 출발선이 다르니 저희는 사실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우호적일 거라는 기대는 말아주십시오.” 그 뒤 짧지 않은 대화가 이어진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무심코 지나쳤겠지만, 징계당한 3천여명의 공무원과 그 가족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아, 우리가 공무원노조를 만드느라고 3천여명이나 징계를 당했는데, 이제는 드라마에도 나오는구나’ 그런 감개무량함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판단해보자. 공무원들을 징계한 정부와 징계당한 노동자들 중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았는가? 2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인류 역사는 수천년 동안 노동자의 주장이 조금씩 실현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가끔 퇴행할 때도 있지만, 긴 호흡으로 인류 역사를 지켜보면 그 방향이 유지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노예제도는 철폐되고, 머슴제도도 사라진 것이다.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시티홀’의 한 장면. 에스비에스 제공

그 결론과 같은 ‘역사의 교훈’을 2015년에 방영된 12부작 드라마 ‘송곳’에서 볼 수 있다. 배우 안내상씨가 역할을 맡았던 주인공 구고신 노동상담소장이 노동자들에게 교육하면서 말한다. “이렇게 모여서 노동법 공부했다고 끌려가서 고문당하지는 않잖아. 여기까지는 왔다고, 우리가….” 그런데 하마터면 다시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시대로 돌아갈 뻔했던 것이 바로 12·3 내란사태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등장했을 때, 나도 궁금해 ‘하종강은 누구인가’라고 한번 물어보았다. 인공지능이 답한다. “하종강은 한국의 노동운동가로 40년간 노동 상담, 강연 등을 해왔습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통닭구이 가게에서 일하면서 노동자의 삶과 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통닭구이 가게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인공지능이 사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답하는데 어느 부분이 거짓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거짓말을 했을까? 내가 언론과 했던 인터뷰 중에 “통닭구이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는 내용에 착안한 것인 듯싶다.

그동안 사람들과 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지금은 노동운동한다고 잡혀가서 통닭구이 고문을 당하지는 않으니까”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면 다시 그런 고문을 당하는 시대로 돌아갈 뻔했던 것이 바로 12·3 내란사태였다.

생성형 인공지능(AI)에 ‘하종강은 누구인가’라고 물어봤다. 인공지능은 하종강이 통닭구이 가게에서 일하다가 노동자의 삶과 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언론과 했던 인터뷰 중에 “통닭구이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는 내용에 착안한 것인 듯싶다. 하종강 제공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고 의결되던 무렵 마침 제주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저녁 시간에는 제주시청 앞 집회에 참석해 ‘윤석열정권퇴진·한국사회대전환 제주행동’ 팻말을 들고 잠시 제주도민 노릇을 하기도 했다. 다음날 산자락 한 카페에서 노트북과 전화기의 뉴스 화면을 모두 켜놓은 채,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과정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카페 직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옆에 와 앉았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총 투표수 300표 중, 가 204표”라고 말하는 순간 일행 중 한 사람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안도했다. 관심이 없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2층에서 송년 모임을 하는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경쾌하게 장기자랑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우리 사회다.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계엄령이나 친위 쿠데타에 실패한 다른 나라 대통령은 불과 몇시간 만에 체포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비상계엄 조치가 실패하고 ‘내란’ 혐의를 받고 있음에도 20일이 넘도록 무사하다. 검찰·경찰·군인·국회의원의 상당수가 아직도 비상계엄령을 지지하거나 윤석열에게 충성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경계를 늦추거나 대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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