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앞 “책임은 내가 진다” 명패의 유래…그런데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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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8.30. 오후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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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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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국정브리핑을 하고 있다. 책상에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쓰인 명패가 놓여 있다.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수십 건의 결정을 매일 내립니다. 정부를 돌던 서류는 결국 이 책상에 올라옵니다. 그러면 서류가 갈 곳은 더는 없습니다. 누가 대통령이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구도 대통령을 대신해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게 대통령의 일입니다.”

1953년 1월15일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임기 1945년 4월∼1953년 1월)이 퇴임하며 미국 국민에게 전한 고별 연설 내용이다. 트루먼은 “이 책상에 집중된 권력, 결정에 따르는 책임과 어려움에 있어 지구상에 이런 자리는 없다”는 고뇌를 퇴임사에 담았다.

‘자화자찬’ 비판이 쏟아진 29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 윤 대통령이 앉은 집무실 책상에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쓰인 명패가 놓여 있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방한 때 선물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때도 집무실 책상에 이 패를 놓고 한참 머리발언을 했다.

바이든이 선물한 명패는 트루먼이 대통령의 결정과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를 잊지 않기 위해 백악관 웨스트윙 집무실(오벌 오피스) 책상에 놓아두었던 것을 복제한 것이다.

트루먼의 ‘원조 명패’는 오클라호마주 연방교도소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연방보안관이었던 트루먼의 친구가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비슷한 문구를 보고는 교도소장에게 ‘트루먼 대통령을 위해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 유명한 호두나무 명패는 1945년 10월2일 우편으로 백악관으로 발송됐다.

메리엄-웹스터 등 영어사전을 보면 ‘The buck stops here’라는 말은 ‘책임을 전가하다’라는 뜻인 ‘pass the buck’과 쌍을 이룬다. 미국 개척시대 포커게임에서는 카드를 돌리는 딜러 앞에 사슴뿔(buckhorn)로 만든 나이프를 뒀다고 한다. 딜러를 원치 않으면 ‘벅(buck)’을 옆 사람에게 넘겼는데, 여기서 ‘자기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다’라는 말이 나왔고, 다시 ‘책임은 내가 진다’는 ‘The buck stops here’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바이든은 2019년 대선 당시 트루먼의 유명한 리더십 모토인 ‘책임은 내가 진다’를 선거 캠페인에 활용 하며 경쟁자인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무책임을 공격했다. 그런 바이든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는 정작 이 명패가 없다.

한국 정치에서 트루먼의 경구를 자주 인용한 이는 홍준표 대구시장이다. 홍 시장은 2011년 12월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대표 때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중앙선관위원회 디도스 공격 사태 등으로 사퇴 압박을 받았다. 유승민·원희룡·남경필 최고위원이 동반 사퇴한 날 트위터에 ‘THE BUCK STOPS HERE!’를 남겼고, 이틀 뒤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대표 때인 2018년 6·13 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 참패가 예상되자 페이스북에 또다시 ‘THE BUCK STOPS HERE!’를 남기고, 이튿날 사퇴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가진 KBS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녹화를 마친 뒤 박장범 KBS 앵커에게 집무실 책상에 놓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선물인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명패를 소개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나 정치인 중에 자신의 정치 철학을 기댈 만한 인물이 없었을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 앞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고, 한미동맹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윤 대통령이 70여년 전 미국 대통령이 금과옥조로 삼았던 ‘책임 정치’ 경구라도 마음 깊이 새겼으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책임 정치 부재는 윤 대통령의 이른바 ‘딱딱 책임론’으로 상징된다. 이태원 참사 뒤 정부 책임이 불거지자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막연하게 정부 책임이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채 상병 사망사건에서도 되풀이됐다. 김건희 여사 의혹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관을 자처하며 면피성 발언을 내놓고 있다. 윤 대통령이 책임지고 완수하겠다는 의료개혁은 의-정 충돌, 당정 갈등으로 출구를 못 찾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고별 연설에서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었던 대통령의 결정’ 중 하나로 한국전쟁에 젊은 병사들을 보낸 일을 들었다.

“젊은이들을 다시 전쟁터에 보내는 결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입니다. 그래서 군인이 무슨 일을 겪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부모와 가족이 겪는 고통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내린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믿는 바로 그 결정입니다. 국민이 그 결정에 흔쾌히 동의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윤 대통령 임기 중에 대통령이 책임지는 결정을 볼 수 있을까. 전 정부 책임을 자주 거론하는 윤 대통령에게 ‘PASS THE BUCK!’ 명패가 배송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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