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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작업할 곳은 137부터 158까지고요. 뭐… 중요한 건 안전. 사고 예방을 좀 해야 되고 작업하면서 위험한 게 있나 없나 잘 보세요.”
아침 7시50분, 안전교육이 끝났다.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굉음을 내는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컨테이너 모양의 공장 한쪽에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 12명이 서서 ‘안전 교육’을 받았다. 한국어였다. 안전교육이 끝난 뒤 이들은 눈치껏 흩어져 기계 앞에 자리잡았다.
한달 전인 지난달 24일 경기도 화성 공장에서 리튬 배터리가 폭발해 화재가 발생했다. 23명이 숨졌다. 18명이 이주노동자였고 대부분이 일용직이었으며, 15명은 여자였다. 인력 사무소 노릇을 한 메이셀을 통해 아리셀에 사실상 파견돼 일했다. 참사 발생 뒤 정부는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를 열어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산업안전 강화 방안을 마련하고 정책이 실효성 있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참사 한달, 경기도 화성의 조립 공장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상당수의 일용직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은 인력사무소를 통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공장에 배정됐고, 제대로 된 안전교육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겨레는 지난 19일 참사 희생자들의 경로를 따라 경기도 화성의 인력사무소를 거쳐 공장에 일용직으로 취업했다.
아침 6시40분 인력사무소: 다국적 여성 노동자
“저 오늘 처음 왔는데, 취업하려면 뭐 써야 하나요?” “그냥 저기 앉아 있으세요.” 아침 6시40분께 화성의 한 인력사무소 사장의 말을 듣고 사무실을 둘러보니 30명 정도의 이주여성이 소파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일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발에 파란 눈동자, 히잡을 두른 앳된 얼굴, 이따금 들려오는 중국 억양. 출신 국가는 다양했다.
누구도 오늘 하루 어느 곳에서 어떤 조건으로 일하게 될지 몰랐다. 한국어는 서툴렀다. 8개월 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는 방글라데시 여성이 영어로 말했다. “처음 왔어? 난 일한 지 한달 됐어요. 자리 나는 곳에서 부르면 가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새로운 공장에 가요.”
아침 7시께 인력사무소 사장이 몇명을 가리키며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젊고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이들이 1순위였다. 밖에 나와보라는 사장을 따라가자 “주민등록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답하니, 손사래를 치며 “(주민등록증) 안 줘도 된다. 있기만 하면 된다”며 6공장이라고 써진 포스트잇을 붙인 작업확인서를 건넸다. 곧장 승합차에 타라고 했다.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도 묻지 않았다.
이날의 일터는 어떤 곳인지, 승합차를 운전하는 인력사무소 직원을 통해서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순 없었다. “ㄱ공업 갈 건데, 아마 자동차 부품 조립하는 곳일 거야. 몇시까지 일하는지랑 얼마 받는지는 가서 물어보면 돼. 퇴근 30분 전에 전화만 줘.” 직원은 휴가철인 탓에 공장에 일감이 없어 한국인부터 데려가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공장에 한국인 직원이 많으냐는 질문엔 고개를 저었다. “에이, 외국인이 훨씬 많지. 가보면 알아.”
노동자와 공장이 서로의 정보를 모른 채 성사된 취업은, 오늘 나의 노동이 불법인지 합법인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게 했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일용직 근로계약서’ 작성은 이뤄지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인력사무소를 통한 파견근무를 하게 된 셈인데, 파견법은 제조업 직접 생산 공정에 노동자 파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시적·간헐적으로 인력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노동자 파견이 가능하지만, 이날 하게 될 일이 정말 일시적·간헐적인 업무인지 또한 모호했다.
존재 자체가 불법과 편법의 경계에 있는 와중에, 법대로 안전교육을 해달라는 요구는 언감생심이었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1시간 이상의 안전교육을 해야 한다는 산업안전보건법 29조는 1분짜리 설명으로 대체됐다. 근무시간을 묻자 “일 시작도 안 했는데 퇴근시간을 묻느냐”는 면박만 돌아왔다.
아침 8시 공장: 보이지 않는 소화기
주눅 든 채 플라스틱 부품을 상자에 담는 노동자들 사이를 기웃거리자 중국동포 노동자가 면장갑을 건네며 부품 포장 방법을 일러줬다. 140, 141, 153, 154, 155번 기계에서 나오는 플라스틱을 조립해 상자에 담고, 한 상자가 채워질 때마다 컴퓨터에서 뽑아온 라벨과 테이프를 붙여 카트 위에 올렸다. 네 상자가 쌓일 때마다 카트를 끌고 공장 입구로 가서 상자를 쌓았다. 틈틈이 새 박스를 접고 빗자루로 기계 주변을 쓸었다. 이날 ㄱ공업 6공장에서 주간 포장 업무를 하는 6명은 전부 여성이었고 그중 4명은 이주노동자였다. 한쪽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는 대답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국인이 여기를 와요? 여기는 다 이주노동자들이야.”
‘다 이주노동자들’이었지만, 외국어로 된 안전보건표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계에 한국어와 함께 걸려 있는 타이어 매뉴얼이 유일한 외국어였는데, ‘금속탐지기에서 알람이 울리면 작업을 정지하고 관리자에게 보고한다’는 알람 발생 시 행동요령이 전부였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사업주가 안전보건표지를 노동자의 모국어로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한달 전 참사의 처참함을 의식하며, 스스로 눈치껏 안전을 확보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노동자의 작업반경은 기계 5대 정도 사이를 오가는 데 불과했고, 이를 넘어서 공장 전체의 지형지물을 파악할 여유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불이 난다면 어디로 대피해야 할지, 출입구는 어디에 몇개가 있는지, 소화기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화기를 발견한 건 일을 시작한 지 3시간여가 지난 오전 11시께 물어물어 찾은 화장실 옆에서였다.
낮 2시 기계 앞: 까마득한 안전
물 마실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노동 강도 역시 안전을 까마득히 잊게 만들었다. 140번 기계에서 나온 플라스틱의 포장을 끝내고 정신없이 뛰어 나머지 기계들에 다녀오면 140번은 또다시 수십개의 플라스틱을 뱉어내고 있었다. 진동하는 굉음과 플라스틱 태우는 냄새, 열기에 머리가 핑 돌았다. 이날 바깥 기온은 30도가 넘었지만 공장 냉방시설은 선풍기가 유일했다. 갓 나온 플라스틱을 잡으면 장갑 안까지 열기가 스몄다.
1시간의 점심시간과 15분씩 2번의 휴게시간이 있었지만 모두가 한번에 쉴 수 없었다. 다른 노동자가 점심을 먹으러 가면 돌아올 때까지 더 많은 기계를 맡아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멍한 상태로 ‘버티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된 사이 “작업하면서 위험한 게 있나 없나 잘 보라”는 공장 관리자의 짧은 안전 주의사항은 아득해졌다.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던 오후 6시께, 중국동포 노동자에게 “퇴근할 때 어떤 걸 적어야 하냐”고 묻자 인력사무소에서 준 작업확인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일한 지 10시간 만에 처음으로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말하게 된 순간이었다. 진위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작업확인서에 ‘직종: 여자, 이름: 고나린, 등록번호: 010-××××-××××(휴대전화 번호)’를 적고 “사인은 대리님이 해야 하니 잠깐 기다리라”고 말했다.
저녁 7시: 유령 노동
상·하의, 속옷까지 온통 땀에 젖고 난 저녁 7시가 되어서야 공장 밖으로 나와 허리를 폈다. 그제야 생각했다. ‘이날 내 노동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산업단지와 공장을 잘 아는 이들은 “만연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했고, 전문가들은 “불법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했다.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형철(가명)씨는 6공장 구내식당에 저녁밥을 나르고 있었다. 그는 “잔업하는 사람이 있어서 저녁을 가져왔다”며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베트남… 국적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일용직 노동자는 근로자 수에 안 들어가니까 (근로자 수에 따른 규제를 피하려고) 공단 내 회사들이 거의 이주민이나 일용직을 쓴다”고 했다.
경기도에서 인력파견업체를 10년 넘게 운영한 중국동포 ㄴ씨는 “남자들은 보통 공사 현장으로 가고 여자들은 공단으로 많이 가서 인력사무소에 이주여성들이 특히 많았을 것”이라며 “일용직이라도 인력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을 확인하지만, 인력사무소와 공장이 친한 사이여서 서로 봐주는 관행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저녁 7시20분께 인력사무소 이름이 적힌 20인용 버스가 공장에 들어서며 경적을 울렸다. 노년 여성 2명과 젊은 남성 2명이 지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력사무소에 도착해 작업확인서를 내밀자 사장은 펜으로 이름을 죽 긋고 현금 10만6천원을 건넸다. 인력은 제공됐지만 노동의 기록은 남지 않았다. 아리셀 또한 참사 초기 실종된 노동자의 명단 확인을 두고 혼란이 일었는데, 그 배경엔 노동자 정보를 정확히 기록하지 않은 관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안전교육, 다국어 안전보건표지가 없던 것도 불법이고 근로계약서 미작성, 임금명세서 미교부 역시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며 “서류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 노동’은 고용노동부의 사후 단속도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말했다. 박천응 안산이주민센터 센터장도 “하물며 한국인 일용직 노동자에게도 불법이 만연한데, 말도 안 통하고 글도 모르는 이주노동자는 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다. 아리셀 참사는 하나의 사례일 뿐, 달라진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날의 노동을 기억하는 건 통성명조차 제대로 못 해본 동료들뿐이다. ㄱ공업 6공장의 이주노동자들은 지친 기색을 보이면서도 공장을 찾은 ‘낯선 이방인’에게 손짓발짓으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했다. 한 이주여성은 서툰 한국어로 “언니, 핸드폰 보면 혼나. 박스 안에 넣어서 숨겨서 해. 그러면 안 걸려”라고 말했다. 금발의 노동자는 사무실에서 쿠키와 우유를 꺼내와 건넸고, 옆 건물에서 일하던 남성들은 상자를 쌓을 때마다 멀리서 달려와 그냥 놔두라는 손짓을 하며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리셀 참사 희생자들처럼, 모두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타국의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