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보도연맹 가입시키고, 전선 어렵자 모두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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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10. 오전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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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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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문경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62명 진실규명
군경에 의한 경북 문경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현장인 문경군(현 문경시) 영순면 의곡리 야산(애까매 고개). 사진 속 신청인은 애까매 고개로 불리던 곳을 희생 현장 중 한 곳으로 지목하였다. 이 사건 당시 현장까지 연결된 차도가 없어 인근까지 트럭으로 싣고 간 뒤에 희생자들을 내리게 한 뒤 현장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 제공

한국전쟁 전후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 등으로 경찰에 예비검속되어 인근 야산과 고개에서 집단살해된 경북 문경 지역 민간인 학살 피해자 62명이 74년 만에 진실규명(피해 확인) 결정을 받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9일 오전 제82차 전체위원회에서 김아무개씨 등이 신청한 ‘경북 문경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에 대해 진실규명하기로 의결하고 “국가는 민간인을 적법절차 없이 살해하고 유족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회복과 추모사업 지원 등 후속조치를 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이 사건과 관련된 국방부·법무부·경찰청 등 책임이 있는 기관은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은 1950년 7월 문경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 62명이 국민보도연맹원 또는 요시찰인이라는 이유 등으로 예비검속돼 같은 해 7월5일경 문경군(현 문경시) 농암면 사현리 뭉우리재, 7월15일경 호서남면 유곡리 야산, 7월17일경 영순면 의곡리 야산 등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일이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문경 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 시기와 장소의 양상은 1950년 7월16일부터 25일까지 문경읍-유곡-점촌 도로를 중심으로 북한군 1사단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한국전쟁기 문경 지역 전선 상황과 맞닿아 있다. 문경 지역 대부분의 예비검속은 국군 제6사단이 문경 북부에 집결한 1950년 7월12일에서 14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후 북부 전선의 돌파 위기가 닥쳐온 1950년 7월15일 후방 방어선 구축 지역인 유곡리에서 1차 집단 총살이 이루어졌고, 문경 정면의 방어진지가 돌파된 7월16일과 17일엔 문경 최남단인 영순면 의곡리에서 2차 집단 총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 대부분이 가입된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표방하며 조직됐다. 각 지역 도 본부가 1949년 11월에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한 달 뒤인 12월에는 시·군지부가 결성됐는데, 문경군 국민보도연맹도 이 즈음에 만들어져 가입을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청인과 참고인이 진실화해위에 한 진술에 따르면, 문경 지역 주민들의 경우 좌익활동 등과 관계없이 마을 이장(구장)의 권유나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이 가입 도장을 찍어주는 등의 행위로 인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당시 경찰업무를 보조했던 한 참고인은 “(국민)보도연맹은 사상 활동을 했던 사람은 소수였고, 인원을 증원시키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애꿎은 사람들을 가입시켰다”라고 진술했다. 1950년 7월 초순부터 문경경찰서 소속 경찰들은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을 소집하거나 연행했는데, 경찰은 연행이나 소집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평소와 비슷한 교육을 한다고 하거나 특별한 명분 없이 잠깐 볼일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소집 또는 연행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각 지서로 소집된 사람들은 지서에 일시 구금되었다가 문경경찰서로 보내졌다. 국민보도연맹원 등은 문경경찰서에서는 3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15일경 호서남면 유곡리 야산, 7월17일경 영순면 의곡리 야산 등지에서 사살되었다. 신청인 김아무개(1947년생, 희생자 김△△씨 동생)씨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김△△은 농사지었고,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1950년 7월 중순 마성 지서에서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였고, 김△△은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대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지서로 갔다가 살해당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김△△ 등 상내리 국민보도연맹원들은 마성 지서에 며칠간 구금됐으며, 1950년 7월15일경 군용 트럭에 실려 문경군 호서남면 유곡리 야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사망 현장으로 갔지만 시신이 많고 부패가 심해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문경 지역 민간인 학살은 국민보도연맹 예비검속 사건 이전, 해방 직후인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불붙은 ‘10월 항쟁’(10월 사건)부터 이어졌다. 문경에서는 10월3일 오전 1시경 수만 명의 주민이 봉기해서 읍내를 포위하여 통신망을 절단하고 군청·재판소·경찰서·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불태웠다. 문경의 봉기는 10월5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미군과 충남 경찰부대 등이 투입돼 진압됐으나, 시위대 등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후 1948년 여순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문경에서는 인근 산에 입산한 빨치산(이른바 ‘공비’)들과 군경의 대치가 이어졌다. 1949년 10월23일에는 빨치산 20여 명이 점촌읍에 있는 문경 탄광을 습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하고, 농암지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도 잇달았다. 1946년 10월항쟁 이후로 계속된 문경지역의 빨치산 토벌은 1949년 12월 석달마을의 민간인 집단 희생을 불러오기도 했다. 1949년 12월 24일 국군 제2사단 제25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2소대 및 제3소대 소속 군인 70명은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앞 논과 야산에서 석달마을 주민을 86명을 집단총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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