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으로 귀순하려는 북한 병사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의 제목은 왜 ‘탈출’이 아니라 ‘탈주’가 됐을까?
3일 개봉하는 이제훈, 구교환 주연의 영화 ‘탈주’는 ‘탈북’이라는 흔하고 낡아 보이기까지 한 소재를 완전히 새롭게 그렸다. 감독, 시나리오 작가, 주연배우들까지 1980년대생이 상상하고 표현하는 북한은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여준다.
전방 10년 복무 뒤 제대를 앞둔 규남(이제훈)은 깊은 밤마다 소리 없이 뛰면서 남한 귀순을 위한 지도를 만든다. 하지만 규남의 계획을 엿본 동혁(홍사빈)이 먼저 탈출을 시도하면서 규남까지 체포된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온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은 어린 시절 알고 지낸 규남을 영웅으로 둔갑시키며 실적을 올리는데 규남이 탈출을 감행하며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진다.
‘탈주’를 연출한 이종필 감독은 ‘공작’의 권성휘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저서 ‘천개의 고원’을 떠올렸다. “도망이나 회피가 아니라 기존의 세계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꾀하는 것”으로서 ‘탈주’가 제목으로 새겨졌다. “실패할 수 있는” 자유를 꿈꾸는 규남에게 남한은 자유를 주는 실체가 아니라 꿈속에 나오는 환상 같은 곳이다. “귀순병사가 아니라 지역이든, 직장이든 지금 여기를 탈출하고 싶은 모든 이의 보편적인 이야기”의 배경으로 “비슷한 얼굴, 같은 언어를 쓰지만 외국보다 낯선” 북한이 선택된 이유다. 좌우 이념이라는 강박을 벗어던진 세대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현상은 이런 시선이 응축된 캐릭터다. 현상은 탈출 사건 브리핑을 들으면서 립밤과 보습 크림을 꼼꼼히 바른다. 엘리트 집안에서 자라나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 현상은 야심 있고 위계를 이용할 줄 아는 전형적인 북한군 같지만 순간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놀이에 염증을 드러내는 돌발적 행동을 한다. 규남이 꿈을 위해 쉬지 않고 남쪽으로 내달리면서 이 영화의 날렵한 속도감을 담당한다면 현상은 끝을 알 수 없는 욕망의 미로에서 헤매는 인물로, 규남을 따라 숨이 가빠오는 관객의 마음을 잡아 세운다.
집요하게 규남을 추격하던 현상은 뒤로 갈수록 마치 규남의 일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교환은 인터뷰에서 “규남은 현상이 꾸는 꿈”이라고 말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묻어두고 있던 어린 시절 꿈이 규남의 탈주로 다시 고개를 들면서 현상은 혼란에 빠진다. 몸은 규남을 쫓지만 무의식의 한 구석은 규남의 해방을 기대한다. 구교환은 “현상의 시작과 엔딩의 얼굴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가면을 벗는다는 개념으로 엔딩에 도착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현상의 엔딩이 패배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
이종필 감독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을 통해 보여준 장르적 재미와 오티티(OTT) 시리즈 ‘박하경 여행기’에서 보여준 예술적 깊이감의 균형을 절묘하게 잡으며 군더더기 없이 팽팽하게 달려가는 94분의 러닝타임을 완성했다. 전통의 흥행사들이 가라앉은 영화판에서 새로운 세대의 비상을 예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