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언론개혁,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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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6.19. 오후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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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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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DJ 국정노트 (23)

신년기자회견 앞두고 박지원 급히 호출
회견문 보여주며 ‘언론개혁’ 생각 물어
박 “대통령께 언론사 세무조사 반대”
DJ, 따로 불러서 박지원 설득 나서
2001년 1월1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 대통령은 ‘언론개혁’을 강하게 촉구했다. 20일 뒤 국세청은 사상 처음으로 23개 중앙언론사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며칠 앞둔 2001년 1월 둘째 주 일요일이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박지원씨(김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도 지냈다. 현재 국회의원)는 갑자기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장관직을 그만두고 공식 직책은 없을 때였지만, 박지원 의원에 대한 디제이(DJ) 신임은 여전히 두터웠다. 박 의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전화를 받고 점심 무렵에 청와대 관저로 올라갔습니다. 대통령이 한광옥 비서실장 등과 함께 거실에 앉아 계시더라고요. 제가 가니까 기자회견문을 주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그래요. 죽 보니까 남북관계와 경제 정책 등에서 좋은 내용이 많은데, 눈에 띄는 게 언론개혁에 관한 대목이더군요. 딱 한 대목 들어 있는데, 이게 확 눈에 들어와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회견문에 참 좋은 내용이 많은데 언론은 그런 거 하나도 보도하지 않을 겁니다. 언론개혁이 이슈가 될 겁니다. 이게 신년 기자회견을 다 가릴 수 있으니 이 대목을 넣는 데 저는 반대합니다.’ 대통령이 아무 말씀이 없어요. 그러더니 다른 참모들은 다 내려가라고 하고 저만 안방으로 따로 불렀어요. 저는 다시 ‘언론개혁을 정 얘기하시려면 신년 기자회견에선 빼고 나중에 별도로 말씀하십시오. 이거 넣으면 신년 기자회견이 다 묻힙니다’라고 말했어요. 나는 언론사 세무조사도 반대했어요. 그랬더니 대통령이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히 하지 못할 거다. 지금 해야 한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단호한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나흘 뒤인 1월1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 날 아침, 청와대 기자실은 술렁였다. 신년 기자회견은 한 해의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행사라, 대통령 회견문(모두 연설문)은 책자로 인쇄해 배포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그날 기자실에 배포한 연설문은 에이(A)4 용지를 복사해 스테이플러로 찍은 것이었다. 급히 만들어진 표시가 역력했다.

회견문에 언론개혁에 관한 언급이 들어가 있는 것도 뜻밖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언론자유는 지금 사상 최대로 보장돼 있습니다. 언론도 공정보도와 책임 있는 비판을 해야 합니다. 국민과 일반 언론인 사이에도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상당히 높습니다. 언론계와 학계, 시민단체, 국회가 합심해 투명하고 공정한 언론개혁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대통령이 공식 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 필요성을 직접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시민사회 단체에선 오래전부터 언론사 정기 세무조사와 혼탁한 광고·판매 시장 정상화, 개인·가족의 신문사 소유지분 제한 등 강도 높은 언론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언론 자율’을 내세우며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드디어 디제이가 언론개혁의 칼을 빼 든 것인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안에서도 극소수의 참모만 언론개혁 대목이 기자회견문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 기자회견 전날 밤, 한겨레신문의 청와대 출입기자는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오래전에 잡은 약속이었다. 광화문 부근 식당에서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수석비서관이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 시각이 지나서 ‘대통령과 기자회견문 독회를 하느라 늦을 거 같다. 기다려달라’는 문자가 왔다. 밤 9시쯤 식당에 들어선 수석비서관에게 “기자회견문은 이미 인쇄에 들어갔을 텐데 왜 다시 독회를 한 거냐? 내용이 바뀐 거냐?”고 물었다. 이 수석비서관은 “중요한 대목이 하나 추가됐는데 내용은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계속 물어도 대답하지 않던 수석비서관은 헤어질 무렵, 좀 미안했던지 “절대 쓰면 안 된다. 오프 더 레코드(보도금지 약속)로, 알고만 있으라.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이 새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16대 대선 직후인 2002년 12월23일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당선자를 만나 국정 인수인계를 하면서 전달한 언론 세무조사에 관한 메모. ‘언론사 세무사찰’이란 제목으로 “1. 국민과 언론인의 압도적 지지 2. 모든 언론기관의 탈세처리 예외 없었다 3. 세무사찰 이후 더 한층 비판의 소리 커져 4. 탈세만 취급. 관료의 언론개혁 입법 주장 거절”이란 내용이 적혀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한겨레신문 기자는 급히 회사에 전화를 걸어 편집국장·정치부장과 시내판에 기사를 쓸지 상의했다. 당연히 1면 톱기사 감이었지만 고민 끝에 쓰지 않기로 했다. 그 무렵 언론 관련 시민단체들은 ‘5년마다 하도록 규정된 언론사 정기 세무조사를 법대로 실시하라’는 시위와 청원을 하고 있었다. 한겨레신문도 사설과 기사로 언론개혁 필요성을 주장하던 때였다. 내일 아침 기자회견에서 공개될 내용인데, 한겨레신문이 먼저 쓰면 ‘청와대와 짜고 친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편집국 수뇌부는 판단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한겨레신문은 다음 날 조간신문 가운데선 거의 유일하게 1면 헤드라인을 ‘언론개혁’으로 뽑았다. 보수 신문들은 모두 김 대통령이 야당과 대립을 불사하는 ‘강한 정치’를 예고했다는 데 1면 헤드라인의 초점을 맞췄다. 그때만 해도 대통령의 언급이 언론사 세무조사로 이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보수 신문들은 김 대통령의 언론개혁 언급에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김 대통령의 언론관이다. … 일부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언론개혁이라는 것이 공정보도와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좌파적인 소유구조 개편을 주장하는 지극히 편협한 소수의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발언의 진의가 무엇인지 확실히 밝혀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언론개혁 발언에 주목한 한겨레신문조차 분석 기사에선 “김 대통령 발언은 언론개혁의 제도화에 강조점이 두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행법상 언론사도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5년에 한 번씩 정기 세무조사를 받게 돼 있지만, 국세청은 이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다. 또 언론사의 부당내부거래에 대해서도 공정거래위에선 눈을 감아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당장 정부가 칼을 빼 들 것 같지는 않다”고 전망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서야 건넌다’는 디제이가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칼을 빼 들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01년 6월29일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한 방송사 기자가 세금추징액이 나타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언론개혁을 두고 집권세력 내부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이 대표하는 ‘보수언론까지 최대한 설득하는 게 국정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현실론이었다. 비판론자들은 이걸 ‘캐시 앤 위스키’(cash and whisky) 전략이라고 흔히 불렀다. 박지원 수석이 차 트렁크에 양주를 가득 싣고, 밤마다 언론사 간부·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며 국정을 홍보하는 걸 빗댄 말이었다. 박지원 수석(현재 5선 국회의원이다)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자들과 술 마신 걸 ‘캐시 앤 위스키’라고 비판한 이들이 있지만, 그건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대선 기간 나는 매일 조·중·동과 방송 3사를 돌아다니며 ‘김대중 집권’을 설득했다. 그렇게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 되셨으니 이젠 언론사 안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디제이가 ‘언론의 협력 없이 외환위기 극복할 수 있겠나. 우리 정부가 성공할 수 있겠나. 앞으로도 매일 언론사 가서 도와달라고 해라. 과거는 잊자고 해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디제이 집권) 5년 내내 기자들을 만났다. 진보 언론보다 보수 언론을 두배는 더 많이 찾아갔다.”

그런 박지원 의원이 언론사 세무조사에 반대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엔 다른 기류도 있었다. ‘캐시 앤 위스키’ 전략은 이미 효용을 상실했으니 집권 초기에 높은 사회적 지지를 활용해서 언론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사저널이 2001년 2월 입수해 보도한 여권의 언론개혁 보고서는 그런 기류를 반영했다. 1998년 집권 초기에 작성된 이 보고서는 재벌과 족벌의 언론 지배, 경영진에 의한 편집권 침해, 지나친 상업화에 따른 시청률·부수 경쟁을 한국 언론의 핵심 문제로 지적하며, 대안으로 재벌·족벌의 소유지분 제한, 언론사 특혜 폐지, 언론 독과점 해소 등의 법적·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기사를 쓴 이숙이 시사저널 기자(현재 시사인 대표이사)는 “이 문건은 민주당에서 언론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그룹의 인사에게서 받았다. 이 그룹은 처음엔 국회 입법을 통해서 언론개혁을 추진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점점 더 어려워지니까, 더는 늦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 (이 이슈를 취재중이던) 나한테 보고서를 주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서 언론개혁에 적극적인 이는 1997년 대선 때 초선 국회의원이던 정동영(문화방송 앵커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정동채(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김한길(김대중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현재 국민통합위원장) 등이었다. 정동채 전 장관의 얘기다.

“대선에서 승리한 뒤 정동영·김한길 의원과 함께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디제이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위스키 앤 캐시’ 전략으론 안 된다, 집권 초기에 언론 개혁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디제이는 별다른 언급 없이 우리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특별히 반박하거나,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박지원 의원 얘기가 나오자 디제이가 한마디 했다. 박지원 의원이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기자들과 술 마시는 걸 김한길 의원이 좀 강한 어조로 비판하자, 디제이가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합니다’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얘기했다. 그날 디제이가 별로 말씀이 없었는데 이 얘기는 분명하게 해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시민사회 요구인 강도 높은 언론개혁 대신에 보수 언론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며 국정운영에 도움을 얻으려는 전략을 폈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수십 년 간 정치인 김대중을 ‘빨갱이’라 공격했던 공영방송사 사장을 무리하게 교체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문화방송(MBC) 이득렬 사장은 1999년까지 잔여 임기를 다 마쳤다. 한국방송(KBS) 사장은 디제이 집권 직후인 1998년 4월 홍두표씨에서 박권상씨(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다)로 바뀌었지만, 홍씨에겐 곧바로 한국관광공사 사장 자리를 마련해줬다.

집권 3년 만에 상황은 급변했다. 김 대통령이 2001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한 건 신호탄이었다. 20일 뒤 국세청은 23개 중앙언론사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를 발표했다. 곧이어 공정거래위원회가 10개 중앙 일간지와 방송 3사의 불공정 거래행위와 내부 부당거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무엇이 김 대통령의 마음을 바꿨을까. 언론을 대하는 디제이의 생각은 정말 바뀐 것일까.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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