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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저기 버스 가버렸네. 여기가 정류장이 아닌가?”
지난 6일 저녁 전북 무주 덕유산 리조트 근처 삼거리에서 덕유산국립공원 대집회장을 가기 위해 셔틀버스를 찾다가 우왕좌왕하던 직장인 한은정씨는 같은 처지의 이들을 만나 차를 얻어타고 다시 셔틀버스를 갈아타며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별이 뜨기 시작한 하늘 아래 너른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면서 그는 말했다. “편하게 찾아올 수 없는 게 무주산골영화제의 특별한 맛인 거 같아요. 불편한 교통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이니까 그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고요. 무엇보다 도심의 영화제들처럼 붐비지 않는 게 좋죠.” 무주산골영화제의 필수품인 돗자리로 가득 찬 잔디 앞 대형 간이 스크린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와 함께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여정을 기록한 영화 ‘크레센도’가 숲 속의 밤을 물들였다.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 무주산골영화제의 인기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이 농담처럼 은정씨도 지난해 처음 이곳에 왔다 반해서 올해 친구와 함께 다시 찾았다. 올해로 12회를 맞은 무주산골영화제는 최근 몇 년 새 가장 ‘핫한’ 영화제로 자리 잡았다. 교통도 불편한 뿐 아니라 흔한 멀티플렉스 하나 들어와 있지 않은 인구 2만3000명, 주민 평균 연령이 쉰을 훌쩍 넘는 이 작은 산골 마을이 매년 6월 초면 전국의 젊은 ‘힙스터’들이 치열한 예매경쟁을 벌이는 곳으로 변모한다.
지난 5일 저녁,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동장으로 꼽히기도 했던 정기용 건축가의 작품인 무주등나무운동장에서 개막식이 열렸다. 개막작은 장건재 감독의 ‘한국이 싫어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던 작품이다. 영화제의 자존심과도 같은 개막작을 처음 공개하는 ‘프리미어’로 하는 건 불문율과도 같았다. 무주영화제를 성공으로 이끈 ‘발상의 전환’이 여기에 있다.
이날 상영한 ‘한국이 싫어서’는 부산에서 상영작과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음악이 중요한 요소인 영화의 음악감독과 연주자들이 등장해 감정이 묻어나는 장면에서 라이브 연주를 했다. 영화 속 클럽 공연이 무대에서 라이브로 재연됐고, 미나로 출연한 김뜻돌이 엔딩크레디트와 함께 공연을 펼쳤다. 돗자리에 앉거나 누워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핸드폰의 불을 켜고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 환호했다.
영화제와 야외 음악페스티벌의 절묘한 결합은 무주영화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날 라이브 공연을 총연출한 장건재 감독은 무주의 단골손님 중 하나다. 2021년 무주를 배경으로 ‘달이 지는 밤’을 연출하기도 했던 장 감독은 “영화 작업에서 탈 중심, 탈서울을 고민할 무렵 무주산골영화제를 알게 됐다”면서 “무주에 오는 영화인들이 칸, 베니스, 베를린, 그리고 무주까지 세계 4대 영화제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충성도가 높은데, 게스트와 관객, 그리고 지역주민이 모두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프로그램들이 섬세하게 조율된 인상”이라고 평가했다.
1회부터 지금까지(3회부터 배우 김혜나와 공동사회) 개막식 사회를 맡은 배우 박철민은 “엄격한 상영 규칙이 있는 영화제들과 달리 무주는 축제 안과 밖, 외지인과 현지인 사이의 경계가 없는 게 특징”이라면서 “교통이 불편해 한번 오면 며칠씩 머물게 되니 게스트나 관객 모두 충분한 쉼의 시간을 선물받는 느낌”이라고 평했다.
더 많은 상영작, 더 많은 프리미어에 초점을 두는 영화제들의 강박에서 벗어나 ‘공간성’에 초점을 둔 큐레이션도 무주의 성공 요인 중 하나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1회부터 영화제 프로그래밍을 이끈 조지훈 부집행위원장 겸 프로그래머는 매년 700~800편씩 쏟아지는 영화의 절반 이상은 예술·독립영화인데 관람 공간도, 관객도 거의 없는 현실에서 프로그램을 착안했다. “제대로 상영기회를 얻지 못하는 좋은 영화도 많은데 작은 영화제에서 무리하게 프리미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면서 “산속 깊은 캠핑장과 마을 등나무운동장, 문화관 강당 등 공간적 특수성에 적합한 영화를 찾아내는데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무주산골영화제의 상징과도 같은 덕유산국립공원 대집회장의 6일 상영작은 ‘크레센도’, 재즈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 류이치 사카모토의 유작 ‘오퍼스’였다. 8일 상영작은 ‘듄’과 ‘듄:파트2’. 해마다 숲 속 야외무대에 어울리면서도 상영작 간의 유기적 연결이 가능한 작품을 두, 세편씩 연이어 상영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등나무운동장은 공간성을 고려한 프로그래밍을 통해 그 가치를 새롭게 발굴한 공간이다. 영화제를 시작할 때까지 이곳은 단순히 동네 운동장으로만 사용됐다. 조 부집행위원장은 “1회 때는 상영 공간이 마땅치 않아 덕유산 리조트에서 행사했는데 좀 더 지역적 특색을 고려한 공간을 찾다 보니 정기용 건축가의 등나무운동장이 다시 보였다”면서 이 곳을 영화제 핵심 공간으로 쓰기 시작했다.
대형 야외 공연·영화 상영을 하는 메인 스테이지와 영화인들의 토크콘서트, 젊은 음악인들의 소규모 공연을 여는 낭만스테이지(서브스테이지), 산골책방, 이벤트 공간 등이 운동장을 채워 영화제가 열리는 5일 내내 북적인다. 등나무운동장은 영화제가 성공하며 반딧불이 축제 등 무주에서 열리는 행사들의 주요 무대로 자리 잡았다.
무주산골영화제라고 처음부터 지역주민을 쉽게 설득한 건 아니다. 처음 영화제 아이디어를 냈던 유기하 집행위원장 역시 초기에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를 부르라는 요구를 받곤 했다. 유 집행위원장은 “가수가 노래하고 먹거리 장터만 키우면 시간이 흘러도 쌓이는 게 없고 평범한 마을 잔치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걸 계속 설득했다”면서 “설득만 한 게 아니고 ‘청춘의 십자로’나 신상옥 감독의 고전 영화들을 개막작으로 선정해 라이브 공연과 접목하며 지역 어르신과 젊은 층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무주산골영화제의 성공 이후 남도영화제, 섬진강마을영화제, 추도 섬 영화제 등 지역성을 영화와 결합한 영화제들이 늘고 있다. 무주는 무료로 상영되던 영화제를 코로나 이후 안전 문제와 관객 불편을 줄이기 위한 예약제 도입으로 지난해 일부 유료로 전환했지만 예매 오픈 직후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매진됐다.
큰 성공은 무주영화제에 큰 숙제를 가져오기도 했다. 엉뚱하게도 너무 큰 인기가 지금 무주산골영화제의 가장 큰 고민이다. 수치화된 관객 수 척도는 무주가 추구하는 성공의 지표가 아닌 탓이다. 또 지난해까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가장 높은 점수로 국내영화제육성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받았던 예산 지원이 올해는 영진위의 영화제 지원 축소로 없어졌다. 올해 개막식 공연과 마지막날 상영 일정이 축소된 이유다. 유 집행위원장은 “인구 2만여 명의 마을이 가진 아름다움과 조용한 분위기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영화제를 찾아오는 이유인 만큼 적정한 수준의 규모를 유지하면서 영화제를 발전시켜나가는 방향을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