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 자극하는 투명한 눈 결정
다음날 새벽, 평창으로 가는 도로는 말끔하게 제설됐다. 밤새 눈을 치운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살살 차를 몰았다. 문재쉼터 입구의 등산로는 눈으로 덮였다. 할 수 없이 운교리 먹골을 들머리로 삼았다. 큰 주차장은 차 대신 눈으로 가득했다.
딸깍. 헤드 랜턴을 켜자 쌓인 눈에서 무언가 반짝반짝 빛났다. 유리처럼 투명한 눈 결정이다. ‘지구 북쪽 끝 눈의 나라로 눈의 여왕을 만나러 가지 않을래?’ 결정들이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듯 동심에 젖어 있다가 뺨을 후려치는 칼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촬촬. 먹골 계곡의 물소리가 들린다. 캄캄한 어둠 속이라 쫑긋 귀가 선다. 랜턴을 껐다.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달려들고,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하다. 번쩍. 별 하나가 긴 꼬리를 그렸다. 궤도를 벗어난 별똥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자녀 서울대 간다는 ‘서울대나무’
동쪽 하늘에 붉은 띠가 걸렸다. 눈 때문에 속도가 늦어져 정상에서 일출을 맞으려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 전망이 나오는 장소를 찾아봤지만, 나무가 빽빽해 시야가 열리지 않았다. 왼쪽으로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큰 소나무가 시야를 가렸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붉은 띠를 뚫고 벙긋 떠올랐다.
삼거리에 닿았다. 먹골과 문재 쉼터에서 오는 길이 여기서 만난다. 정상까지는 500m쯤 남았다. 능선에는 신갈나무 고목이 많은데 가장 특이한 게 일명 ‘서울대나무’다. 나뭇가지가 서울대 정문처럼 절묘하게 굽어 있다. 이 대문으로 5번쯤 드나들면 자녀가 서울대에 간다는 말이 있다.
시야가 툭 터지는 곳이 정상이다. 순백의 눈을 밟으며 정상 등정의 기쁨을 누린다. 백덕산은 정상에서만 전망이 열린다. 동쪽 먼 하늘에 걸린 능선은 정선의 가리왕산(1561m)이다. 1500m 높이의 능선이 그리는 곡선이 한없이 부드럽다. 서쪽 멀리 삼각형처럼 봉곳 솟은 봉우리는 치악산 비로봉(1228m)이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첩첩 산줄기를 감상하다 보면, 세상의 중심에 선 듯 호기로워진다. 따뜻한 볕을 쬐며 마시는 커피가 향긋하다.
속절없이 사라져 더 애틋한 눈
왔던 길을 되짚어간다. 내 발자국에 발자국을 한 번 더 얹는다. 올라올 때 어두워 잘 보지 못했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능선에는 신갈나무 고목들이 많다. 생태가 잘 보존됐다는 뜻이다. 1시간쯤 내려와 낙엽송 숲에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이제 종점이 얼마 안 남았다.
바람이 분다.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바람에 날리며 은빛 커튼을 드리운다. 예사롭지 않은 풍경에 문득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애써 쌓은 눈이 바람에 날려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출발점에 되돌아왔다. 바람결에 홀연 사라진다 해도 풍요로운 눈을 인생에 차곡차곡 쌓는 것이 또 내 할 일이라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