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전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를 열고 반도체특별법법 제정안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려 했지만 다른 법안 심사가 길어지면서 논의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산회했다. 같은 날 오후 한 차례 더 소위를 열 계획이었지만 국민의힘 비상 의원총회 일정 등으로 속개되지 않았다. 이날 소위는 지난달 21일 이후 한 달여 만에 어렵게 열린 것이라 산업계의 기대가 컸다. 지난달 첫 소위에서 여야는 주52시간제 등 쟁점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 했고, 당초 이달 9일 다시 소위를 열어 합의하려 했지만 비상계엄과 탄핵정국에 파묻혔다.
야당은 선택근로제·탄력근무제·특별연장근로제 등 기존 제도로도 필요시 주 52시간 이상의 근무가 가능하고, 논의를 하더라도 주52시간제를 규정한 근로기준법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자위 소속의 한 야당 의원은 “반도체법에서 핵심은 전력·용수 공급 등의 인프라 비용을 기업이 아닌 정부와 지자체가 부담한다는 내용”이라며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에 발이 묶인 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당 측은 근로기준법으로 넘기면 개정 가능성이 더 희박하다고 보고,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한 특별법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도체 기업들도 R&D 인력이 여느 제조업 생산직과 마찬가지로 주52시간제를 적용받으니 글로벌 기술 경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이 커지면서 엔비디아나 대만 TSMC 등 전 세게 반도체 기업들은 차세대 기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 노동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엔비디아는 실리콘밸리의 ‘압력솥’(pressure cooker)으로 불릴만큼 업무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직원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고 보상을 두둑하게 받는다. 이런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화이트 이그젬션(고액 연봉자에 대한 근로시간 규제 예외)을 주장하는 이유다. 최근 안현 SK하이닉스 사장은 한국공학한림원 행사에서 “연구개발에 관성이 붙어야 하는데 주 52시간제가 부정적 습관이나 관행을 만들까 우려스럽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등 노동계는 반발하고 있다. 전삼노는 지난 25일 입장문을 내고 “기업이 무능에서 비롯된 경쟁력 부족을 근로시간제도 탓으로 돌리는 책임 회피”라며 비판했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전 반도체특별법 제정에 기대를 걸었던 업계는 연내 처리 무산 가능성이 커지며 실망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 주요국 기업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치열하게 경쟁하는데 우리 기업만 뒷다리를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목표는커녕 메모리 반도체도 1위를 지키기 어려워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