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철(57) 당시 대한사격연맹 경기력향상위원장만은 반전 카드에 대한 복안이 있었다. 이 위원장은 88서울올림픽 한국 대표팀의 일순위 금메달 후보였지만 예선 탈락한 인물로, 은퇴 번복 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결국 금메달을 땄다. 실패와 영광을 모두 경험한 그는 "금·은·동 색깔까진 모르겠지만 최소 4개는 딸 거"라 확신했다. 결과는 금 3, 은 3. 양궁에 버금가는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경험 적은 무명 위주 대표팀을 구성한 이은철 사격연맹 부회장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또 그토록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토록 놀라운 성과를 냈을까. 지난 16일 만나 5시간 가까이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박수받는 지금 뭐든 그의 뜻대로 개혁해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그는 "양궁협회 같은 선진 시스템을 갖출 방법을 찾아 준비를 마쳤지만, (신명주 사격연맹 회장 퇴진으로) 동력을 잃은 데다 과거 누적된 잘못에 대한 벌을 (지난 6월 신 회장과 함께 실무부회장에 취임한) 내가 받을 수밖에 없다"며 "물러나는 게 맞다"고 했다. 28년만의 올림픽 배드민턴 개인전 금메달의 포효 후 나온 안세영(22)의 폭탄 발언으로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시끄러운 속사정이 일부 드러났는데, 시끄러운 건 배드민턴협회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남다른 인생을 그의 시각으로 정리했다.
선수 선발 개혁은 한국 사격 사상 최악의 실패인 항저우 대회 직후 시작했다. 기록상으론 금메달 2개, 하지만 올림픽 종목이 아니라 사격 강자 중국은 참가도 안 한 종목이었다. 당장 선수촌에서 "올림픽 메달 가능성 없다"며 지원을 줄였다. 우릴 버린 거다.
급한 마음에 수시로 선수촌을 찾아갔지만, 평소 같이 봉사 다니던 친한 형 장재근 촌장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훈련부장·과장한테만 읍소했다. 결과로 보여줘야 했다. 김태호 당시 사격연맹 실무부회장을 설득했다. "잘 쏘는 애들로 바꿔서 도약하지 않으면 우린 끝입니다. "
항저우 직후 21년간 200억원 넘게 후원해온 한화그룹마저 떠나면서 관리단체 일보 직전이었다. 관리단체가 되면 단체 운영의 모든 권한을 대한체육회에 넘겨야 한다. 너무 절박해 투명·공정을 따질 새가 없었다. 김 부회장이 "내 목 걸고 책임질 테니 당신 일을 하라"며 공격을 막아준 덕에 경기력향상위원장(2023) 취임 후 대표팀을 전격 교체하는 무리수를 뒀다. 다행히 지난 2년 동안 고작 8개 확보했던 쿼터를 바뀐 대표팀이 올 2월 월드컵 하나로 7개 더 따냈다. 파리올림픽이 불과 5개월 뒤였다.
"은철아, 뭘 도와줄까. " 성적이 나오자 2월 이후 장 촌장도 달라졌다. "대표 선발전을 싹 바꿀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
허풍이 아니었다. 가혹하리만큼 치열한 5번의 선발전 동안 실력만 있으면 국대가 된다는 희망을 주는 동시에 올림픽 결선 경쟁력까지 잡는 시스템을 항저우 대회가 끝나자마자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10년 넘는 국제심판 경험도 있으니 시스템 만드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모두 수긍하는 시스템 만들기는 어렵다. 이를 위해 경기력향상위원 전원이 자기 종목의 전국 소속팀 코치·감독들을 만나 의견을 묻고 그들이 결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렇게 6개월 넘게 걸렸다. 반발은 있었지만 판이 깨지진 않았다.
이런 쉽지 않은 선수 선발 개혁조차 성공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코치진 선발이 남았다. 처음 경기력향상위원회에 와서 권총 코치 빈자리 하나 놓고 두 파벌이 실력 아닌 자기 사람 심겠다고 싸우는 걸 보고 너무 놀랐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헛된 권력 좇는 걸 기업을 경영해본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양쪽 다 친구였는데, "사격을 썩게 하는 행위"라고 대놓고 비판했다.
더는 이런 유치한 세력 다툼 못 하게 선수 전원을 대상으로 기습 설문조사를 했다. 문항은 수십 개였지만 실은 "현재 코치진 11명 가운데 지도자다운 지도자 3명을 고르라"는 단 하나의 질문을 위한 위장이었다. 그렇게 선택받은 상위 4명만 남았다. 내 둘도 없는 친구 하나도 선택을 못 받아 관뒀다.
인기투표가 아니라 신뢰관계 측정이었다. 국대 코치는 선수에게 기술 가르쳐 실력 올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선수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최고 기록을 쏠 수 있게 관리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실력 있어도 선수와의 신뢰가 무너지면 끝이다. 선수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면 존재 이유가 없다.
이렇게 빈 코치 자리엔 메달이 유력한 선수들에게 맞는 코치를 배정했다. 가령 독보적 1위로 선발됐지만 경력이 짧아 기복이 심한 오예진 선수에겐 심층 인터뷰 끝에 제주여상 시절 홍영옥 감독을 코치로 붙여줬다.
(※이번 파리올림픽 태권도 여자 57㎏급 깜짝 금메달 주인공인 김유진 선수도 소속팀인 울산시체육회 손효봉 감독이 전담 코치로 붙어 성과를 냈다. 반면 역도는 은메달 박혜정과 메달을 못 딴 박주효 선수 모두 코치진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며 대조를 이뤘다. )
실제로 내 선수생활의 시작은 창대했다. 미국에서 고교 다닐 때 전미선수권에 참가해 도쿄(1964)·뮌헨(1972)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올림픽 명예의전당에 들어간 '미국 사격 영웅' 론스 위거(1937~2017)를 꺾었다는 소식이 한국에 전해져 선발전 없이 17세에 1984년 LA 올림픽에 나갔다. 성적은 20위 밖이었어도 다른 한국 선수보다 실력이 월등했다.
급기야 87 전국체전에서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쏴 메달 일순위 기대주로 참가한 88 올림픽에서 예선 탈락하며 날개 없이 추락했다. 나는 패배자였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사격을 시작할 때부터 "널 올림픽 메달리스트 만들겠다"며 직접 실탄까지 만들며 뒷바라지한 어머니한테 "사격 안 한다"고 선언했다. 너무 아팠다. 도망치듯 미국에 가 사격을 잊으려 공부에 매달려 올 A학점을 받고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인 30인'에도 선발됐다.
그런데 기적이 벌어졌다. 페이스메이커인 내가 떠나자 한국 사격이 퇴보했고, "선발전 없이 넣어주겠다"며 90 베이징아시안게임 대표팀 제안이 온 거다. 휴학하고 바로 귀국했다. 1년 반 총을 안 잡았는데 대표팀 합류 3개월 만인 1990년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92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드디어 품었다. 그것도 한 번도 쏴본 적 없는 인생 최고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