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만들고, 풍선 불고…‘손 많이 가는’ 미술관, “시간을 전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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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6.23. 오후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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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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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명 다녀간 리움미술관 ‘필립 파레노’전
크리스마스 트리에 인공눈이 내리고, 물고기 풍선이 둥둥 떠다닌다. 창문에서는 오렌지색 빛이 쏟아져들어와 한층 몽환적인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전시장면. 사진 리움미술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미술관에 전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서히 녹아내리는 눈사람, 거기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라면 시간을 가시화할 수 있을까. 서울 이태원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전시의 한 장면이다. 알제리계 프랑스 미술가 필립 파레노(60)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전시를 만들기로 이름났다. 그러나 이렇게 전시에 ‘생명’을 주려면 ‘손이 많이 간다’.
현대미술 전람회의 ‘이색 알바’…눈사람ㆍ풍선 전담
이 전시를 위해 고용된 아르바이트생 A 씨의 일도 그렇다. 그는 지난 2월 말 전시 개막 때부터 넉 달째 매일 아침 미술관에 출근해 빙수 기계로 얼음을 갈아낸 뒤 6개의 눈사람(‘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을 만든다. 조각의 거푸집처럼, 파레노 스튜디오에서 제작해 온 눈사람 틀에 흙도 넣고 갈아낸 얼음도 넣어 흙 묻는 눈사람을 찍어낸다. 전시장 곳곳에 떠다니는 물고기 모양 풍선들(‘내 방은 또 다른 어항’)에도 헬륨 가스를 주입하고, 지하 전시장 천장에 붙어있다시피 한 투명 말풍선들도 쭈그러들거나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면 잡아내려 헬륨을 넣어둔다.

흙묻은 눈사람은 서서히 녹아 없어지고, 물받이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물 소리는 증폭돼 전시장 스피커로 울린다. 알고리즘에 따른 자동피아노의 연주도 매일 다르다. 권근영 기자

흔히 미술은 회화나 조각 같은 시각예술, 공간예술로 여겨지지만 파레노에게 전시는 시간 예술이다.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은 1995년 일본 도쿄의 한 공원에서 첫선을 보였다. 점심시간마다 이 공원에 모여 식사하는 회사원들을 눈여겨본 파레노는 매일 그 시간에 맞춰 눈사람을 갖다 놓았다. 녹아내리는 눈사람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줬다.

7월 7일까지 열리는 리움미술관 첫 전관 전시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의 한 장면. 천장에 붙은 말풍선들 아래로 시계 태엽의 그림자가 보인다. 뉴스1

아르바이트생 뿐만이 아니다. 전시 제목처럼 여럿의 목소리를 한 공간에 집결시키며 미술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설치작품으로 만든 이 전시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가, 음악가뿐 아니라 인공어를 만든 언어학자, 목소리를 제공한 배우 배두나 등 여럿이 협업했다. 전시는 미술관 앞마당에 설치한 기계탑 ‘막(幕)’부터 시작된다. 기압계ㆍ온도계ㆍ지진계가 촉수처럼 설치돼 주변 환경 요소를 데이터로 변조, 내부에 전시된 미디어 아트를 작동시킨다. 이에 따라 자동 피아노가 연주되며, 오렌지색 인공눈이 내리고(’여름 없는 한 해‘), 시계태엽이 돌아가고, 벽이 움직이고, 전등이 깜빡거린다(’깜빡이는 불빛 56개‘). 전시를 위해 방문한 파레노는 ”미술관은 외부 세계를 향해 등 돌린 닫힌 공간이다. 값비싼 작품이 전시돼 있기에 일종의 버블 같기도 한 이 공간에 틈을 내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바나나 붙이고, 사탕 깔고…'손 많이 가는' 현대미술
오늘날 미술 전시를 유지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설치와 퍼포먼스로 작가의 개념을 시각화하는 현대미술은 전시 개막과 동시에 새로 시작이다. 소장가들에게서 그림을 구해다 걸거나 조각을 골라 놓는 준비가 대부분인 근대 미술과 다른 점이다.

미술 시장 시스템에 대한 도발로 이제 역사에 남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 벽에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가 전부다. 지난해 리움미술관 전시 장면. 연합뉴스

지난해 리움미술관 개관 이래 최다 관객인 25만 명이 몰려든 마우리치오 카텔란(60) 회고전에 걸린 ’코미디언‘도 그랬다. 벽에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가 전부인 이 작품, 미술관은 6개월 가까운 전시 기간 내내 사나흘에 한 번씩 새 바나나로 교체했다. 미술 시장에 대한 도발을 상징하듯 2019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첫선을 보였고, 12만 달러(약 1억 5000만원)에 판매되며 ’역설‘을 완성했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플라시보)'는 사각형으로 깔아둔 사탕 500㎏이다. 2012년 서울 태평로 플라토 전시장면. 중앙포토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1957~96)의 ’무제(플라시보)‘도 그렇다. 은색 셀로판지로 싼 사탕 500㎏을 사각형으로 깔아둔 이 작품의 완성은 관객들이 사탕을 집어가는 순간. 관객들이 하나둘 사탕을 집어 먹으면서 사각형은 서서히 마르고, 흐트러지고, 없어진다. 전시 기간 내내 사탕을 다시 채워놓는 것은 미술관의 몫이다. 실질적 효능 없이 환자들을 달래기 위해 처방되는 위약(僞藥)을 뜻하는 부제로 작가는 에이즈 발병 후 수천 명이 사망하고서야 시작된 미국 정부의 뒤늦은 임상 시험을 겨냥하는 한편 탄생과 소멸의 인생사를 달콤하게 은유한다.
12만명 다녀간 리움미술관 첫 전관 전시
지금 현대 미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필립 파레노 [사진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 최대 규모, 최대 예산이 투입된 필립 파레노의 중간 회고전에는 12만명 가까운 관객이 다녀갔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7번 초대되며 현대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히는 그의 작품은 퐁피두센터, 구겐하임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에 소장돼 있다. 리움미술관 김성원 부관장은 “한 편의 공연과도 같은 그의 전시는 살아 움직이듯 할 뿐 아니라 전시 기간 내내 진화한다. 태어나 자라고 소멸로 향하는 우리들의 삶처럼”이라고 말했다. 7월 7일까지. 성인 1만 8000원.

기자 프로필

보고, 씁니다. 미술경영학 박사. 책 『완전한 이름: 미술사의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 예술가들』(아트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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