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이 진 백자 화병에 꽂힌 백일홍은 54년이 지나도록 차분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캔버스 결이 보일 정도의 잔잔한 붓질로 그린 ‘국화’(1958)도 전시장 앞머리에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도상봉(1902~77)은 백자에 꽂혀 곧 시들어 없어질 꽃에서 지고지순한 이상미를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관에 도상봉의 정물화ㆍ풍경화 16점이 전시됐다.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다.
도상봉은 우리나라 서양화가 1세대다.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창설해 이끌어 나가며 새로운 나라의 미학의 기준을 세우고자 했다. “내가 평생 추구해 온 미술의 세계란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 서양화의 정통을 세우려는 것, 한국 서양화의 아카데미즘을 정립해 보려던 것”이라고 돌아봤다.
어떤 화가들은 여기 평생을 건 끝에 자기만의 그림을 남겼다. 박고석(1917~2002)은 “우리 풍토와 체질에서 공감”하는 회화가 우리 미술이 지향할 방향이라 여겨 북한산ㆍ설악산ㆍ지리산 등 전국의 명산을 여행하며 툭툭 끊듯이 그은 선들로 우리 산세를 속도감 있게 그렸다. 겨울 설악산에서 조난을 당하고도 “십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행운”이라고 했을 정도다.
BTS RM의 소장품으로도 잘 알려진 윤중식(1913~2012)의 그림도 여러 점 출품됐다. 평양 출신으로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마티스의 제자였던 나카가와 기겐에게 배운 윤중식은 아내와 큰딸은 고향에 둔 채 막내 여동생과 아들하고만 월남했다. 여동생은 끝내 굶주려 사망하고, 아들과 단둘이 살았다. 노을 지는 전원 풍경을 즐겨 그려 ‘석양의 화가’라 불렸다.
재료비가 부족해 미군 부대 천막을 캔버스 삼아 그린 김태(1931~2021)의 회화도 대거 기증되면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김태는 생선을 줄에 엮어 해풍에 말리는 건어장 풍경을 즐겨 그렸다. 생전에 "건어는 북한에서 서당 다닐 때 처음 그리기 시작했다. 어촌에서는 서당 수업료를 어물로 대신하곤 했다. 펴서 말리는 물고기가 새가 날아가듯 신기해 보였다"고 돌아봤다.
오지호ㆍ김인승ㆍ박수근ㆍ장욱진ㆍ전혁림 등 33명의 150여 점을 내건 이번 전시 중 이건희 컬렉션은 104점. 전시는 이처럼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이 토대가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만 1560점 중 기증품이 55.6%로 절반이 넘는다. 2018~2020년에는 한 해 기증작이 두 자릿수 수준이었지만 2021년 이건희 컬렉션 1488점 외에도 개인소장가(동산방 박주환 전 대표)와 작가ㆍ유족으로부터 536점이 들어왔다. 이후 2022년 117점, 2023년 297점 등 기증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윤중식 화가의 그림 20점을 기증한 아들 대경 씨는 "이건희 컬렉션이 전국 순회를 하는 걸 보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태의 작품 38점을 기증한 아들 수정 씨도 "예술 작품의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이 감상할 때 발생한다"며 "미술관에서 전시될 때 아버지의 컬렉션이 한 세트가 되어 보기 좋은 모습이 되도록 (기증작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성인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