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낙서 테러' 지운 경복궁…하지만 '완전 복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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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1.13. 오후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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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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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이상으로 말끔했다. 붉은색과 푸른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 테러’를 당한 경복궁 담장이 19일 만에 훼손의 흔적을 지우고 지난 4일 모습을 드러냈다. 복구 작업을 한 문화재청이 “현재 공정률은 80% 정도”라고 했지만, 전문가들의 설명을 듣기 전엔 남아있는 페인트 자국과 일상의 얼룩이 쉬 구분되지 않았다. 주변 시민들도 “빨리 지워져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분위기다.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영추문 담장에서 이태종 학예사가 레이저 세척기로 낙서 제거를 시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번 낙서 제거 작업엔 석조 문화재 보존 처리 기술이 총동원됐다. ▶락카신나 등의 용매로 페인트 성분을 녹이는 ‘습포제 방식’과 ▶미세 알갱이를 압축공기와 함께 분사해 오염 물질만 깎아내는 ‘미세 블라스팅’ ▶얼굴 점 빼듯 색소를 제거하는 ‘레이저 클리닝’ 등의 기법이다. 여기에 ‘모터 툴’과 ‘에어 툴’의 스케일링 작업과 아크릴 물감을 활용한 색 보정 등도 더해졌다.
습포제·블라스팅·레이저 등 활용
19일 만에 낙서 제거 80% 완료
삼전도비 시행착오 후 속전속결
"다 제거하려면 담장 갈아내야"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 역사에서 과학적·체계적인 낙서 제거 작업의 출발은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사건이 꼽힌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던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뒤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려고 1639년 세운 비다.

삼전도비는 2007년 2월 한 30대 남성이 치욕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겠다며 붉은색 페인트로 비석 앞뒷면에 ‘철거’ ‘병자’ ‘370’ 등을 적어넣으며 훼손됐다. 낙서를 지우고 원래 모습을 찾은 건 넉 달 뒤인 그해 6월이다.

당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은 초음파 측정기, 적외선 분광기 등을 사용해 삼전도비의 암석 구성과 페인트 성분을 분석한 뒤 제거법을 찾아 나섰다. 현장 상황과 같은 조건을 재현해 실시한 예비실험 결과를 토대로 3월 22일 문화재청은 “점토질 광물인 세피올라이트(해포석)에 락카신나 등 유기용제를 더한 습포제를 사용해 4월 20일까지 낙서 제거를 완료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 보니 상황이 달랐다. 실험실에서 페인트 성분을 잘 녹였던 락카신나와 메틸에틸케톤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세피올라이트의 오염물 흡착 능력도 미미했다. 페인트 경화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동안 낙서 지우기의 ‘골든타임’이 지나간 셈이었다. 결국 삼전도비 낙서 제거는 문화재청의 당초 계획과 다르게 진행됐고, 작업 기간도 훨씬 늘어났다.

이번 경복궁 낙서 제거 작업이 속전속결로 진행된 것은 당시의 시행착오가 남긴 교훈 덕이다. 훼손 당일인 지난달 16일 오전부터 페인트 성분을 녹이는 용매 찾기에 나섰다. 실험실이 아닌 현장에서 염색약 알레르기 테스트를 하듯 ‘스팟 테스트’를 했다. 그런데 어떤 용매도 페인트를 지우지 못했다. 페인트의 짙은 색을 약간 옅어지게 만드는 데 만족해야 했다. 추운 날씨로 화학반응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서였다.

무슨 얄궂은 우연인지, 15일까지 서울지역 최저 기온이 영상을 유지했던 따뜻한 날씨가 16일엔 영하 9.9도까지 내려가며 갑자기 추워졌다. 17일과 18일엔 영하 12도대까지 떨어졌다.

낙서로 훼손됐던 경복궁 담벼락이 4일 복원 공사를 마치고 가림막을 철거했다. 이날 복원된 담벼락 주변을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장진영 기자

현장에서 작업 실무를 진두지휘한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이태종 학예연구사는 “손상 부위가 적었다면 찜질을 해서라도 돌을 데워 작업했을 것”이라고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하지만 경복궁 담장의 훼손 부위는 총 36.2m에 달했다.

곧바로 2017년 울주 언양읍성 낙서 제거 작업을 할 때 사용했던 미세 블라스팅과 2020년 원주 지광국사탑 오염물 제거 때 효과를 본 레이저 클리닝이 동원됐다.

선례가 있다 해서 똑같이 할 수 없는 게 문화재 관리의 세계다. 보존해야 할 문화재의 물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세 블라스팅에 사용할 입자도 번번이 결정해야 했다. 이번엔 강도가 담장보다는 약하고 페인트보다 강한 입자로 돌로마이트(백운석)가 결정됐다. “고로슬래그를 쓰면 담장 표면 박리가 일어나고 호두껍데기로는 페인트 제거가 안 됐다”는 문화재청 측의 간략한 설명에서도 작업 과정의 고민이 배어났다.

문화재청은 당분간 담장 표면 상태를 지켜본 뒤 2차 제거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하지만 100% 제거가 목표는 아니다. 이태종 학예연구사는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담장 돌을 구성하는 입자와 입자 사이의 빈 공간에 사산화삼납 같은 안료 성분이 끼어 들어가 버렸다. 이를 다 제거하려면 담장 자체를 갈아낼 수밖에 없다. 크게 이질감이 안 나는 정도로만 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훼손된 문화재를 완전히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비싼 값을 치른 만큼 잊지 말아야 할 경각심이다.

글 = 이지영 논설위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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