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OCI그룹과 통합안을 계기로 벌어진 한미약품그룹 일가의 경영권 다툼이 1년 만에 사실상 마무리된다. 창업주의 배우자인 송영숙 회장 모녀 측에 장남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이사가 지분 일부를 넘기기로 하면서, 모녀와 형제 간에 벌어졌던 다툼이 끝나게 됐다. 임 이사의 지분 매각은 ‘경영 안정’뿐 아니라 상속세 재원 마련도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약품의 지주사 한미사이언스는 26일 공시를 통해 임종윤 이사가 지분 5%(주식 341만9578주)를 개인 최대 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킬링턴 유한회사(사모 펀드 라데팡스 파트너스의 특수 목적 법인)에 매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신 회장과 킬링턴은 모녀 측과 손잡고 ‘4자 연합’을 결성해 임종윤·종훈 형제 측과 대립해 왔다. 내달 27일 장외 매도를 통해 신 회장은 3%, 킬링턴은 2% 지분을 취득한다. 이로써 ‘4자 연합’ 총 지분은 현재 49.42%에서 54.42%로 늘어 과반이 된다. 반면 형제 측 지분은 21.8%로 줄어든다.
4인 연합 측은 이날 지분 거래와 관련해 ‘한미그룹 기업 가치 제고와 안정적 경영, 그리고 이를 위해 협력하는 데 필요한 것임을 상호 확인한다’고 임종윤 이사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 “상호 제기한 민형사상 고소, 고발은 모두 취하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장남인 임종윤 이사는 이날 별도 입장을 내지 않았지만, 사실상 4인 연합 측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남인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는 “형님(임종윤 이사)과 논의 중”이라는 입장만 밝혔다.
임종윤 이사가 4인 연합에 지분 일부를 넘기게 된 요인으로는 상속세 납부 압박이 컸다는 분석이다. 2020년 창업주 임성기 회장 사망 후 송 회장 2000억원, 세 자녀 각각 1000억여 원 등 총 5400억 원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임 이사는 지난달 말부터 순차적으로 여러 증권사와 맺은 주식 담보대출 만기가 돌아온 데다, 이를 연장할 수 없는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 달 지분을 매도하면 임 이사는 1265억원의 현금을 확보하게 된다.
장남인 임종윤 이사가 지분을 넘기면서 동생인 임종훈 대표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다음 달 지분 매입 절차가 마무리되면 4인 연합이 내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임종훈 대표를 내리고 전문 경영인을 투입하는 등 조직 재정비에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이다. 임 대표가 사임하지 않을 경우에는 내년 3월 주총에서 해임에 나설 전망이다. 대표이사에서 해임하려면 주총 특별결의로 3분의 2 이상 동의가 필요한데, 4인 연합은 우호 지분까지 합하면 3분의 2 이상 확보는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날 4인 연합은 “임종윤 주주도 4인 연합에 적극 힘을 보탤 것으로 기대한다”며 “지난 1년간 주주님들께 심려를 끼쳐 드렸다. 이제 모든 갈등과 반목은 접고, 한미의 발전만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으겠다”고 했다.
한미그룹 가족 간 갈등이 마무리되면서 개인 최대 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의 향후 행보는 더욱 주목을 받게 됐다. 임성기 창업주와 고향 후배로 막역한 사이였던 신 회장은 지난 1월 OCI와 통합에 반대하는 형제 편에 섰다. 하지만 지난 7월에는 송 회장 모녀 측과 지분 매매 계약을 맺으며 ‘3인 연합’을 결성했다. 신동국 회장은 지난 9월 본지 인터뷰에서 “형제 측의 외자 유치 추진이 일방적이었고 주가 하락세가 가팔라 창업주 일가가 지분 상당수를 잃을 위기였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신 회장은 지난달 28일 한미사이언스 임시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돼 한미그룹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갖게 됐다. 현재 한미사이언스 이사회 구성은 신 회장이 중심이 된 ‘4자 연합’과 형제 측이 5명씩으로 같다. 하지만 임종윤 이사가 4자 연합과 손을 잡으면서, 임종훈 대표의 지배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송 회장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장녀인 임주현 부회장은 그룹 부회장 직함만 가지고 실질적인 업무를 맡고 있지는 않다.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한미약품의 경영도 4자 연합 측이 선임한 박재현 대표가 담당하고 있다.